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행 보증수표? 한국 사극·시대극의 숙제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8.31 12:00
  • 호수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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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요구에 맞는 역사, 어떻게 선별할 것인가…《항거》가 눈부시고 《봉오동 전투》가 아쉬운 이유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해다. 연초부터 극장가도 이 흐름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민족의 저항정신을 담은 영화들이 관객과 만났고, 일부는 개봉을 앞두고 있다. 비단 올해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2010년대 들어 조선시대나 일제강점기를 배경 삼은 사극이나 시대극은 한국영화의 중요한 경향 중 하나가 됐다. 잘 만들면 흥행을 보장하고 의미를 더할 수 있다. 반대로 개봉 이후 역사 왜곡 논란 등으로 역풍을 맞기도 한다. 사극·시대극이 매년 극장가에 꾸준히 등장하는 이유는 뭘까. 관객의 폭넓은 지지를 받은 영화들의 조건은 무엇일까. 또한 외면당한 영화들의 패착은 무엇일까.

영화 《봉오동 전투》의 한 장면 ⓒ 쇼박스
영화 《봉오동 전투》의 한 장면 ⓒ 쇼박스

역사적 의미와 스펙터클 사이

《봉오동 전투》가 지난 8월25일 누적 관객 수 450만 명을 돌파했다. 1920년, 독립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거둔 최초의 승리를 기록한 영화다. 배급 시기는 탁월했다. 올여름은 한국에 보복성 수출규제를 가한 일본 아베 정권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조성된 때다. 일본을 대상으로 승리를 다룬 영화의 내용은 시국의 바람과 공명하는 면이 컸다. 광복절 전후로 다양한 단위의 단체관람이 자발적으로 이뤄진 배경으로 풀이된다.

그렇다면 《봉오동 전투》는 성공하기만 한 기획일까. 150억원 이상의 제작비가 투입된 이 영화는 이제 손익분기점을 넘었다. 500만 명에 가까운 관객을 모았지만, 기대한 스코어와는 거리가 멀다는 얘기다. 영화 내적으로 아쉬운 점들도 눈에 띈다. 일단 승리의 서사에는 기대한 만큼의 쾌감이 있다. 나라를 위해 적진으로 뛰어들었던 독립군들의 활약은 뭉클하고 처절하다.

다만 선량하고 의로운 독립군, 살육을 즐기는 전쟁광의 면모가 강조되는 일본군이라는 묘사는 빈약한 이분법이다. 잔인함이 강조될수록 자극적 분노의 온도만 높아질 뿐이다. 하이라이트인 봉오동 전투 신에 이르면, 이 영화는 사실의 고증과 영화적 스펙터클을 향한 욕망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무게감이 남다른 카메오의 등장을 중심으로 한 후반 장면들은 어떤가. 영화가 진정 강조하고자 한 것이 저항과 승리의 역사인지, 배우들의 비장함인지 판단하기 어려워질 지경이다.

역사는 스펙터클의 소재가 될 수 있을까. 그 허용은 어디까지일까. 이는 사극·시대극, 더 정확하게는 실제 역사를 소재로 삼은 작품들 안에서 자주 논쟁거리가 된다. 2년 전 여름 개봉한 《군함도》(2017)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100억원 이상의 제작비가 투입됐던 대작이다. 이 영화는 군함도를 역사적 비극이 서린 공간보다 탈출 서사가 가능한 배경으로 더 크게 인식한 인상을 준다. 그 순간 영화의 목표는 역사적 비극의 공유가 아닌 액션 장르로서의 재미로 기운다. 그 결과 《군함도》는 역사적 비극에 대한 성찰보다 대작 영화의 공식을 기계적으로 결합한 결과물이 됐고, 흥행에 참패했다.

사극·시대극은 시대 흐름을 읽는 것이 중요한 장르다. 시대의 요구와 긴밀하게 조응한 영화들은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문제의 해결을 역사적 사실 혹은 해석에서 찾는 시도들이 한동안 이어졌던 이유다. 정권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했던 시점, 이상적인 지도자를 향한 국민적 열망을 위로한 《광해, 왕이 된 남자》(2012)와 《명량》(2014)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두 영화 모두 천만 이상의 관객을 모았다.

