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목소리 속의 목소리, 귓속의 귀, 그리고 ‘공정’
  • 김경원 세종대 경영대학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11.06 18:00
  • 호수 1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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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학 시절 상당수 사람이 읽어보았을 칼릴 지브란의 시집 《예언자》의 한 구절이다. ‘대화에 대해’ 편에 “네 친구를 길 가나 장터에서 만날 때면 네 안의 영혼이 네 입술을 움직이고 혀를 지휘하게 하라. 네 목소리 속의 목소리가 그의 귓속의 귀에게 말하게 하라. 포도주의 색깔은 잊히고 그 그릇은 사라져도 그 맛은 기억되는 것처럼 그의 영혼은 네 진심을 간직할 것이기 때문이다.” 말에 진심을 가득 담아 이야기해야 상대방도 경청하고 마음속 깊숙이 받아들인다는 뜻이리라.

#2: 10여 년 전 일이다. 어느 큰 회사의 최고경영자는 지시사항이 많은 데다 아랫사람들에 대한 ‘잔소리’가 심한 편이었다. 그런데 동종업계의 다른 회사에서 큰불이 났었는데 이에 그는 임직원들에게 ‘불조심’을 지시했다. 그로부터 그는 두 달여 후에 얼마나 화재 예방대책이 잘 시행되고 있는지를 챙겼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현장에서는 별 대책 없이 단지 말단사원까지 모두 ‘불조심’만 외치고 다니는 것을 보고 아연했다고 한다. 이는 임직원들 사이에 ‘불조심’이라는 단어가 그 본뜻을 잃고 공허한 구호로만 받아들여진 탓일 것이다. 그 최고경영자의 수많은 지시와 잔소리에 무뎌진 임직원들에게 그의 말은 ‘목소리 속의 목소리’가 아니어서 ‘귓속의 귀’에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3: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은 1945년 소설 《동물농장》을 출간했다. 소설은 동물농장의 동물들이 ‘혁명’을 일으켜 농장주를 쫓아내고 농장 내 모든 동물들이 ‘평등한’ 이상사회를 건설하려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혁명’에 성공한 후에 동물들은 “모든 동물은 침대에서 잠자서는 안 된다” 등과 함께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등의 내용이 담긴 ‘7계명’을 제정한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혁명’을 주동한 ‘나폴레옹’이 경쟁자를 축출하고 독재자로 변신한다. 독재를 합리화하기 위해 그는 ‘7계명’을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하지만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욱 평등하다”는 단 하나의 계명으로 바꾸어 놓는다. 사실상 ‘평등’이라는 단어를 그 반대의 뜻으로 쓴 것이다.

청와대 참모 출신의 모 인사가 야당의 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임명됐다가 그와 그 가족에 대한 의혹이 갈수록 증폭되고 여론이 크게 나빠지며 결국 사퇴했다. 관련 수사가 진행 중이어서 사실 여부는 좀 더 두고 봐야 되겠으나, 젊은 층을 중심으로 여론이 급격히 안 좋아진 것은 이 계층이 그의 자녀 입시 등과 관련해 ‘공정함’이 지켜지지 않았다고 여긴 탓일 것이다. 그의 사퇴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통령은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했다. 법무장관 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어서인지 연설 이후 야당뿐 아니라 상당수 언론에서는 ‘현실과 동떨어진 4차원 연설’이라는 등 비판적인 기사가 많이 나왔다.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2020년도 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취재단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2020년도 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취재단

그런데 시정연설에서 대통령은 ‘경제(29회)’ 다음으로 ‘공정’을 27회나 언급했다. 대통령은 대선 기간이나 취임 이후에도 유난히 이 단어를 많이 써온 데다 법무장관 임명과 사퇴를 둘러싼 논란 이후 행해진 연설인지라, 필자 주위에는 ‘공정’이란 단어의 의미가 공허해지거나 심지어 그 반대의 의미로 들린다는 사람들이 제법 보인다. 이 정부도 임기의 절반을 넘어섰다. 부디 지금부터는 그간 줄기차게 주장해 왔던 평등·공정·정의의 단어를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반대하는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귓속의 귀’에다 들려주기 바란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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