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전쟁’ 자체가 불필요한 ‘국가 전략 시프트’ 필요
  • 박광기 뉴패러다임미래연구소 소장(前 삼성전자 부사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8.09 14:00
  • 호수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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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경제·안보의 홀로서기가 한·일 경제전쟁의 진정한 승부처

일본 정부가 반도체, 디스플레이에 들어가는 핵심소재 3개 품목에 대한 수출규제 조치에 이어 우방국에 대해 개별품목 수출 허가를 면제해 주는 백색국가 제도에서도 한국을 제외했다. 이제 일본은 식료품과 목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제품에 대해 대(對)한국 수출규제를 실시할 수 있게 된다. 한국 기업은 주력 제조 수출산업 전 분야에서 제조공정에 차질이 발생하거나 거래처와의 납기 신뢰에 심각한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생겼다. 위기다.

위기를 도약의 기회로 만들려면 현 상황을 ‘경쟁 관점’에서 보지 말고 ‘운용 관점’에서 봐야 한다. 일본과의 경쟁에서 답을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강점을 운용할 기회를 찾아야 한다. 같은 궤도에서 일본과 경쟁할 것이 아니라 궤도 자체를 달리해 ‘경제전쟁’ 자체가 불필요한 환경으로 옮겨가는 국가전략이 절실한 시점이다. 무엇이 필요할까. 한국을 가두고 있는 ‘세 개의 감옥’에서 벗어나야 한다. 저성장, 샌드위치 성장모델, 동북아에 갇힌 국가 위상에서 벗어나야 문제의 근원을 해결할 수 있다.

먼저 ‘탈(脫) 저성장’이다. 지금 한·일 경제전쟁에서 필요한 건 기술경쟁에서의 극일(克日)이 아니다. 저성장 탈출이 본질이다. 이미 잃어버린 20년을 겪은 일본의 최고 이슈는 경제 부활이다. 한국 역시 주력산업의 쇠퇴로 십여 년간의 저성장 기조에 경제 규모가 수축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지금 한국의 저성장은 일본 부품 공급에 문제가 생겨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일본에 싸워 이긴다고 해서 경제가 다시 살아나는 것도 아니다. 누가 먼저 경제력을 더 키워 4만 달러, 5만 달러 사회로 가느냐에 따라 승부가 결정 나는 게임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역사에 지름길은 있어도 생략은 없다” “일본에 지지 않겠다”고 했다. 장기전을 각오하고 있다는 뜻이다. ⓒ 시사저널 이종현
문재인 대통령은 “역사에 지름길은 있어도 생략은 없다” “일본에 지지 않겠다”고 했다. 장기전을 각오하고 있다는 뜻이다. ⓒ 시사저널 이종현

한국 가두고 있는 세 개의 감옥에서 탈출하기

기술 자립과 국산화, 수입처 다변화 노력은 지금껏 안 해 오지 않았다. 초격차를 외치며 지금껏 해 왔고 성과도 있었다. 계속해야 할 일이지만 현실을 직시하면 모두 본질적인 해법은 될 수 없다. 자칫 일본 대응에 매달리다 정작 일본의 보복 이전부터 수축 중인 주력산업을 되살릴 향후 2~3년의 골든타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

다음으로 한국 경제가 탈피해야 할 감옥은 ‘샌드위치 성장모델’이다. 일본 소재·부품·장비의 의존도가 아니라 중·일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의 상품 제조 수출형 성장모델에서 벗어나는 것이 본질이다.

이번 일본의 수출규제는 한국 주력 제조산업 경쟁력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나게 했다. 반도체 메모리는 세계 시장의 60%를 차지하고 있지만 생산 장비와 소재는 국산화 비율이 각각 17%, 50%에 불과하다. 자동차산업도 전기자동차나 친환경차의 경우 일본 기술 없이는 만들 수 없다. 세계 1위 조선산업은 고성능 친환경 도료의 90% 이상, 건설 분야에서는 미니 굴착기의 90%를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다.

한국은 일본에 241억 달러 규모의 무역적자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 대부분이 부품소재 수입이다. 일본이 몽니를 부리면 주력산업 대부분이 타격을 입는 구조다. 우리 경제구조가 반도체, 화학 등 기존 주력산업은 물론 수소차, 2차 전지 등 미래 산업도 양산 제조업을 주력으로 가져가려고 하는 한 일본 기술의 의존도를 줄이기는 쉽지 않다. 이번 사태로 우리는 중국의 제조굴기, 보호무역, 선진국과의 기술격차 등으로 동북아 분업구도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되어 버린 한국의 ‘상품 제조 수출’이라는 성장모델 자체가 한계점에 이르렀음을 직시하게 됐다.

