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문화계 “미투가 뭐야?”
  • 최정민 프랑스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11.28 16:00
  • 호수 1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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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년자 성폭행 의혹’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미투 비웃듯 연일 흥행

#미투(#MeToo). 여성에 대한 모든 폭력에 대한 고발의 고유명사가 된 ‘미투 운동’이 뉴욕 할렘가의 노동자 타라나 버크로부터 시작된 지 어느덧 2년이 돼 가고 있다. 성폭력 피해를 껴안고 살던 전 세계 여성들을 하나둘 바깥으로 끌어낸 이 운동은 2017년 10월14일, 아역배우 출신 미국 영화배우 알리사 밀라노의 제안으로 시작돼 SNS에 한 해 1720만 개에 이르는 해시태그를 낳으며 말 그대로 폭발적 열풍을 일으켰다. 당시는 마침 할리우드 영화계 거물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추문이 미국 전역을 뒤흔들던 시점이었다.

‘미투 2주년’을 갓 넘긴 지난 11월4일, 프랑스의 영화배우 아델 에넬은 자신의 데뷔작 감독인 크리스토프 뤼지아로부터 13세 당시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여전히 미투가 마침표 없는 현재진행형임을 다시 한번 입증한 것이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2017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로만 폴란스키 감독 회고전 개최를 반대하는 시위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 AP 연합
2017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로만 폴란스키 감독 회고전 개최를 반대하는 시위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 AP 연합

미투 2주년, 프랑스에선 여전히 현재진행형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신작 《나는 고발한다》(영어 제목은 《장교와 스파이》)가 11월13일 프랑스 전역 545개 상영관에서 일제히 개봉됐다. 이 영화는 올해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 ‘은곰상’ 수상작이다. 그러나 정작 영화보다 주목을 끈 것은 감독인 로만 폴란스키에 대한 새로운 성폭행 의혹이었다. 프랑스 영화배우 출신 사진작가인 발랑틴 모니에는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개봉을 앞둔 지난 11월8일 프랑스 일간 르 파리지앵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18세였던 1975년 스위스의 폴란스키 자택에서 구타와 성폭행을 당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이 시점에 이러한 사실을 밝히는 이유에 대해 “폴란스키 감독이 이번 영화를 통해 자신이 피해자임을 암시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참을 수 없었다”고 부연했다.

이 영화는 ‘반(反)유대주의’의 대표적 사례인 ‘드레퓌스 사건’을 다룬 영화다. 이 사건은 1894년 독일에 군사기밀을 빼돌렸다는 누명을 썼던 유대계 군인 드레퓌스가 1898년 에밀졸라의 기고문 ‘나는 고발한다’를 통해 재심과 사면 그리고 복권으로 이어졌던 역사적 실화다. 폴란스키 감독은 유대계 폴란드인이다. 로만 폴란스키는 생존한 영화감독 중 거장의 반열에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감독이지만, 작품에 대한 얘기보다 더 자주 그를 따라다닌 건 1977년 미국에서 그가 행한 미성년자 성폭행 사건이었다. 당시 미국 법원에서 혐의를 인정했으나, 사전 형량 조정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즉각 미국을 떠나 사실상 지금까지 그는 도피 상태다.

새로운 성폭행 의혹이 전해지자 영화 홍보 스케줄이 난항에 빠지기 시작했다. 지난 11월12일, 파리 시내 르 샹포 극장에서 예정된 사전 상영회는 30여 명의 여성단체 회원들의 시위로 취소됐다. 같은 날 저녁 남자 주인공 장 뒤자르댕의 뉴스 출연 역시 취소됐다. 다른 주연급 배우들의 홍보성 방송 출연 역시 줄줄이 취소됐고, 녹화된 인터뷰 또한 방영되지 못했다. 프랑스 시사주간지 ‘르 푸앙’은 “《나는 고발한다》가 홍보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했다”고 보도했다. 아울러 “프랑스 영화계가 총체적인 난국에 봉착했다”고도 진단했다.