특히 신드롬에 가까웠던 《명량》 열풍은 한국 사극·시대극의 중요한 키워드를 ‘역사적 사실’로 뒤바꿔놓았다. 《사도》(2015), 《암살》(2015), 《밀정》(2016), 《박열》(2017) 등 흥행과 비평 면에서 모두 성공했던 작품들은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살을 붙여나간 작품이 다수다. 이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모던 보이》(2008), 《그림자 살인》(2009), 《방자전》(2010) 등 과거를 배경으로 다양한 장르적 실험을 거친 2000년대 중후반의 경향과는 확연하게 다른 양상이다.

실제로 올해 개봉한 영화들 중에서도 팩션의 성격이 더욱 두드러지는 《기방도령》 《광대들: 풍문조작단》 같은 작품은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과정에서 스님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해석을 더한 《나랏말싸미》는 ‘역사 왜곡’ 논란에 시달려야 했다.

이 같은 결과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오늘날의 관객들은 과거를 단순 배경으로 삼은 팩션보다 역사적 사실과 엄중히 대면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실화를 기초로 한 대작이라고 해서 무조건 사랑받는 건 아니다. 2월말 개봉한 《자전차왕 엄복동》이 대표적이다. 이 영화는 일본이 조선의 민족의식을 짓밟기 위해 열었던 전조선자전차대회에서 일본인들을 꺾고 우승, 조선의 자부심으로 거듭난 엄복동의 실화를 그렸다.

그러나 안이한 서사, 엄복동의 승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는 과도한 해석은 관객의 반감만 높였다. 그 결과 100억원대 제작비를 투입한 영화는 관객 20만 명도 채우지 못한 채 극장가에서 쓸쓸히 퇴장했다.

영화 《항거》의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항거》의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팩션보다 실화의 손 들어주는 관객들

반면 올해 가장 빛나는 시도로는 《항거: 유관순 이야기》(이하 《항거》)를 꼽을 수 있다. 사극·시대극은 평균 제작비가 월등히 높은 장르다.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2016년 한국영화 수익성 분석 자료에 따르면 그해 개봉한 상업영화 78편의 편당 평균 총제작비는 46.7억원. 홍보·마케팅 비용을 제한 순제작비는 33.3억원이다. 이 중 사극·시대극의 제작비는 90억원가량.

그러나 《항거》는 불과 10억원대의 제작비로 1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았다. 꼼꼼한 고증으로 유관순 열사와 ‘8호실’ 여성들의 연대를 그리면서도, 감상주의로 빠지지 않는 단단한 태도를 견지한 덕분이다. 이 영화는 제작 규모가 흥행 조건의 전부가 아님을 증명한다. 여성 주인공이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덕혜옹주》(2016)에 이어 여성 주연 역사극의 가능성을 보여준 성공적 사례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제작비 100억원대의 대작들이 다양하게 나올 수 있는 시장이 형성됐다는 점, 미술 분야 등 제작 기술 환경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점. 역사를 소재로 한 사극·시대극이 한국영화의 중요한 흐름 중 하나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배경이다. 다만 고민은 여전히 유효하다. 시대적 요구에 맞는 역사를 어떻게 선별할 것인가. 역사를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각색의 묘는 어떻게 발휘할 것인가. 장르적 스펙터클에 있어선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 앞으로 등장할 작품들의 당면 과제다.

 

올 가을에 선보일 사극·시대극은?

역사를 소재로 한 사극·시대극이 한국영화의 큰 흐름으로 자리 잡으며 올해 개봉하는 나머지 영화들의 면면도 주목된다. 가장 가깝게는 9월말 개봉하는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이 있다. 인천상륙작전 하루 전, 양동작전으로 진행된 장사상륙작전 실화를 바탕에 둔 작품이다. 영화는 작전에 참여한 772명의 학도병들을 주목한다. 《천문: 하늘에 묻는다》는 《나랏말싸미》에 이은 또 한 편의 세종대왕 이야기. 한순간 역사에서 사라진 장영실의 이야기까지 짚는다. 1970년대 정치공작을 주도했던 중앙정보부 부장들의 행적을 기록한 《남산의 부장들》도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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