‘시시한 페미니즘’은 더 시시해지고 싶다
  • 노혜경 시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7.27 17:00
  • 호수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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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변화와 연대를 이끌어내는 페미니즘

시사저널에 페미니즘에 대한 글을 연재하기 시작한 지 99주가 지났다. 2년 가까운 세월이다. 그동안 세상 자체도 많이 달라졌다. tvN의 《검블유》 같은 드라마가 방영되는가 하면, 여성인물들을 가부장적으로 그리게 되면 소설이고 영화고 비판을 각오해야 할 만큼 생각이 풍부해졌다. 정치권으로 눈을 돌려보아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특별대우를 받거나 반대로 폄하당하거나, 여성 전체가 싸잡아 비난당하거나 하는 일들이 과거에 비해 현저히 줄었다. 예컨대 몇몇 놀라운 여성의원들, 이언주·박순자·김순례·나경원 의원들의 언행을 가리켜 “여자가” “여자라서”라고 말하는 일은 과거와 비교하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불과 얼마 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당시만 하더라도 “여성대통령은 어렵다”고 노골적으로 모든 여성을 단수화해서 이야기했는데 말이다.

이런 변화를 이끌어낸 것은 당연 사회 곳곳에서 게릴라 전투 하듯이 여성들이 가꾸고 싸운 결과다. 연재를 시작할 때는 나도 그런 변화를 이끌어내려는 목표를 세우고 있었음이 분명하고, ‘시시한’, 그러니까 일상의 사소하거나 놓치기 쉬운 장면들을 페미니즘의 눈으로 보고 비판하고 각성의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

ⓒ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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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은 2차 계몽주의다

시시한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하나는 앞에서 말했듯 일상을 바라보는 페미니스트의 눈을 소개하는 것이다. 범상해 보이는 사건들이 왜 불편할까,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그냥 지나가지지 않을까, 들여다보면서 이야기하는 동안 공감 또는 반감을 통해 생각하는 힘을 불러내고 길러내는 일을 하고 싶었다.

페미니즘의 목표는 추상적으로 말하면 자유, 평등, 박애 또는 연대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사람 사는 세상이다. 나는 페미니즘을 2차 계몽주의라고 명명한 적이 있다. 1차 계몽주의, 즉 휴머니즘 시대는 신과 귀족들로부터 인간의 천부인권을 되찾았지만, 한편 남성 가부장을 중심으로 한 가족주의가 낭만적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여성을 결혼과 가사노동과 육아에 붙들어맨 시대였다. 페미니즘은 여성 또한 독립된 개인일 수 있고 개인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매우 단순한 사상이다. 하지만 인간 사회 모든 장면에서 불평등을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남성들, 또 그런 남성들에게 동조하는 여성들이 있고, 때문에 “이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더 자주 더 크게 내야 했다.

그래서 두 번째 목표는, 글을 통해 일상의 배후에 흐르는 정치적인 힘을 드러내고 변화시키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것이었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다”라는 유명한 페미니즘의 명제를 소개했었다. 개개인의 삶은 겉보기엔 단절되어 있는 것 같아도 관습과 문화와 제도가 빈틈없이 규정해 놓은 지도 위의 점들이고, 너무 익숙해서 그 부자유와 불평등이 보이지 않는다. 정치는 한 사람의 자유와 평등을 위한 자원을 빼앗아 가는 일에도 작동하고, 그 반대로 자유와 평등을 증진하는 일에도 작동한다. 어느 정치를 발견하고 키울 것인가를 이 지면에서 고민하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99회가 아니라 999회를 써도 해야 할 이야기는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가 빠르게 변화했다. 연재를 시작할 때는 외로웠으나, 지금은 페미니즘이 대세다. 앞으로 해야 할 이야기가 스스로 흥미로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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