양산 제조를 버리자는 것이 아니다. 한·중·일의 국제 분업 구도가 같은 구조로 영원히 유지될 수는 없다. 후발국의 출현에 따라 분업 역할을 계속 진화시키는 국가만 살아남는다. 이제 우리의 경제 체질도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끼여 샌드위치가 된 양산 제조 중심에서 후발국 대비라는 한 단계 위로 올라가야 한다. 일본도 완성품 제조가 한국으로 넘어가면서 핵심부품·소재·장비 중심의 고부가 산업으로 바뀌지 않았던가. 더욱이 핵심부품과 소재를 국산화하려면 양산 제조에 매여 있는 자본과 인력을 해방시켜야 연구개발 여력을 키울 수 있다. 우리만의 강점을 살려 상품 제조 수출을 대체할 새로운 성장모델을 찾아 ‘탈 샌드위치’하는 것이 본질적 해법이다.

우리 실력이 일본 대비 부족하다고 자학할 필요는 없다. 실력을 어떤 잣대로 바라보느냐의 문제다. 소재 분야 핵심기술이라면 우리가 부족하겠지만 우리만의 강점, 실력은 따로 있다. 이를 찾아 활용할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진정한 극일은 일본 기업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만의 강점으로 일본 기업이 할 수 없는 분야를 찾아 그 일을 해낼 때 자연적으로 이뤄진다. 우리 경제가 성장기에 있을 때는 극일을 목표로 뛸 수 있지만 경제가 성숙기에 접어든 지금 극일을 목표로 우리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발상 자체가 하수다.

마지막으로 지금 우리가 유념해야 할 키워드는 ‘탈 동북아’ 국가 위상이다. 중·일에 영향받는 동북아의 한국이 아니라 경제·안보의 홀로서기가 가능한 세계 속의 한국으로 거듭나는 것이 본질이다.

경제 규모 세계 12위로 성장한 한국은 지금 미국·중국·일본으로부터 홀로서기를 강요받고 있다. 강대국으로부터 안보·경제적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에 대한 해법을 찾을 때까지 강대국의 압박은 계속될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홀로서기를 한다는 것은 정치·외교적 중립 위상을 확보하기 이전에 중립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져야만 가능한 일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8월6일 “한국이 한·일 청구권협정을 위반하는 행위를 일방적으로 하면서 국제조약을 깨고 있다”고 주장했다. ⓒ AP 연합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8월6일 “한국이 한·일 청구권협정을 위반하는 행위를 일방적으로 하면서 국제조약을 깨고 있다”고 주장했다. ⓒ AP 연합

홀로서기 가능한 ‘세계 속 한국’으로 거듭나야

이를 위한 선결조건은 국가산업과 기업이 특정 강대국의 시장 의존도, 기술 의존도에서 벗어나 우리만의 차별화된 산업을 구축하는 일이다. 우리 기업이 대일본 기술 의존도, 대중국 시장 의존도, 대미국 안보 의존도를 줄일 수 있어야 홀로서기를 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다. 국가산업 경쟁력이 국제정치를 선도하는 시대다.

미국의 자국 중심주의, 중국굴기, 아베의 정상국가론, 미·중 패권경쟁의 넛크래커(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국면에 빠진 한국의 국가 좌표는 무엇인가? 강대국 4개국 관리에 힘을 소진할 것이 아니라 성동격서로 국제사회 다수의 개발도상국들을 끌어들여 국제사회의 신뢰 자산을 높여야 한다. 신흥국들과 산업 파트너십을 맺어 ‘국제사회 다자연대’의 토대를 구축하는 것을 국가 좌표로 삼아야 한다.

홀로서기 국가전략으로 선·후발국의 샌드위치에서 선·후발국을 잇는 ‘글로벌 브리징 허브국’으로 포지셔닝할 수 있다. 글로벌 허브로서 한국은 신흥국의 산업 수도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제품을 만들고 팔아서 국가경제를 성장시키던 단계에서 한국의 산업화 경험과 노하우를 코칭하는 산업 파트너십 성장모델로 진화하는 것이다. 한·일 경제전쟁의 진정한 승부처는 경제·안보적 자주독립 곧 홀로서기다. 한국은 아직 전성기가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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