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더 비극으로
  • 노혜경 시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9.21 17:00
  • 호수 1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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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동일방직에서 도로공사까지

‘중요한 세계사적 사건과 인물들은 반복된다’고 말한 것은 헤겔이었고, ‘이 말에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은 희극으로 끝난다고 덧붙여야 한다’고 말한 것은 마르크스였다. 워낙 유명한 이 말을 다시 한번 떠올린 것은 지난 9월10일 도로공사 톨게이트를 담당하던 여성 노동자들이 직고용을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한 현장에서였다.

사건 자체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한국도로공사는 톨게이트 요금수납원을 처음엔 직고용했으나, 어느샌가 이들은 불법파견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어 있었다. 이들은 2013년부터 끈질긴 소송 끝에 8월29일 대법원으로부터 직고용하라는 판결을 받아낸다. 그러나 도로공사는 대법원 판결이 나기 전 자회사를 만들어 대부분의 노동자를 보내고, 이를 거부하는 1500명을 해고해 버렸다. 대법원 판결은 이 1500명에 대해 직고용을 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도로공사가 내놓은 방침은, 직고용을 하게 되면 요금수납원이 아닌 다른 업무로 배치하겠다는 것이다. 이 어이없는 방침 앞에서 대부분이 중년 여성인 노동자들은 도로공사 본사를 점거하고 농성에 돌입했다. 이를 해산하려는 경찰에 맞서 이들이 윗옷을 벗어버리자,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40여 년 전의 사건으로 소환되었다. 나도 마찬가지다.

추석인 9월13일 경기도 성남시 서울톨게이트에서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고공농성 중인 톨게이트 요금수납원들이 용순옥 민주노총 서울본부 수석본부장과 전화통화를 하며 손을 흔들고 있다. ⓒ 연합뉴스
추석인 9월13일 경기도 성남시 서울톨게이트에서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고공농성 중인 톨게이트 요금수납원들이 용순옥 민주노총 서울본부 수석본부장과 전화통화를 하며 손을 흔들고 있다. ⓒ 연합뉴스

43년 전엔 ‘노조 와해’가 목적, 지금은 ‘고용 와해’가 목적

기억은 바로 동일방직이라는 이름에 가 닿는다. 탈의시위와 똥물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노조다. 경찰의 강제해산에 맞서기 위해 “옷을 벗자! 옷을 벗은 여자 몸에는 경찰이 손을 못 댄다!”고 외치며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탈의시위 또는 알몸시위 또는 나체시위 등등으로 불리는 저항의 방식을 생각했던 그 노조. 여성인 지도부를 와해시키고 회사와 남성들의 지배 아래 두고자 하는 시도가 그 뒤로도 끈질기게 이어지며 급기야 여성 노조원들에게 남성 노조원들이 똥물을 뿌리고 먹이는 사태까지 발생했던 바로 그 노조. 똥물을 뒤집어쓴 한 장의 사진이 YH노조의 신민당사 점거농성과 함께 유신정권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던 그 동일방직 노조.

그러나 역사가 결코 희극으로만 되풀이되지 않음 또한 역사적 진실이다. 강제해산을 피하고자 옷을 벗은 것은 모든 것을 건 저항의 표현이고, 반복되었다. 사용자와 그에 동조하는 남성 조직원들이 나섰고, 반복되었다. 그런데 43년 전에는 노조 와해가 목적이었는데 43년 후에는 아예 고용 와해가 목적이다. IMF 관리체제를 통과하며 신자유주의적 노동관리의 기법을 익힌 자본의 악습을, 정부 공기업조차 답습한다는 것의 폭로다. 43년 전의 탈의는 끌려 나가지 않고 지도부를 보호하기 위함이 목적이었지만, 43년 후의 탈의는 끌려 나가지 않고 도로공사가 저지르는 무도한 대응을 알려내기 위함이다. 이들에게 귀 기울이는 언론과 시민들을 만나기 위함이다.

그때도 지금도, 역사라 부를 수 있는 고갱이는 같다. 여성 노동자들이 약자의 처지를 단결하여 극복하고자 하며, 시대의 눈은 그것을 옳게 본다. 그때도 지금도, 악한 역할을 하는 자들의 행패는 똑같다. 노동자들을 소모품으로 보고, 존엄을 지키려는 의지를 짓밟고 조롱한다. 대법원에서 직고용하라는 판결이 났음에도 불복하는 것, 불복해도 된다고 믿는 것은, 강자들의 담합이 약자들의 연대를 이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극을 불러오는 희극적 생각이다. 약자들은 생각보다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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