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갈등 해법, ‘라포 전략’에서 찾아라
  • 권신일 에델만코리아 부사장 겸 갈등연구소 대표 (jongseop1@naver.com)
  • 승인 2019.11.20 10:00
  • 호수 1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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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부각하고 상대 배려에서 시작해야, 작은 성과 만들기도 중요

곧 오픈을 앞둔 한 유통회사 매장과 피해가 예상되는 인근 시장 상인회가 협상할 때였다. 상인회가 가장 흥분했던 점은 건설 공사 전에 “언제 우리와 상의 한 번 해 봤냐”였다. 법과 행정절차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상인회 측의 ‘사전에 일절 상의도 없었다’는 주장엔 건축허가를 내주었던 구청도 어느 정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상인회는 인간적으로 서운하다며 물리력 행사까지 선언하며 강력 투쟁을 예고했다. 다소 생소한 단어지만 협상에서 ‘라포(lapport)’는 인간관계 또는 신뢰 형성을 의미하는 주요 원칙 중 하나다. 기업과 국가 간 협상에서도 라포 전략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노사협상을 앞두고 강성노조를 사전에 개인적으로 방문해 의견을 청취한 뒤 보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회의를 이끈 임원의 경우가 하나다. FTA 협상에서도 치열한 숫자 싸움과 농민들의 격렬한 반대시위 속에 잔뜩 긴장하며 입장한 한국 대표단의 막내 사무관에게 득녀를 축하한다며 선물 전달식을 자연스럽게 진행해 좋은 분위기를 이끌어낸 미국 FTA 협상팀의 사례는 유명하다. 협상에 나서는 대표단도 결국 사람이기 때문에 감정과 관계를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11월13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수요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일본을 규탄하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있다. ⓒ 시사저널 고성준
11월13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수요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일본을 규탄하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있다. ⓒ 시사저널 고성준

일본인들에게 공감 스토리 제대로 전달할 필요

갈등 이슈들이 반복되고 해마다 더 심각해지는 일본과의 협상에서 라포는 다른 어떤 경우보다 필요한 전략이다. 최근 한국인 징용공 협상에서는 과거에 한일협약으로 국제법상 책임을 다했다는 일본 정부와 기업의 개별 책임은 별도라는 우리 대법원과 정부의 입장이 되풀이되고 있다. 그런 만큼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라포 전략이 보다 유용한 해법이 될 것이다.

먼저 관계 조성의 핵심인 ‘사람’을 부각해야 한다. 지금은 양측이 법과 원칙 그리고 물러설 수 없다는 입장만 보일 뿐이다. 한국인 징용공의 안타까운 사연 그리고 위안부 소녀들의 슬픈 삶이, 일본 정부의 냉정한 평가가 아니라, 보통 사람의 시각으로 전달된다면 일본 국민들의 인식이 달라질 것이다. 우리 정부도 그런 노력을 간과했다. 일본에서 오래 거주한 한국인들이 아쉬워하는 부분 중 하나가 놀라울 정도로 일본의 일반인들은 이 같은 왜곡 사실을 전혀 모른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는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역사 지우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일본 정부의 선의에 기대기보다 이제라도 우리가 일본인들에게 직접 인간으로서 공감할 수 있는 스토리를 제대로 전달해야 한다. 이 문제를 일본인들에게 제대로 알리기 위해 한국으로 귀화한 이후에도 일부러 일본 이름을 유지하고 있는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도 우연한 계기에 잘못된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일본 정부의 위안부 은폐 증거를 스스로 찾기 시작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보다 많은 일반 일본인들이 깨닫게 될수록 다시 제국주의 망령을 꿈꾸고 있는 일부 집권세력의 입지가 줄어들 것이다.

둘째, 작더라도 사소한 성과 만들기와 상대에 대한 배려에서부터 시작하기다. 앞서 미국 FTA 단장이 한국 FTA 협상단 사무관에게 작은 출산 선물로 협상 분위기를 이끈 것처럼 협상 상대방을 인간적으로는 존중한다는 모습이 필요하다. 과거 대통령부터 지금까지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친다’ ‘일본은 정직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우리 편에게만 시원한 발언이다. 라포 협상의 기본은 ‘상호 신뢰와 파이를 키우는 것이다’. 과거사 문제를 해결할 경우 국제사회에서 함께 커질 일본의 이익을 거론하는 접근 외에도 일본 협상대표단 개개인에 대한 세밀한 조사를 통해 한 명 한 명을 인간적으로 감동시켜 우리 입장으로 좀 더 가까이 끌어오는 관계 형성도 필요하다. 일본을 국제적인 비난의 장에 던져놓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고, 불매운동이 한창인 요즘 시기에 우리 국민 정서에는 맞지 않는 제안일 수 있다. 그러나 협상의 최고책임자인 대통령부터 실무책임자까지 협상 목표에 보다 집중해 상대를 다뤄야 한다. 즉 위안부 할머니들과 징용공 할아버지들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 그분들이 서운해하지 않고, 한을 품고 돌아가시지 않도록 하는 메시지를 일본으로부터 이끌어내야 한다. 일본 입장에서는 양보가 될 수 있는 메시지를 얻어내되, 일본의 도쿄올림픽 개최 등 그들의 국가 현안을 위해서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 우리가 앞장서 도울 수 있다는 메시지도 서로 파이를 키우는 방안 중 하나다.

 

보통 사람 간 관계망 키워 일 협상단 압박하는 방법도

셋째, 기업에서부터 양국 관광객에 이르기까지 보통 사람 간의 관계망으로 영향력 키우기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아베 일본 총리의 부인은 한류에 우호적이고, 최근 한·일 갈등과 상관없이 10대 일본 청소년들이 BTS 공연에 만원을 이룬 소식은 그런 점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수단들 중 하나다. 만국 공통어 중 하나는 내 엄마, 아빠, 딸과 아들의 이야기다. 위안부 소녀와 징용공 아버지에 대해 내 가족의 이야기처럼 다양한 일본인들이 진실을 말하게 된다면 일본 협상단도 무겁게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정리해 보면 협상 준비의 첫 단계에는 상대 주장과 협상단에 대한 분석이 포함되어 있다. 이때부터 라포 전략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최근 우리 협상 당국자들마저 미운 아베만 보이고 한국을 이해할 수 있는 일본인은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닌지, 우리 기준으로만 분노를 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야 한다. 일본 내에도 양심과 지식의 목소리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본인은 지난 30년여 년 불황을 겪으며 독할 대로 독해져 있다. 아베 정부의 기이한 인기와 리더십은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그 회복 기회를 만만한 한국에서 잡으려 한다는 분석도 있다. 따라서 한국은 이미 만만하게 이용당할 국력이 아니라는 점을 단호하게 알리되 정부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갖는 기업과 일반 국민의 역량과 목소리를 협상 수단으로 활용한다면 일본 정부에 큰 압력이 될 것이다. 정부와 달리 실리적인 측면에서 보다 긴밀한 관계를 조성하고 있는 기업과 연간 1000만 명 이상이 오가고 있는 관광객 및 산업 종사자들의 목소리도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이미 우리 국민은 일본 정부와 일본인은 다르다는 성숙한 기준을 제시하기도 한다. 우리는 핵으로 우리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는 북한과 2030년 미국을 능가하겠다는 중국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일본을 우리보다 맹방으로 여기는 미국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만큼 국력이 냉정하게 반영되는 전통적인 외교 갈등 해결 방식보다는 ‘사람’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한 라포 전략은 한·일 외교 협상에 더욱 긴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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