폴란스키뿐만 아니라 현재 프랑스 문화계는 거물급 인사들의 끊이지 않는 추문으로 미투 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성범죄 혐의를 가진 문화인들에게 오히려 문화계와 언론이 끊임없이 소명의 기회를 주고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국민가수로 추앙받으며 영화배우로도 활발히 활동 중인 패트릭 브루엘도 마찬가지다. 복수의 여성들을 성추행한 의혹을 받고 있는 그는 현재 2건의 수사를 받고 있으며, 밝혀진 성추행 피해 여성만 이미 5명이다. 그런데 그에 대한 고소장이 접수되어 수사를 개시한 지 한 달여 지난 11월1일 뜬금없는 그의 다큐멘터리가 프랑스 공영3에서 전파를 탔다. 성추행 혐의로 조사 중인 가수에 대한 연대기적 다큐멘터리 내용엔 그의 자전적 스토리가 이어졌으며, 반면 어디에도 성추행 의혹에 대한 해명이나 피해자의 입장을 전하는 내용은 없었다. 논란이 일자 프로그램의 조연출을 맡았던 디디에 바로는 “우리는 탐사보도 프로그램이 아니다. 그저 한 가수의 일생을 다룬 것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여기에 그가 주연한 영화가 오는 12월5일 영화계의 관심 속에 개봉을 앞두고 있다. 그 또한 영화 홍보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촉각이 곤두서 있는 상태다.

프랑스 감독으로선 유일하게 할리우드 입성에 성공해 세계적인 지명도를 획득한 뤽 베송 감독 또한 현재 성폭행 혐의로 수사선상에 올라 있다. 뤽 베송 감독은 지난 10월초 네덜란드 출신 여배우 산트 판로이에 대한 약물 투약 및 강간 혐의로 법원의 예비심사가 개시된 상태다. 그런데 최근 프랑스 보도 전문채널인 BFMTV와 단독 인터뷰를 가졌다. 그를 위한 해명의 자리였다. 인터뷰 시점은 그가 자서전을 출간한 때와도 겹쳤다. 방송에서 뤽 베송 감독은 판로이와는 연인 관계였으며 자신에 대한 혐의점에 대해 “A부터 Z까지 모두 거짓말”이라고 강하게 부인했다. 그러나 판로이와의 사건에 관한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미 그는 이 사건 이외에 유사한 사건들이 줄지어 있으며 그 피해 여성만 9명에 이른다.

미성년자 성폭행 혐의를 받고 있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 ⓒ EPA 연합
미성년자 성폭행 혐의를 받고 있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 ⓒ EPA 연합

예술과 개인사 따로 보는 프랑스 분위기도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나는 고발한다》의 경우도 많은 인터뷰나 홍보방송이 취소됐지만 그렇다고 전부 취소된 것은 아니다. 프랑스의 국민 앵커인 클레르 샤잘은 자신의 프로그램에 남자 주인공 장 뒤자르댕을 출연시켰고, ‘꼭 봐야 할 영화’라고 수차례 강조하기도 했다. 폴란스키 감독의 성폭력 추가 폭로에 관해선 어떠한 질문도 나오지 않았다.

예술과 개인사를 구분하는 프랑스 분위기 때문일까. 11월13일 개봉 후 한 차례 주말을 넘긴 《나는 고발한다》는 총 관람객 38만7000여 명으로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다. 폴란스키 감독의 역대 작품 중에서도 가장 좋은 성적이며, 180만 관객을 돌파했던 전작 《피아니스트》보다 좋은 출발을 보이고 있다. 올해 개봉한 프랑스 영화 중에선 7번째로 좋은 성적이다.

2년이 흐르며 미투 열풍이 어느 정도 잠잠해지면서, 스타들의 성폭력 가해 의혹에 대해서도 프랑스 대중들은 이전에 비해 덤덤해진 분위기다. 지난 11월8일, 프랑스 이웃 나라 스페인 출신의 세계적인 테너이자 최근 성추행 혐의에 대한 폭로가 줄을 잇고 있는 플라시도 도밍고는 예정돼 있던 2020년 도쿄올림픽 무대에 서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최소한의 반성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라디오에선 여전히 세계 3대 테너라는 칭송과 함께 그의 음악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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