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리더_방송연예] 김보라…한국 영화계의 미래를 보여준 《벌새》의 날갯짓
  • 조유빈 기자 (you@sisajournal.com)
  • 승인 2019.10.24 10:00
  • 호수 1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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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보라(38) 영화감독…“여성의 눈으로, 애정 어린 시선으로 인간의 삶 들여다보고 싶어”

한국 영화계의 미래를 보여준 감독이 있다. 영화 《벌새》로 전 세계 27관왕의 신화를 쓴 김보라(38) 감독이 주인공이다. 《벌새》는 올해 가장 주목받은 한국 영화 중 하나였다. 1994년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성수대교 붕괴 사건을 은희라는 한 소녀의 개인적 서사와 엮어낸 이 작품은 독립영화로서 이례적으로 12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최근 노르웨이 최대 규모 베르겐 국제 영화제에서 공동대상을 받는 등 국내외 주요 영화제에서 27개의 상을 수상했다. 수없는 상찬이 쏟아졌다. ‘서둘러 속편을 내놓을 것을 감독에게 강력하게 요구한다’는 박찬욱 감독의 추천사가 바로 그렇다.

시사저널과 영화계 전문가들은 김 감독을 향후 영화계를 이끌어 갈 차세대 리더로 뽑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동국대학교 영화과를 거쳐 뉴욕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에서 영화를 공부한 김 감독은 2002년 단편영화 《계속되는 이상한 여행》으로 영화계에 입성해 이후 《빨간 구두 아가씨》(2003), 《귀걸이》(2004), 《리코더 시험》(2011) 등의 단편을 선보였다. 이후 《리코더 시험》으로 우드스톡영화제 단편영화 부문 대상, 대구단편영화제 대상을 수상했다. 《벌새》는 김 감독의 첫 장편 연출 데뷔작이다. 현재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김 감독은 시사저널이 보낸 질문 하나하나에 직접 녹음한 음성파일을 보내왔다.

김보라 감독 ⓒ엣나인필름
김보라 감독 ⓒ엣나인필름

 

영화 《벌새》의 날갯짓이 멈추지 않고 있다. 해외 영화제에서 다수의 상을 수상하신 데 이어 거장들의 찬사도 이어지는데, ‘은희’의 일상을 그린 이야기가 많은 관객들에게까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직접 답변하는 게 항상 쑥스럽지만, 관객들에게 “은희가 돼 영화를 봤다”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캐릭터에 몰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 통찰력이 있고, 영화를 바라보는 우아하고 성숙한 시선이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영화제에서 나이를 많이 물어보시더라. 영화가 너무 성숙해서 나이가 많은 감독이 만들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젊어서 놀랐다는 분들이 많았다. 사랑, 관계 추구, 슬픔, 화해, 절망 등 은희가 겪는 감정들은 중학생 은희 뿐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감정이기도 하다. 이런 감정들이 관객들의 공감을 산 것 같다. 은희를 불쌍하게 여긴다거나 타자화하지 않고, 관객들이 은희가 돼 경험하길 바랐는데 외국 관객들도 그렇게 생각해주셔서 좋았다.

벌새와 관련해서 소수의 코멘트지만, ‘제 3세계 불행 서사를 외국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얘기를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이는 외국에서 한국 영화가 어떤 식으로 평가되는지 잘 모르기에 나오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은 더 이상 제 3세계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해외 영화제에 가도 한국 영화는 웰메이드한, 특색있는, 퀄리티 있는 영화로 평가된다. 우리는 굉장히 많이 성장했는데, 우리가 우리의 성장을 인정해주지 못한 것 같다.

가부장제 폭력, 국가적 재난은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영화가 보편적인 언어라는 것을 벌새가 상영되면서 느꼈다. 미국은 911사태를 겪었기 때문에, 일본은 쓰나미 등의 재난을 겪었기 때문에, 이탈리아는 다리 붕괴라는 사고를 겪었기 때문에, 해외 관객들은 ‘성수대교 붕괴’라는 한국의 구체적인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벌새》의 감독 김보라와 주인공 은희가 탄생하기까지의 스토리가 있다면.

