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은희였을, 우리 모두의 이야기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8.24 12:00
  • 호수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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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그 시대를 품은 영화 《벌새》

1994년, 그해 대한민국은 유난히 다사다난했다. 기상 관측 사상 최고의 무더위가 전국을 달궜고, 김일성이 사망했고, 아현동 가스가 폭발했으며, 성수대교가 붕괴했다. 지존파 사건으로 전 국민이 경악한 것도, 학력고사 시대가 막을 내리고 수능이 도입된 것도 바로 이때 1994년이다. 그리고 그해는 민주화 이후의 자유와 감성이 끓어오르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 양면적인 시대의 한복판에 열네 살 소녀가 있다. 소녀의 이름은 은희(박지후). 《벌새》는 은희의 일상을 조용히 따라간다. 그리고 기어코 당신을 그 시절로 데려다 놓고야 만다.

영화 《벌새》의 한 장면 ⓒ (주)엣나인필름
영화 《벌새》의 한 장면 ⓒ (주)엣나인필름

다사다난했던 1994년 속을 비추다

은희네 다섯 식구는 대치동에 산다. 사교육의 메카인 대치동은 명문대 입학이 성공의 지름길이라 믿는 중산층 시민들의 욕망이 모여 형성된 동네다. 학력은 일종의 계급이었고, 교육은 높은 계급으로 오르는 통로였다. 현대판 맹모(孟母)들이 대치동으로 몰려든 이유다. 떡집을 운영하는 은희 아버지의 자식 교육이 유별난 이유이기도 할 터다. 그는 대치동에 살면서 강북에 있는 학교에 다니는 첫째 딸 수희(박수연)가 창피하다. 공부에 통 관심이 없는 막내딸 은희에겐 별다른 기대가 없어 보인다. 그의 욕망의 레이더망은 아들을 향해 뻗어 있다.

영화 속에서 가족의 행복도는 밥상머리에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식탁에 둘러앉은 위치만으로도 서열과 분위기는 읽힌다. 은희네도 여지없다. 상석에 앉아 “우리 세대 때는 말이야~”를 읊는 아버지, 권위적이다. 그런 아버지의 말에 별다른 대꾸를 못 하는 엄마, 억눌려 있다. 아버지 옆자리는 어김없이 아들의 몫인데, 부모의 기대 가득한 시선 때문인지 어깨가 사뭇 무거워 보인다. 상석에서 가장 멀리 비켜나 앉은 두 딸이 먹는 건 밥인가, 눈칫밥인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와 가족 소통의 단절을 《벌새》는 그렇게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남성중심적 권위로 똘똘 뭉친 아버지의 사고방식과 욕설은 아들에게 자연스럽게 대물림된다. 그리고 은폐된다. 오빠의 폭력을 고발하는 은희의 목소리는 별것 아닌 것처럼 묵인됨으로써 더 큰 폭력의 여지를 남긴다. 은희 엄마의 암묵적 동의는 그 시대, 여성의 인권이 폭력 아래 얼마나 일상화돼 있었는가를 드러내는 부분이라 특히나 쓰라리다. 영화는 사랑받고 싶고, 관심받고 싶은 은희의 모습에서 1초에 아흔 번 날갯짓하는 작은 새, ‘벌새(Hummingbird)’를 불러세운다.

소녀의 관계 맺기는 집에서도 밖에서도 힘겹다. 은희는 공부보다 그림 그리는 게 좋다. 학교는 그런 은희의 취향 따위엔 관심이 없다. “노래방 말고 서울대!”를 주입시키는 담임 선생의 강요는 은희에게 묘한 열패감을 안긴다. 남자친구의 이유 없는 변심, 믿었던 친구의 갑작스러운 배신, 좋아한다고 불쑥 고백했던 후배와의 이해할 수 없는 단절이 겹치면서 은희의 상실감도 커진다.

