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일왕들이 걸어온 ‘반성의 역사’
  • 류애림 일본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8.23 17:00
  • 호수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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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일왕부터 나루히토 일왕까지 계승…총리인 아베는 침묵

‘전몰자를 추도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날’. 일본에서 8월15일에 붙인 정식 명칭이다. ‘종전기념일’ ‘종전의 날’로 불리기도 한다. 이날은 ‘전국 전몰자 추도식’이 열린다. 1952년 5월2일 처음 열린 추도식은 1963년부터 8월15일에 치러지고 있다. 1964년 한 차례 야스쿠니 신사에서 진행됐지만 이후에는 종교색을 지우고 도쿄 지요다구에 있는 닛폰부도칸에서 열리고 있다. 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의 전사자들 약 230만 명과 공습 및 원폭투하로 목숨을 잃은 약 80만 명의 일반시민을 기린다.

올해 5월 즉위한 나루히토 일왕은 정오에 맞춰 묵념한 뒤 약 1분30초 동안 ‘추도사’를 말했다. 아버지 아키히토 상왕이 2015년부터 계속해 추도사에서 언급한 ‘깊은 반성’을 아들 나루히토 일왕도 반복했다. “전쟁 후 긴 평화의 세월을 회상하며 과거사를 뒤돌아보고 깊은 반성 위에 서서, 다시 전쟁의 참화가 일어나지 않길 간절히 원한다”며 “세계의 평화와 우리나라(일본)의 한층 나아간 발전을 기원한다”고 말했다.

나루히토 일왕 내외가 8월15일 도쿄도 지요다구 ‘닛폰부도칸’에서 열린 태평양전쟁 종전(패전) 74주년 ‘전국전몰자추도식’에 참석, 묵념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나루히토 일왕 내외가 8월15일 도쿄도 지요다구 ‘닛폰부도칸’에서 열린 태평양전쟁 종전(패전) 74주년 ‘전국전몰자추도식’에 참석, 묵념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종전 70주년’ 추도사에 ‘반성’ 첫 등장

아키히토 상왕이 처음 ‘깊은 반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종전 70주년을 맞이한 2015년의 추도식에서였다. 아키히토 상왕은 당시 “과거를 뒤돌아보고, 앞선 대전(大戰)에 대한 깊은 반성과 함께 앞으로는 전쟁의 참화가 반복되지 않길 간절히 바란다”고 밝혔다. 이후에도 줄곧 ‘깊은 반성과 함께’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나루히토 일왕 추도사의 전반적 내용도 거의 다르지 않다. 다만 ‘깊은 반성과 함께’라는 표현이 ‘깊은 반성 위에 서서’라는 표현으로 바뀌었다. 일본 현지에서는 전전 세대로부터 전후 세대로의 변화, 세대의 변화가 이 표현 속에 나타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아키히토 상왕은 1933년 12월에 태어났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이며 1945년 당시 가쿠슈인초등과(초등학교에 해당) 6학년이었다. 전쟁과 패전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다고 한다. 반면 나루히토 일왕은 1960년 2월에 태어났다. 전쟁이 끝난 후 15년이나 지난 시점에 태어난 전후 세대다. 이를 쇼와사(昭和史)를 다루는 논픽션 작가 호사카 마사야스는 ‘동시대사(史)에서 역사로의 단계 이행’이라고 표현했다. 호사카는 아키히토 상왕의 발언이 같은 시대를 걸으며 전쟁을 받아들여온 입장이었다면 나루히토 일왕의 이번 추도사는 전쟁을 역사적인 시각으로 인식하면서도 ‘깊은 반성’을 다음 시대에 이어가겠다는 생각을 표현한 것이라는 얘기다.