“벌새가 개봉하기까지 6년 정도 시간이 걸렸다. 강의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면서 작품을 준비했다. 상업영화 투자사에 시나리오를 들고 혼자 9군데 정도를 찾아다녔는데 다 떨어졌다. 다행히 VOD 판권을 판 돈과 영진위와 서울영상위, 성남문화재단의 지원금을 다 합쳐서 촬영을 할 수 있었고, 촬영 끝나고 부산국제영화제나 선댄스영화제에서 후반제작지원을 받았다. 그렇게 어렵사리 완성한 영화다. 제작하면서도 벌새 주인공을 고등학생으로 바꿔야 20대의 유명 주인공을 섭외해 투자를 받을 수 있지 않겠냐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저는 은희가 중학생이어야만 했다. 누구도 진지한 주체로 바라봐주지 않는, 두발 규정과 가부장제 억압을 겪은 중학생 여성의 대서사시를 그리고, 그 삶이 절대로 정치적, 사회적인 공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그 연결고리를 특히 또 말해보고 싶었다. 한국 영화들의 여중생, 여고생은 언제나 까르르 웃거나 귀엽고 상냥했다. 우리가 여중생 때 행복하기만 했나? 스쿨 미투가 보여준 잔인한 환경, 체벌과 두발규정이라는 억압을 경험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무표정하게 자신의 본질을 찾고자 하는 소녀를 꼭 그리고 싶었고, 그 소녀가 은희였다.”

 

《벌새》에는 감독님의 유년 시절의 감정의 조각, 기록의 조각들이 들어있다고 하셨다. 감독님에게 ‘과거의 경험이란 무엇인지’가 궁금하다. 영화 내에서 전작 《리코더시험》의 초등학생 은희와 중학생 은희를 연결 짓게 된 배경이 무엇인지도 알고 싶다.

“과거를 돌아보면, 내가 나로서 존재하지 못했을 때 가장 마음이 아팠다. 관계에서든, 사회와 관계를 맺을 때든 본질이 아닌 사랑을 경험하거나 대접을 받는 것, 본질이 아닌 행동을 누군가에게 한 것은 상처로 남는다. 《리코더시험》이 끝나고 관객들이 은희에 대해 많이 물으셨고, 그 물음이 너무 좋았다. 나의 감정들을 공유했을 때 화답되는, 응답해주시는 경험들이 기쁨이 됐고 관객과 소통하는 행복을 느끼게 해준 경험이었으며, 벌새를 완성할 수 있는 힘이 됐다. 인도 샤티야지트 레이 감독의 ‘아푸 3부작’처럼, 은희를 성장시켜보고 싶다는 생각이 확고히 들었다.”

 

은희는 학교와 가족이라는 제도권 커뮤니티가 아닌, 영지라는 새로운 인물에게 위로받는다. 그 설정의 이유는.

“혈연 가족이나 제도권의 관계들이 많이 실패하는 부분들이 있다. 저는 그것이 비현실적으로 이상적으로 그려지는 것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다. 제도권이 아닌 곳에서 위로를 받는 것을 묘사한 것은 제가 삶에서 바라보는 관계들이 반영된 것이다. 가족도 그렇다. 혈연이어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안전함과 따뜻함, 사랑을 나누는 관계가 돼야만 가족은 의미가 있다. 어릴 때 순천에서 자랐는데, 할아버지의 애인이셨던 할머니가 저를 키워주셨다. 저한테 그 시간은 행복한 기간이었고, 무한한 사랑을 받았던 것이 삶의 성장에 큰 영향을 줬다. 그 경험 속에서 저는 저에게 인간다운 대접을 해주는 순천 할머니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서로 간에 예의를 지키고, 사랑하고, 노력하고, 배려하는 것이다. 어릴 때의 경험은 한 인간의 성장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다. 새서울의원 원장님 역할을 하는 김종구 배우님은 초등학교 때 나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대접해준 경비아저씨인 고석순 아저씨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혈연관계가 아닌 관계, 지나가는 타인의 친절과 온기가 한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벌새에서는 드러내고 싶었다.”