이러한 은희의 일상은 한문학원 선생 영지(김새벽)의 등장과 함께 변화를 맞는다. 대학교 휴학 후 대치동 학원가에 흘러온 영지는 운동권 출신으로 추측되는데, 그녀는 은희를 가르치려 들지도 거짓 웃음으로 대하지도 않는다. 자신을 한 사람으로 대하는 영지에게서 은희는 아직 가 닿지 못한 세상에 대한 희망을 품는다. “잘린 손가락 바라보면서 소주 한잔 마시는 밤 덜컥덜컥 기계 소리 귓가에 남아 하늘 바라보았네.” 은희는 영지가 불러주는 운동권 노래 ‘잘린 손가락’의 가사를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나는 (부조리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알아나간다.

영화는 은희의 일상에서 특별한 서사를 잡아채지는 않는다. 대신 순간순간 은희가 느끼는 감정과 일상의 정서를 잡아내는 데 집중한다. 관계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은희를 보고 있노라면, 은희의 이름을 지우고 그곳에 자신의 이름을 대입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한 개인의 경험담이 다수 관객의 보편적 감성을 건드리는 마법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10월21일. 성수대교가 무너져 내린다. 은희의 사적인 이야기는 보편의 감정을 넘어, 성수대교 붕괴와 맞물리면서 한국 사회 전체로 그 넓이를 확장한다. 그것은 인재였다. 성장제일주의가 낳은 균열이고, 경고였다. 성수대교가 붕괴하면서, 은희 안에 소중한 소우주도 무너져 내린다. 《벌새》는 한국 사회에 슬픔을 안긴 실제 사건을 경유하며 우리가 무엇을 잊고 지냈는지, 어떻게 망가졌는지, 더 나아가 시대의 참사가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바라본다. 20년 후 또 하나의 시대적 비극을 만난 우리는, 그것이 어떤 것인가를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수많은 은희들은 우리 도처에 있다.

개인의 경험담이 보편의 감성으로 확장되는 마법

《벌새》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그 누구도 단선적이지 않다. 한 인간을 함부로 단정 짓지 않으려는 사려 깊은 연출의 태도 덕분이다. 권위적인 아버지도, 폭력적인 오빠도, 밖으로만 나돌던 언니도, 늘 피곤함에 절어 있는 엄마도 모두 타인에게 이해받고 싶은 또 하나의 존재들임을 영화는 펼쳐 보인다. 모든 배우가 정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듯 스크린에서 살려내지만, 특별히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건 은희를 연기한 신예 박지후다. 복잡다단한 감정을 드러낼 줄 아는 표현력도 좋지만, 카메라 각도에 따라 다른 인상을 풍기는 얼굴이 매력적이다. 자주 만나게 될 얼굴이다.

이 영화를 만든 김보라 감독은 1994년 당시 은희처럼 중학생이었고, 은희처럼 대치동에서 미묘한 계급 갈등을 경험했으면서, 성수대교 붕괴로 상실을 맛봤다. 그 시기 체험한 결과물이 바로 《벌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벌새》는 정식 개봉도 하기 전에 세계 영화제에서 25개 상을 받았다. 눈여겨볼 건 단순히 수상 이력이 아니다. 1994년 대한민국에서 한 소녀가 겪는 내밀한 일상이 어떻게 세계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는가. 《벌새》의 저력은 여기에 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도 아름답다.”(영지 선생님의 편지 중)

 

하반기 극장가, 여성 감독 영화 쏟아진다

올 하반기 극장가는 《벌새》를 비롯, 여성 감독들의 작품이 대거 포진됐다. 먼저 《우리들》로 호평받은 윤가은 감독의 신작 《우리집》이 포문을 열었다. 가족의 문제를 풀기 위해 직접 나선 아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윤가은 감독 특유의 섬세함과 따뜻한 시선이 극 전반에 진동한다. 9월26일 찾아오는 《아워바디》는 고시 준비생 자영(최희서)이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생기는 변화를 세심하게 따라가는 영화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 한가람 감독이 연출한 작품으로 영화 《박열》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최희서가 주연을 맡았다. 이옥섭 감독의 《메기》도 같은 날 관객을 만난다. 재기발랄한 상상력이 담긴 작품으로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10월 개봉을 확정했다. 젠더 이슈의 중심에 선 작품으로 영화화 단계에서부터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정유미와 공유가 출연하고 신인 김도영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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