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숙 인터뷰①] “장관 일찍 내려놓은 것은 축복…요즘 여성 정치인들 모습 절망스럽다”
  • 구민주 기자 (mjooo@sisajournal.com)
  • 승인 2019.08.14 10:00
  • 호수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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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30주년 특별기획 ] 대한민국, 길을 묻다(26) 55년 차 배우 손숙 예술의전당 이사장
“정부, 문화예술 지원 매우 실망…이희호 여사, 내가 존경하는 단 한 분”

혼돈의 시대다. 혹자는 난세(亂世)라 부른다. 갈피를 못 잡고, 갈 길을 못 정한 채 방황하는, 우왕좌왕하는 시대다. 시사저널은 2019년 올해 창간 30주년을 맞았다. 특별기획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 등 각계 원로(元老) 30인의 ‘대한민국, 길을 묻다’ 인터뷰 기사를 연재한다. 연재 순서는 인터뷰한 시점에 맞춰 정해졌다. (1)조정래 작가 (2)송월주 스님 (3)조순 전 부총리 (4)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5)손봉호 기아대책 이사장 (6)김원기 전 국회의장 (7)김성수 전 대한성공회 대주교 (8)박찬종 변호사 (9)윤후정 초대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 (10)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11)한승주 전 외무부 장관 (12)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13)허영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 (14)이종찬 전 국회의원 (15)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16)박관용 전 국회의장 (17)송기인 신부 (18)차일석 전 서울시 부시장 (19)임권택 감독 (20)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 (21)이문열 작가 (22)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교수 (23)역사학자 이이화 선생 (24)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 (25)강상중 도쿄대 명예교수 (26) 손숙 예술의전당 이사장

“원로 아니고 현역. 원로라는 말 너무 싫어(웃음).”

가만있어도 지치는 여름, 서울과 경남을 오가며 쉼 없이 연극무대에 오르는 현역 배우에게 ‘원로’ 타이틀은 실례였다. 전국 공연에 드라마·영화 출연도 하고 틈을 내 미국 여행도 다녀온 손숙 예술의전당 이사장은 “아직 힘에 부친다, 못 하겠다 생각해 본 적 없다”며 단단한 여유를 보였다.

몸은 바빠도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고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비결은 다섯 개 넘게 구독하던 신문을 끊고 저녁 뉴스를 보지 않는 것. “눈에 황반변성이 와서 글을 거의 잘 못 읽어요. 돋보기를 써도 책 한두 페이지 보면 너무 어지러운데, 난 이게 하나님이 준 축복 같아. 너무 고요하고 평온해요. 아침마다 화가 안 나.” 젊었을 적 출연을 주저했던 드라마 장르에 요즘 활발히 얼굴을 비치는 것도 “쓸데없는 까탈이나 고집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손 이사장은 얘기한다.

일상의 불편마저 축복으로 받아들이기까지 그는 배우로서, 그 밖에 붙은 타이틀로서 여러 번 곡절과 고비를 경험했다. 평생 잊지 못할 공연 날, 뜻밖의 뇌물수수 의혹에 휘말려 일생의 절망을 맛보았다. 50년 넘게 몸담은 분야의 ‘블랙리스트’에서 이름이 발견되기도 했다. 7월12일 시사저널은 서울 예술의전당 이사장실에서 막 부산 공연을 마치고 올라온 손 이사장을 만났다.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다’던 과거 기억조차 덤덤하게 풀어낸 그는 “인생의 절반을 (무대에서) 남의 인생으로 산 덕에 이해가 넓어졌다”며 지난 여정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 시사저널 이종현
ⓒ 시사저널 이종현

여행 자주 다니시나요?

“이전엔 혼자 많이 다녔는데 이제 나이도 있고 해서 여행팀을 하나 만들어 같이 다녀요. 이번에도 미국 뉴욕을 다녀왔는데 바깥에 나갈 때마다 참 우리나라가 잘사는 거 같아. 예전엔 미국 공항 가면 ‘우와’ 했는데 이젠 별로예요. 이 작은 분단국이 이렇게 잘사는 건 기적인 거 같아요.”

젊은 친구들은 삶이 갈수록 어렵고 힘들다고 하는데요.

“고생을 안 해 봐서 그래(웃음).”

연극 계속 바쁘게 하고 계신데, 요즘도 시작 전에 긴장 많이 되세요?

“공연 전엔 늘 똑같이 설레고 긴장돼요. 오늘은 또 어떤 관객일까, 늘 관객은 새로우니까요. 연습실에 있을 때가 가장 편하고 행복하고… 이런 게 연극을 계속하게 만드는 원동력인 거 같아요.”

처음 배우 한다고 했을 때 그 당시엔 굉장히 반대가 심했을 것 같아요.

“우리가 1년에 제사 열 몇 번씩 지내는 아주 극보수적인 집안이었어요. 당시 배우는 기생 비슷하게 생각하던 풍토가 있어서, 내가 대학 들어가 연극하면서 배우 되겠다 하니까 우리 어머니는 난리가 나셨죠. 그 반대가 오래갔어요. 거의 돌아가실 때까지 못마땅하고 창피하게 생각하셨어요. 누구는 군수 마누라가 됐다더라 하면서. 공연장도 몇 번 안 오셨어요.”