김보라 감독 ⓒ엣나인필름
김보라 감독 ⓒ엣나인필름

 

《벌새》의 배경은 1994년이다. 시대적 배경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한국 사회의 의미 있는 시간으로 영화를 설정한 이유는,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고, 개인의 서사가 정치적․사회적 공기와 절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다. 여성이기 때문에, 소수자이기 때문에 사회 작동 기제들에 더 영향을 많이 받게 되고, 더 관심을 갖게 된다. 개인적인 것이 어떻게 사회와 촘촘히 연결되는지, 그 공기를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1994년의 분절된 성수대교 다리가 은희의 관계 속에서의 단절, 가족 안에서의 단절, 학교 안에서의 단절 등 사회 전체적인 공기와 어떻게 연관돼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 벌새에서는 중요했다. 사건이 어린 중학생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성수대교 사건의 사진을 보며 신체적 통증이 느껴졌는데, 이게 사회적인, 공통적인 트라우마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 개인의 삶이 커다란 사건과 어떻게 밀접하게 연결됐는지를 고민하며 만들었다. 앞으로도 역사를 개인의 삶 안에 드러내는 것이 저한테는 중요할 것 같다. 벌새는 90년대 한국 사회의 균열, 성장통을 묘사한 은희의 성장 영화이자 한국사회의 성장통을 다룬 영화다.”

 

1990년대, 그 당시 존재했던 과거의 폭력적인 공기를 비교적 담담하게, 객관적으로 그려내신 이유는.

“일련의 영화들에서 주인공을 극한으로 몰아 넣고 폭력을 말하는 방식은 저와는 맞지 않았다. 왜냐하면 실제 삶에서의 폭력은 공기처럼 묻어 있는 일상에서 벌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극단적인 영화를 좋아하지 않기도 하고, 담담하게 묘사하며 등장인물이 울지 않을 때 관객은 더 아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지의 대사처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그것 자체로 치유 되는 것이 있다. 삶을, 사랑과 고통 그 다양한 무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통과하고 싶었다.”

 

‘여성 영화인’으로서 사회의 균열을 기록하고 싶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은희에게 영지 선생님이 있었던 것처럼, 감독님께 이상적인 영향을 가장 크게 미친 인물이나 롤 모델로 생각하는 인물이 있나.

“존경하는 분들은 많지만, 롤모델이라고까지는 하지 않는다. 그분들은 오히려 그것을 좋아하지 않으실 것 같다. 롤모델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지만 너무나 존경하는, 아름다운 분들은 많다. 제게 명상을 10년 넘게 가르쳐주신 선생님이 계신다. 몸이 아프거나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선생님을 만나는 순간 긴장이 풀리며 근육이 이완되는 것들을 느낀다. 내가 안전하고 보호 받는 느낌, 따뜻한 봄을 가지고 오시는 느낌이다. 그렇게 나이가 들고 싶다. 낯선 공간에 가더라도 따뜻한 에너지와 맑은 기운을 불러오는 사람이 되고 싶다.

김보라 감독 ⓒ엣나인필름
김보라 감독 ⓒ엣나인필름

 

특히 가장 감명 깊었던 텍스트나 영화, 좋아하는 감독이 있다면.

좋아하는 감독, 작가들은 너무 많다. 이름을 말한다면 메리 올리버, 앨리슨 벡델, 오정희, 쓰시마 유코의 작품을 아주 좋아한다. 최근에 좋아했던 영화는 여성 영화 감독 작품 중 《다가오는 것들》과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이고, 가장 좋아했던 영화 중 하나는 《벌새》의 좋은 레퍼런스가 된 에드워드 양 감독의 《하나 그리고 둘》이라는 대만 영화다. 타이페이의 한 가족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보면서 대만 사회를 묘사했다.

