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습사회] 이젠 금배지도 대물림 된다
  • 차윤주 정치전문 프리랜서 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9.24 13:00
  • 호수 1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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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 정치인, 20대 국회 입성 최다 15명…내년 총선 출마자 더 늘 듯

총선을 반년여 앞둔 지금, ‘정치 금수저’들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부모의 자원이 자녀에게로 대물림되는 한국 사회를 빗댄 ‘수저계급론’, 이는 여의도 정치판에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정치 금수저가 엄연히 존재하고, 오히려 앞으로 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2·3세 정치인들을 바라보는 유권자들의 마음은 복잡하다. ‘정치 유전자’를 물려받았을 것이란 긍정적 시선도 없지 않지만, 권력 대물림과 불공정 세습이란 따가운 눈초리가 우세한 게 사실이다. 아직 우리 정치현실이 일본의 만성화된 세습 정치 행태와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계급사회로 빠르게 이행하고 있어 곧 일본 정치현실을 따라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 시사저널 박은숙
ⓒ 시사저널 박은숙

대부분 아버지 지역구 그대로 물려받아

지난 연말 문희상 국회의장의 아들 문석균씨가 더불어민주당 의정부갑 상임부위원장에 임명됐다. 문씨는 아버지 지역구에서 서점을 운영해 온 자영업자다. 지역 정가에선 6선을 한 문 의장이 아들에게 의원직을 물려주는 수순이란 말이 나왔다. 문 의장 아들의 ‘국회의원 승계 작업’은 착착 진행 중이다. 지역구 상임부위원장 직함을 받은 문씨는 국회의장직 수행을 위해 탈당한 아버지를 대신해 지역 행사마다 민주당 인사로 얼굴을 내밀고 있다.

올해 3월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장남 안아무개씨가 민주당 이후삼 의원실 인턴비서로 채용됐다. 안씨는 지난해 8월 안 전 지사의 비서 성폭행 사건 1심 판결 직후 SNS에 피해자를 조롱하는 글과 사진을 올려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 의원은 안씨 채용에 대해 “능력이 있고 본인이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의지가 있다”고 했지만, 안 전 지사의 아들이라는 점도 어느 정도 고려됐을 것이란 게 중론이다. 충북 제천·단양이 지역구인 이 의원은 안 전 지사의 정무비서관을 지낸 측근이다.

지금 20대 국회에서 2·3세 정치인으로 금배지의 꿈을 이룬 의원은 15명이다. 총 국회의원 정원의 5%인데,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두드러지는 수치는 아니다. 하지만 역대 국회보다 많은 수준이라 2016년 20대 총선이 끝난 뒤 언론은 한국도 ‘2세 정치인 전성시대’가 활짝 열렸다고 진단한 바 있다. 당별로는 더불어민주당 4명(이종걸·노웅래·김영호·김정우), 자유한국당 7명(김무성·정우택·정진석·김세연·이종구·장제원·김종석), 바른미래당 3명(유승민·이혜훈·김수민), 우리공화당(홍문종) 1명 등이다. 이 가운데 이혜훈 의원의 경우, 친부모가 아닌 시아버지가 정치인 출신으로 4선을 지낸 고(故) 김태호 전 의원이다.

노웅래 의원의 아버지는 5선 국회의원과 재선 마포구청장을 지낸 ‘마포 터줏대감’ 노승환 전 의원이다. 3선인 노 의원은 아버지의 지역구(서울 마포갑)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김세연(부산 금정), 정진석(충남 공주·부여·청양), 홍문종(경기 의정부을), 장제원(부산 사상) 의원 등도 아버지 지역구에서 의원직을 유지하고 있다. 6선의 ‘정치 거물’ 김상현 전 의원의 아들인 김영호 의원은 아버지(서울 서대문을)가 뿌리내렸던 지역구가 여의치 않자 옆동네(서대문갑)에서 금배지를 달았다. 의원 본인의 노력도 있었겠지만 아버지의 자원이 없었다면 이들이 지금의 자리에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일본에선 정치 명문가 출신이 유력 정치인의 필수 조건이 된 지 오래다. 전후 일본 최장수 총리 기록을 세운 아베 신조와 차기 총리감으로 거론되는 고이즈미 신지로 환경상이 정치 금수저의 선봉에 있다. 최근 개각에서 최연소(38) 각료로 임명된 고이즈미는 아버지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후광을 업고 2009년 28세의 나이로 중의원에 당선돼 내리 4선을 했다. 아버지 개인비서를 하는 등 인생의 경로마다 금수저 혜택을 받았다는 비판이 따라다니지만 일본 내 대중적 인기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일본 정계에선 선거마다 당선인 중 세습 정치인이 20%가 넘고, 이는 당 지도부나 내각 각료 등 고위직으로 올라갈수록 비중이 더 커진다. 보수 성향의 세습 정치인들이 정계 주류가 되면서 대내외 정치가 우경화하는 요인으로 지목되지만, 제도를 통해 세습이 강화되고 있다. ‘후원회’와 투표 방식이 대표적이다. 의원 후원회를 통해 받은 후원금은 비과세로 자식에게 물려주고, 용지에 직접 지지 후보를 적는 주관식 기표 방식도 정치 가문에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한다.

우리나라는 이런 노골적인 제도는 없지만, 2·3세 정치인이 유리한 출발선에서 시작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선거라는 게임에 참여하려면 유력 정당의 공천을 받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재력과 인맥, 조직 등이 뒤따라야 한다. 정치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이들은 부모로부터 자산을 넘겨받아 경쟁자들보다 출발선 앞쪽에 선다. 여권 한 관계자는 “다른 분야와 달리 정치를 하는 데 필요한 자원은 대부분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것들”이라며 “정치자금은 물론이고 선거판을 좌우하는 조직 등 정치 신인이 몇 년간 바닥을 굴러도 얻기 힘든 정치적 자산을 2세 정치인들은 거의 공짜로 얻는다”고 말했다. 그는 “국회의원뿐만 아니라 기초·광역의원까지 합하면 세습 비율은 훨씬 높을 것”이라고 했다.

세습 정치의 폐해는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부녀 대통령’ 시대를 연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국민들 손에 의해 권좌에서 내려왔다. 정치인으로서 스스로 이뤄낸 성취보다 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어 권력 정점까지 올랐기에 그의 몰락은 2·3세 정치인들에게 많은 점을 시사해 준다.

내년 21대 총선엔 15명의 현역 2·3세 정치인을 비롯해 다수 원외 인사들이 출정을 벼르고 있다. 앞서 언급한 문 의장의 아들 문석균씨를 비롯해 김대중 전 대통령의 3남 김홍걸 민주당 국민통합위원장이 호남 지역 또는 비례대표 출마자로 거론된다. 정대철 전 민주당 상임고문의 아들 정호준 전 의원(민주평화당, 서울 중구), 김수한 전 국회의장의 자녀인 김성동 전 의원(바른미래당, 마포을)과 김숙향 한국당 동작갑 당협위원장, 도영심 전 의원의 아들 이재영 한국당 강동을 당협위원장, 서청원 무소속 의원의 아들 서동익씨 등이 채비를 하고 있다. 2·3세 정치인들의 약진은 우리나라에도 본격적인 세습 정치의 시대가 도래할 것임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인식되고 있다. 지금은 가업 정치인들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일본을 신기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여의도에도 서서히 세습 정치의 그림자가 크고 짙게 어른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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