아키히토 상왕의 추도사는 1989년부터 시작됐다. 큰 내용의 변화 없이 이어져왔지만 종전 70주년을 맞은 2015년 ‘깊은 반성’이라는 표현을 처음 썼다. 아베 신조 총리는 같은 해 8월14일 ‘전후 70년 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문에서 역대 일본 내각의 방침을 인용하는 형태로 ‘통절한 반성’이 포함됐지만 다음 날 열린 추도식에서는 ‘가해’와 ‘반성’을 언급하지 않았다. 19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 이후 역대 일본 총리는 가해 책임과 반성을 표명했다. 2007년 제1차 아베 정권 당시에는 아베 총리도 “우리나라(일본)는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에 대해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겼다”고 ‘가해’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나 2013년 출범한 제2차 아베 정권의 추도사에서는 ‘가해’와 ‘반성’이 자취를 감췄다.

히로히토 일왕(왼쪽)과 아키히토 일왕 ⓒ AP 연합
히로히토 일왕(왼쪽)과 아키히토 일왕 ⓒ AP 연합

쇼와 일왕의 ‘반성 의지’ 사료에서 밝혀져

반면 새로 발굴된 사료에 의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왕이었던 히로히토, 즉 쇼와 일왕도 생전 ‘반성’의 뜻을 표하고자 했지만 결국에는 언급할 수 없었던 경위가 밝혀졌다. 일본 NHK는 초대 궁내청 장관 다지마 미치지(田島道治·1885~1968)가 쇼와 일왕과의 대화를 기록한 ‘배알기(拜謁記)’를 다지마의 유족으로부터 입수해 지난 8월18일 공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료를 위해 연합국과 일본이 맺은 평화조약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1951년 9월8일 조인되고, 다음 해 4월28일 발효됐다. 쇼와 일왕의 ‘반성’에 관한 언급은 이 시기에 이뤄졌다. 1952년 5월3일 열릴 강화조약 발효 기념행사를 앞두고 기념식사를 구상하면서 나온 발언이다. 1952년 1월11일에는 다지마 장관에게 “나는 성명 메시지에는 반성이라는 문구가 들어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중략) 무슨 일이 있어도 반성이라는 글자를 꼭 넣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월20일에는 “나는, 반성이라는 것이 나에게도 많다고 하면 있다. (중략) 군도 정부도 국민도, 하극상이라든지 군부의 전횡을 내버려둔 것이라든지 모두 반성해야 할 나쁜 점이 있으므로 그것들을 모두 반성해서 반복하지 않도록 하고 싶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쇼와 일왕의 이와 같은 의사는 기념식사에 반영되지 못했다. 당시 일본 총리였던 요시다 시게루(吉田茂·1878~1967)가 강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전쟁을 시작한 책임을 일왕이 추궁당하게 될 위험이 있다고 판단했고, 전범 재판이었던 도쿄재판에서 정치적으로 결론이 난 쇼와 일왕의 퇴위론이 다시 부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반성의 의사가 담긴 이 배알기에는 ‘재군비’에 관한 언급도 포함돼 있다. 전후 새로 제정된 일본 헌법 제9조에는 ‘전쟁 포기’와 ‘전력 보유 불가’가 명시돼 있다. 이와 관련해 쇼와 일왕은 1952년 2월11일 “지금에서는 다른 개정은 일절 손을 대지 않고 군비에 관한 점만을 공명정대하고 당당하게 개정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발언했다. 한 달 후인 3월11일에도 “침략자가 없는 세상이 되면 무비(武備)는 필요하지 않지만 침략자가 인간사회에 존재하는 이상 군대는 부득이하게 필요하다는 것은 안타깝게도 일리가 있다”고 말했다. 다지마는 일왕을 상징적 존재로만 인정하는 헌법상 그러한 발언은 ‘금구(禁句·남의 감정을 해칠까봐 말하기를 꺼리는 어구)’라며 간언했다고 한다.

아베 총리가 수정하려고 하는 것도 헌법 9조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쇼와 일왕의 발언이 아베 총리와 같은 맥락의 것은 아니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당시는 냉전시대였고 자위대가 발족하기 전이었다. 후루카와 다카히사 니혼대학 교수는 아사히신문에서 “(쇼와 일왕이 재군비를 말한 때는) 일본 헌법 9조 아래에서는 자위대와 같은 조직이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시기로, 최소한의 방위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나타낸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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