1999년 연극 《어머니》 러시아 모스크바 공연 당시 모습 ⓒ MBC뉴스 화면 캡쳐
1999년 연극 《어머니》 러시아 모스크바 공연 당시 모습 ⓒ MBC뉴스 화면 캡쳐

“뇌물 의혹, 예술가 만만하게 보나 생각했다”

배우 경력 55년. 손 이사장의 ‘인생 연극’은 무엇일까. 그는 그동안 이 질문에 망설임없이 연극 《어머니》를 꼽았다. 그에게 《어머니》는 1999년부터 15년간 꾸준히 해 온,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연극이었다. 그럼에도 손 이사장에게 있어 이 연극은 ‘쓰라린 생채기’로 남았다. 극을 만든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이 ‘미투’로 구속되면서 더 이상 무대에 올릴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손 이사장이 이 연극을 아프게 기억하는 이유는 한 가지 더 있다. 1999년 5월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환경부 장관으로 임명된 직후 그는 연극 《어머니》의 러시아 모스크바 초청 무대에 올랐다. 성황리에 공연이 끝나고, 당시 대통령을 따라 순방 온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소속 기업인들로부터 그가 격려금을 받은 사실이 논란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장관 임명 한 달 만에 사표를 내고 평생 가장 어둡고 좌절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99년 모스크바 공연, 여러모로 잊을 수 없는 날일 것 같습니다.

“그날 공연은 정말 감격스러웠어요. 공연 후 10분 넘게 전 관객이 기립박수를 치는데 울컥하면서 ‘이들을 위해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그때 전경련 몇 분이 무대로 올라와 자신들이 걷은 돈을 흰 봉투에 넣어서 나에게 대표로 전한 건데 그게 그렇게 뇌물수수라는 무서운 이름으로 커질 줄은 몰랐어요.”

그 후 장관에서 바로 물러나시고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운 시간을 보내셨다고 들었어요.

“일단 너무 터무니가 없으니까. 뇌물의 뜻을 모르는 거 같아. 관객들이랑 기자들 다 있는 곳에서 준 걸 그렇게 언론이 공격하니까, 한편으로는 ‘예술가를 만만하게 보는구나, 얘 하나쯤 희생시켜도 괜찮겠구나’ 생각한 게 아닌가 싶기도 했어요. 내가 장관 하겠다는 것도 아니었지만, 평생 내 신념이 와르르 무너진 것 같아서 정말 죽고 싶었어요. 그런데 세월이 지나서 생각하면 오히려 그때 사건이 감사하기도 해요.”

어떤 점이 감사하세요?

“그 사건이 안 터졌다면 내가 몇 년이고 그 장관 자리에 있었을 거고, 그럼 과연 내가 다시 연극계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 하면 너무 감사해요. 다만 (김대중) 대통령님이 미안해하셨어요. 그건 좀 맘에 걸리죠.”

짧게 끝나버린 정치활동에 대한 아쉬움이나 미련은 없으세요?

“전혀! 전혀 없어요. 빨리 돌아온 게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얘기 해도 되나 모르지만, 요즘 정치하는 여성들이 하는 일련의 언행을 보면 너무 절망스러워요. 여자들이 정치하기 시작하면 뭔가 다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떨 땐 더 나쁘고 터무니없는 말들을 해요. 그냥 아무 말 대잔치! 저렇게 하고 집에 돌아가면 얼마나 공허할까 싶고. 바야흐로 여성의 시대인데, 좀 더 멋있게 하면 안 되나 안타까워요.”

정치권을 곧장 떠났지만, 최근까지 이사장님이 어떤 후보를 지지한다 또는 지지하지 않는다, 이런 얘기들이 계속 돌았어요.

“피곤하죠. 내가 누구를 좋아할 수도 있는 건데 그게 왜요. 누구를 지지하면 또 어때, 자유가 있는데. 그런데 왜 배우가 누굴 지지하면 그걸 그렇게 색안경 끼고 예민하게들 보는지. 우리 같은 연극하는 동료들 보수, 진보, 극우, 극좌 다 있어요. 무슨 상관이야.”

 

대통령부터 무명 시민까지 인터뷰 경력 30년

손숙이 기억하는 ‘가장 특별한 사연’은…

손숙 이사장은 1989년 MBC 라디오 《여성시대》를 시작으로 30년 가까이 라디오방송을 진행했다. “당대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다 만났다”는 그의 말이 과장이 아닐 만큼, 엽서로 또는 전화로 그는 매일 다양한 사람과 마주했다. 이 역사를 엮어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라는 책도 3권 냈다. ‘어떤 사연이 가장 기억에 남느냐’는 어려운 질문에 손 이사장은 큰 고민 없이 한 사람의 얘기를 꺼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죽겠다’는 우편이 쏟아지던 IMF 무렵, 무명의 시민에게서 온 ‘유서’에 가까운 편지였다.

”일 다 망하고 처가, 친가까지 다 보증을 선 최악의 상황이라 자기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애청했던 《여성시대》에 편지를 보낸다면서…어떻게 이분과 전화 연결이 돼서 한 30분을 ‘죽는 건 패배다’ ‘당신보다 힘든 사람 많다’며 설득했어요. 그쪽도 울고 나도 울면서 난리를 쳤죠.“

시간이 흐르고, 이날의 충격은 가끔 잠깐 떠오르다 말 정도로 멀어졌다. 그 기억이 다시 살아난 건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2013년 대구 공연 때였다. “분장실에 있는데, 누가 나를 꼭 만나야겠다는 거예요. 이름을 들어보니 기억도 없고. 만났는데 그분이었어요. 부인하고 성인이 된 딸을 데리고 왔어요. 그때 나랑 얘기하고 다시 살아보자 결심했다고 하는데 그때 감동은 말로 다 못 해요.” 당시를 회상하는 손 이사장의 목은 어느덧 메어 있었다.

IMF 당시 라디오국은 벼랑 끝에서 온 편지들로 가득했다. 기막힌 사연들을 읽으며 하도 울어 당시 손 이사장은 ‘수도꼭지’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는 “평생 흘릴 눈물을 그때 다 흘렸다”며 “라디오는 사람을 살리는 매체였고, 내성적이고 깐깐하던 나를 넓히고 키워준 존재였다”고 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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