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은 타이밍이다
  • 이형석 한국사회적경영연구원장·경영학박사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11.14 14:00
  • 호수 1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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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석의 미러링과 모델링] 국민 의식 수준의 격차와 국민소득이 성패 갈라

2002년으로 기억된다. 디자인을 공부하고 있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미국 캘리포니아를 갔다. 마침 큰딸이 뉴욕에서 연수 중이어서 겸사겸사 떠난 여행이었다. 이 친구가 한 장소로 안내했다. 샌프란시스코 골든게이트(golden gate)를 지나 20여 분을 가자 작은 건물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그 회사가 바로 ‘캘리포니아 스페이스 오거나이저(California Space Organizers)’다.

국내에서 주목받고 있는 LG의 ‘스타일러’는 사실 미국에선 이미 15년 전에 나왔다. 시간이 흘러 최근 중국에서도 큰 인기다. 결국 성패는 타이밍에서 갈린다. ⓒ 연합뉴스
국내에서 주목받고 있는 LG의 ‘스타일러’는 사실 미국에선 이미 15년 전에 나왔다. 시간이 흘러 최근 중국에서도 큰 인기다. 결국 성패는 타이밍에서 갈린다. ⓒ 연합뉴스

스타일러, 15년 전 미국에서 이미 출시

이 회사의 기본 사업모델은 맞춤형 벽장(closet)과 수납장(Organizer)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신제품 하나를 출시하려고 준비 중이었다. 그 제품은 다름 아닌 ‘정장 다림 냉장고(?)’였다. 그 회사 디자이너는 “앞으로 직장인들에게 인기 있는 트렌드 제품이 될 것”이라며 그 배경을 설명했다.

그로부터 15년 후, 그 제품을 국내 대기업에서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LG ‘스타일러’나 삼성 ‘에어 드레서’와 같은 것이다. 그 친구는 내가 늘 신제품에 관심이 있다는 걸 알고, 혹시라도 관심 있으면 한국에 수입해 팔면 어떻겠느냐고 정보를 주기 위한 동행이었다.

그즈음 흥미로운 사업모델을 컨설팅하고 있었다. 바로 ‘스테프 핫도그’ 브랜드를 가진 ‘유니스테프’라는 덴마크 기업이다. 사실 이 모델은 자신이 없었다. 핫도그 가격이 7500~9500원으로 꽤 비쌌기 때문이다. 당시 핫도그는 길거리 음식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1000원이면 두 개를 살 수 있었다. “과연 소비자들에게 먹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외국인들이 많은 지역을 선택하기로 하고, 이태원에 1호점을 냈다. 오픈하는 날, 아주 특별한 이벤트를 하기로 했다. 한국 주재 덴마크 대사가 일일 주방장을 맡기로 한 것이다. 그게 가능하다는 기업 대표의 얘기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아니, 민간 프랜차이즈 기업의 가게 오픈 날 정부를 대표하는 대사가 주방장을 한다고?” 당시 국내 관료들의 권위적인 분위기와 너무나 대비되는 순간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마침 월드컵이 열리고 있었는데, 덴마크 선수들이 대구에서 경기를 마치고 단체로 이곳에 응원을 오기로 한 것이다. 우리 기업들은 해외에 가서 코트라(KOTRA) 직원의 지원을 받기는 정말 쉽지 않은데, 대사부터 월드컵 선수들까지 응원하러 온다니, 참 부러웠던 기억이다. 지금은 온전히 자리 잡은 브랜드지만 아쉽게도 당시에는 큰 빛을 보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브랜드 하나를 컨설팅했다. 남극에서만 잡히는 새우, 즉 ‘크릴요리 전문점’이다. 론칭하려는 기업은 남극에 상선을 3척이나 가진 중견기업이었다. 크릴(Krill)은 노르웨이어로 ‘치어’다. 이 기업의 대표는 “흰긴수염고래와 황제펭귄의 주식이기도 하지만 단백질이 풍부해 미래의 식량이 될 것”이라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우선 메뉴를 개발하고 상권을 분석한 다음, 강남에 안테나숍(동향 파악을 목적으로 직영하는 소매점, 일명 파일럿 숍)을 열었다. 이색적인 메뉴 때문인지 처음에는 반응이 좋았다. 그러나 이 회사가 기대한 수준까지는 미치지 못해 결국 문을 닫았다. 영양은 좋을지 몰라도 양식 메뉴와 큰 차이가 없고, 생각보다 맛이 덤덤하다는 평이었다. 15년이 지나가지만 아직도 크릴요리 전문점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보다 전인 1997년, 일본의 이케부쿠로에서 의미 있는 점포 하나를 발견했다. 바로 무인상점이었다. 길게 벽면에 만들어진 쇼윈도에 가공식품과 규격화된 채소류가 담겨 있고, 각각 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사고자 하는 제품번호를 누르면 합산된 금액이 청구되고, 결제를 마치면 수평으로 움직이는 로봇이 이를 가져다 배출구로 나오게 설계됐다.

당시 만난 개발자는 일본은 인건비가 상승해 종업원을 구하기 어렵고, 손님들이 직원과 마주하는 것을 기피하는 소위, 언콘택트(Un-contact) 경향이 늘어나고 있어 이런 아이디어가 나왔다고 설명했다. 그로부터 15년 후쯤 우연히 국내 지하철역에서 유사한 모델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스케일과 완성도는 많이 떨어졌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나는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겼다. 아이템(비즈니스 모델)이 어디서 어떤 경로로 흐르는지에 대해서다. 당시만 해도 국내엔 전통 업종을 제외하고는 도입 브랜드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한두 업종을 역추적해 보기로 했다. 먼저 당시 국내에서 주부 창업 아이템으로 선보인 비즈(beads) 소품을 따라가 봤다. 비즈는 수예품, 실내 장식 등에 쓰는 구멍 뚫린 작은 구슬을 말한다.

먼저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에서 처음 시작한 사람을 찾았다. 그는 여행가였다. 유럽을 여행하다가 비즈를 발견했고, 예쁜 비즈만 골라 사와서 1990년에 전문점을 열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잘 안됐는데 ‘잃어버린 20년’을 겪으면서 25세 이하 여성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고 배경을 설명해 줬다. 나만의 액세서리를 만들면서도 값은 30% 정도 저렴하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새 업종 국내 도입까지 15~20년 걸려

이번에는 비교적 단순한 놀이기구 하나를 추적했다. 역번지점프다. 번지점프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당시만 해도 국내에 역번지점프 기구는 없었다. 수소문 끝에 나고야에 있다는 걸 확인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땅이 닿는 위치에서 마치 그네처럼 탄력 있는 고무판 의자에 앉으면 높이 솟구쳐 몇 차례 빙글빙글 도는 구조였다. 둘의 차이점은 번지점프의 경우, 계곡 같은 입지가 필요하지만 역번지점프는 작은 공터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로부터 수년 후, 인천 송도에 역번지점프가 생겼다.

나는 몇 가지 업종을 추적해 본 결과,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됐다. 그 하나는 어떤 업종이 국내에 도입되기까지는 대략 15~20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는 점이다. 아이디어는 유럽에서 출발한 경우가 많았고, 미국에서 일본까지는 8년 전후, 다시 국내에 도입되기까지는 역시 7년 전후였다.

다른 하나는 타이밍(Timing)이다. 외국에서 잘된다고 해서 국내에도 잘된다는 보장이 없다. 물론 정부의 정책, 창업가의 역량 등 여러 변수가 작용한다. 원천적으로 이러한 배경에는 문화의 차이도 있지만 국민 의식 수준의 격차(gap)와 1인당 국민소득이 핵심요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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