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호황기 마지막 세대의 눈물 “설 자리가 없다”
  • 김도현 시사저널e 기자 (ok_kd@sisajournal-e.com)
  • 승인 2019.08.15 10:00
  • 호수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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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임원, 연령은 ‘하향’ 직급은 ‘단순화’…재계 전반으로 확대될 가능성에 ‘노심초사’

#1 A그룹 모 부장은 최근 회사에 몇 남지 않은 동기들과 식사 모임을 가졌다. 그동안 임원 승진을 목표로 가열차게 달려온 만큼, 이날 모임의 화두도 회사 얘기였다. 그러다 이내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대기업 임원들의 연령대나 연차 등이 낮아지더니 급기야 직급까지 간소화되면서 이들이 설 자리가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2 대학생·고등학생 자녀를 둔 B그룹의 모 부장도 근심이 깊다. 차기 인사 때 임원 승진 가능성이 높다는 사내 평가가 있지만, 된다 한들 근속기간이 길어질 수 있을지에 대한 염려가 크다. 자녀들 학자금부터 결혼 준비까지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앞서 직장을 등지고 퇴직금으로 자영업에 도전했다 쓴맛을 본 지인들을 숱하게 봐온 터라 “버텨야 한다”고 다짐하지만 자신감은 자꾸만 떨어져간다.

최근 대기업 임원의 연령 파괴와 직급 단순화가 이어지면서 40대 후반, 50대 초반 임원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 연합뉴스
최근 대기업 임원의 연령 파괴와 직급 단순화가 이어지면서 40대 후반, 50대 초반 임원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 연합뉴스

중간관리자 때까지 버텼지만 회사는 비상경영

최근 주요 대기업들이 선보인 임직원 직급 관련 정책들로 인해, 해당 기업은 물론이고 타 기업들의 중간관리자들에 해당하는 직원들의 시름이 깊어진 모양새다. 기업의 차·부장급과 갓 임원이 된 이사대우·이사·상무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 대부분은 기업의 성장 호황기 때 취업해 IMF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저성장·침체의 늪 등을 견뎌왔다는 공통 이력을 지녔다.

근심의 이유는 일부 대기업의 임원직 개편이 재계 전반적인 조직 규모 축소의 ‘신호탄’이 될 것이라고 내다보기 때문이다. 최근 수년간 주요 기업들의 임원 인사를 보면 40·50대 비중이 높아졌으며, 60대 비중이 낮아졌음을 알 수 있다. ‘기수론’이란 표현이 심심치 않게 등장할 정도로 40대들의 약진이 임원 인사에서 돋보이기도 했다.

한국CXO연구소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10대 기업 임원들은 평균적으로 49세에 임명돼 54세에 퇴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임원은 기업 내에서 일종의 생존자다. 같은 해 입사했더라도 극소수만이 임원 반열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원 연령 하향화는 기회가 줄어듦과 동일한 의미가 된다. 승진에 실패해도 재직하며 재도전할 수 있었던 과거와 달라진 셈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의 평균연령은 42.1세다. 고령화사회 진입과 출산율 저하 등 사회적 요인으로 평균연령은 점차 높아지는 추세다. 공교롭게도 임원 진급을 앞둔 세대 비율이 가장 높다. 반면 기업 내에서 이들의 일자리는 급격히 줄고 있다. 최근 대기업들은 임원 및 일반직 직급을 단계적으로 축소 또는 폐지하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어 불안감이 더하다.

일례로 현대자동차그룹은 올 초 기존 ‘이사대우·이사·상무’ 등을 일괄적으로 ‘상무’로 통합했다. 기존 6단계였던 임원 직급을 4단계(사장-부사장-전무-상무)로 단순화했다. 하반기에는 일반직 ‘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 직급을 ‘사원-매니저(대리)-책임매니저(과·차·부장)’ 등으로 간소화하는 방안을 추진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SK그룹은 아예 임원 직급을 폐지했다. ‘본부장’ ‘실장’ 등 직책을 호칭으로 사용한다는 방침이다. 직책이 없을 경우 부사장으로 통일한다. 삼성·LG그룹은 현재 내부적으로 논의를 계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삼성의 경우 일반 직급을 4단계로, LG는 3단계로 축소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일부 계열사에서 시범적으로 도입한 사례도 있다.

재계를 선도하는 상위 그룹들의 변화는 점차 여타 대기업뿐 아니라 중견기업까지 확산될 것이란 게 전문가들 시각이다. 특히 연령 하향 추세 속에서 직급 통폐합을 거치며 필요 임원 규모 또한 더욱 축소될 것으로 예상돼 파장이 확산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각 업체들은 직급 축소의 이유로 △수평적 조직문화 △신속한 의사결정 △창의적 조직문화 등을 들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다른 의견들도 나온다. 오계택 한국노동연구원 임금직무혁신센터 소장(센터장)은 시사저널e와의 통화에서 “(기업들의) 속내가 있다”고 말했다. 중간관리자가 된 이들이 채용됐을 당시와 지금의 기업 환경이 많이 변했기 때문에 기업들 역시 새로운 방법을 강구하게 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오 소장은 “승진에 따른 임금 상승을 억제하며 중장기적 관점에서 (기업들이) 비용 감소를 노린 게 아닌가 싶다”고 해석하며 “대상이 되는 중간관리자급 임직원들은 기업이 한창 성장하던 호황기에 채용된 반면, 오늘날 기업들은 현상유지조차 쉽지 않은 상황에 놓여 있어 특정 연령대의 적체현상이 발생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인건비 줄여 경쟁력 확보하는 방식 지양해야”

그는 이어 “중간관리자의 역할은 점차 줄고 있는데, 고령화에 따른 정년연장과 임금피크제 도입에 대한 논의가 그동안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면서 “임금 조정 등을 바탕으로 이들이 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시스템을 안착시키는 것이 시급하다”고 조언했다. 이와 함께 그는 “자리가 부족한 것이지, 해당 연령대의 업무 능력이 결코 뒤처지는 것은 아니다”며 “이들이 오랜 기간 쌓아온 네트워크와 개별 전문성을 살려 특정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 주는 구조가 안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는 “기업이 인건비 절감을 바탕으로 한 비용 절감을 통해 경쟁력을 갖추는 것은 부가가치 창출을 낮추는 등 국가적으로 봤을 때 결코 유익한 수단이 아니다”면서 “AI의 등장, 기계화·자동화 등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일자리 총량이 줄어드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이 팽배한데, 기업이 감안하는 것은 필요에 의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를 당연시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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