미술 작가로는 아니쉬 카푸어 작품에 영감을 많이 받았다. 이분들의 공통점은 요란하지 않은 방식으로, 아주 깊고 거대한 이야기들을 섬세하고 철학적으로 한다는 점이다. 인간을 통찰력 있게 바라보는 시선, 단순하게 인간사를 착하고 나쁘게 바라보는 게 아니라 아주 미세하고 복잡다단한 결들을 묘사하는 작품들이라서 좋았다. 저 역시도 통찰력 있게 인간의 감정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벌새》로 인해 독립영화에 대한 응원도 이어지고 있다. 대규모의 상업영화가 대부분의 영화 시장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특히 독립영화에서 활동해온 배우들로 그려진 《벌새》의 성과는 눈부시다. 독립영화의 대중화, 좋은 독립영화의 발굴을 위해 어떤 점들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보나.

“지금의 영화계는 투자사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한다. 천만 영화를 만드는 것에만 급급하지 않고 영화다운 영화를 만드는 투자가 많았으면 좋겠다. 상업 영화들은 공장에서 찍어낸 것 같은, 만든 사람들의 고유성이 드러나지 않은 영화들이 많다. 그런 영화들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지 않은 영화들이 다양하게 있어야 건강한 것 같다. 오락으로서의 영화도 존재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영화라는 것은 결국은 인간을 들여다보는 예술 장르라고 생각한다. 지금 극장에서 볼 영화들이 많이 없다는 것은 많이 아쉽다.

벌새를 보신 여성 관객들께서 은희가 새서울의원에 갈 때마다 원장에게 나쁜 짓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했다는 것을 보고 놀랐다. 한국 영화가 여성을 어떻게 묘사하고, 어떤 상황으로 몰아갔는지에 대한 깨달음이 오면서 화가 나기도 하고, 앞으로 여성을 묘사할 때 어떻게 하고 싶은지에 대한 책임감이 많이 생겼다. 투자사, 제작사, 배급사 등 모두가 힘을 합쳐 영화에서 인간을 묘사하는 방식에 대하여, 어떤 창작품을 만들어낼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스템이 바로 바뀌기는 어렵겠지만, 이러한 거대한 구조에도 불구하고 독립영화가 살아남기 위해서 관객들께서 영화를 찾아주시면 좋겠다. 상영 극장이 많이 없고 있더라도 멀지만, 찾아가서 봐주시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영화계에서 감독님을 바라보는 시선은 기대에 차 있다. 포스트 박찬욱, 포스트 이창동으로 불릴 정도로 한국 영화의 미래를 책임질 주역으로 꼽힌다. 앞으로 어떤 작품을 그려내실 계획인지.

“전쟁과 역사, 대사서시를 비롯해 SF 장르를 여성의 눈으로 그려보고 싶다. 굉장히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예컨대 전쟁이라고 하면 스펙타클한 전투씬을 보여주는데, 저는 전쟁 후의 폐허가 된 일상에서 전쟁이 시작된다고 본다. 큰 역사, 사건을 그릴 때 미시적인 관점, 개인의 일상과 경험에서 접근할 것 같다. 지금까지 보여줬던 방식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한 사람의 목소리로, 경험으로 큰 거대한 사건을 드러낼 수 있는지를 고민할 것이다.

《카펫 아래의 검은 개들》이라는 작품은 계속 구상을 하고 있다. 많은 리서치가 필요할 것 같다. 인간의 감정적 큰 지형들을, 《벌새》보다 훨씬 본격적으로 탐구하는 영화가 될 것 같다. 저 역시도 작품을 시작할 때 무엇이 될지 모르고 시작한다. 《벌새》도 무엇이 될지 모르고 시작했지만 지금 제게 많은 것을 알게 해주듯, 이 작품도 시작보다 끝이 저에게 많은 것을 알게 해주는 작품이 되길 바란다. 앞으로도 계속 여성의 눈으로, 바라봐지지 않았던 시각으로, 인간의 삶을 잘 들여다보고 싶다. 애정 어린 시선과 ‘사랑’의 눈으로 삶을 바라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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