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치면 아까운 21세기형 추리 스릴러 《나이브스 아웃》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11.30 14:00
  • 호수 1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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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는 선택이 될 영화

전 세계적인 미스터리 스릴러 작가 할란 트롬비(크리스토퍼 플러머). 그의 85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모든 가족이 대저택에 모인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트롬비는 숨진 채 발견된다. 경찰과 함께 저택을 찾아온 명망 높은 사설탐정 브누아 블랑(다니엘 크레이그)은 익명의 고용인을 통해 사건을 의뢰받은 상황. 그는 트롬비 가족 중 한 명이 범인이라는 강력한 심증을 가지고 조사를 시작한다. 유명 추리소설의 내용인가 싶지만, 이는 신작 《나이브스 아웃》의 오리지널 스토리다. 지난 9월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이후 호평 세례를 받아왔던 이 영화가 12월4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미리 확인해 보니, 과연 호평이 쏟아질 만하다.

장르의 현대화

라이언 존슨 감독은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2017)를 통해 주목받은 할리우드 감독이다. 그는 《스타워즈》 사가(saga)에 합류하기 10년 전부터 《나이브스 아웃》의 아이디어를 품어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놀랍게도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감독이 직접 각본을 썼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번 영화의 핵심은 “추리소설의 프레임을 짜고 히치콕의 스릴러 엔진을 배치하는 것”. 말 그대로 미스터리한 사건을 만들고, 확실한 서스펜스(관객이 일말의 상황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지속적으로 긴장을 가져가게 만드는 것)로 극을 이끌겠다는 전략이다.

전략은 통했다. 토론토영화제에서 공개된 후 《나이브스 아웃》에는 ‘완벽한 오락영화’(가디언), ‘독창적인 반전’(LA타임스), ‘극도로 스마트한 영화’(엔터테인먼트 위클리) 등의 호평이 쏟아졌다. 얼마나 참신한지의 정도로 영화에 평점을 매기는 사이트인 로튼토마토(rottentomatoes)에서 《나이브스 아웃》의 신선도는 95%(11월27일 기준)를 기록하고 있다. 11월27일(현지시간) 북미 개봉을 시작으로 전 세계 극장가 반응 역시 쏟아질 참이다.

영화는 애거사 크리스티, 아서 도난 코일 등 위대한 추리소설 작가들의 작품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숨기지 않는다. 감독이 직접 언급한 레퍼런스만 해도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 《나일강의 죽음》 《깨어진 거울》 등 주옥같은 추리소설의 목록이 가득하다. 감독은 히치콕의 스릴러들을 포함해 《쉴라호의 수수께끼》(1973), 《5인의 탐정가》(1976) 등 과거 유행하던 미스터리 영화들의 영향 역시 받았음을 밝혔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연기한 탐정 브누아 블랑은 이름부터 애거사 크리스티의 페르소나인 탐정 에르큘 포와로를 어렵지 않게 연상시킨다.

그러니까 《나이브스 아웃》은 애초에 세상에 없던 무언가로 승부하는 영화가 아니다. 새로운 스릴이 아니라 익히 알고 있는 세계를 다시 방문하는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다락방에서 먼지가 쌓인 살인 미스터리 소설을 꺼내, 다시 현대적인 방식으로 비틀어 관객과의 두뇌싸움을 제시하는 작품이라고 할까. 시대 배경을 굳이 과거로 옮기지도 않았다. 오히려 2020년을 바라보는 현재 그대로의 상황을 제시함으로써 발생하는 색다른 재미를 활용했다.

수사를 위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가족들 중 유일한 청소년인 제이콥(제이든 마텔)은 한시도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트롬비가의 며느리 조니(토니 콜레트)는 ‘인플루언서’인 자신의 상황을 이용해 사업을 벌이고 있는 캐릭터로 설정됐으며, 가족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인스타그램 등 SNS를 언급한다. 블랑이 몹시 고전적인 추리의 방식으로 사건에 접근해 가는 동안, 이런 추리의 과정에 이미 익숙한 누군가는 그것을 역이용해 흔적들을 없애 나간다.

이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주연의 《셜록 홈즈》(2009~) 시리즈나 《오리엔트 특급 살인》(2017) 등 기존 영화들이 제시한 방향과는 정반대 노선이다. 오히려 셜록과 왓슨을 21세기 영국에서 활동하는 탐정들로 뒤바꿔 놓았던 TV 시리즈 《셜록》의 전략에 가깝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잘 알려진 고전 주인공의 재해석이 아닌 새로운 인물들을 내세워 독창적인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장점이 추가된다.

《나이브스 아웃》은 멀티캐스팅 역시 새로운 방식으로 활용했다. 슈퍼히어로나 블록버스터 장르에서나 활용되는 것이 일반적인 멀티캐스팅을 추리 스릴러 영화에 과감하게 추진한 것이다. 탐정 블랑과 더불어 수사에 핵심적 역할을 하는 트롬비의 간병인 마르타(아나 디 아르마스) 그리고 트롬비 가족까지. 영화의 주요 인물은 무려 열 명이다. 제이미 리 커티스, 마이클 섀넌, 돈 존슨 같은 명배우들 모두가 각자 스토리를 위해 정확한 역할을 부여받고 효율적인 등퇴장을 반복한다.

영화 《나이브스 아웃》의 한 장면 ⓒ ㈜올스타엔터테인먼트
영화 《나이브스 아웃》의 한 장면 ⓒ ㈜올스타엔터테인먼트
영화 《나이브스 아웃》의 한 장면 ⓒ ㈜올스타엔터테인먼트
영화 《나이브스 아웃》에서 랜섬 역을 맡은 크리스 에반스 ⓒ ㈜올스타엔터테인먼트

장르 영화로 미국의 현재를 꿰뚫어

각각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 MCU의 캡틴 아메리카로 굳어진 다니엘 크레이그와 크리스 에반스의 이미지를 전복했다는 것도 흥미롭다. 이들은 관객이 사랑할 수 있을 정도의 허술함을 지닌 탐정 블랑, 가문에 반항하는 문제아 랜섬 역할을 각각 맡았다.

미스터리 추리 장르의 현대화만이 《나이브스 아웃》의 장점으로 꼽힐 순 없다. 더 나아가 이 영화 안에는 현시대를 꿰뚫어보는 통찰이 있다. 좋은 작품들이 으레 그렇듯이 말이다. 조던 필 감독이 《겟 아웃》(2017), 《어스》(2019)를 통해 미국 사회의 날카로운 단면을 관객에게 들이밀었던 방식이 《나이브스 아웃》에도 있다. 다만 이 영화는 풍자의 방식을 택했을 뿐이다.

핵심은 트롬비의 가족들 그리고 이민자 가정의 가장 역할을 해야 하는 마르타 사이에서 오는 갈등이다. 하나씩 밝혀지는 가족들의 위선 역시 오늘날 미국 사회, 나아가 전 세계의 어떤 상황들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누리고 있던 당연한 특권을 위협받을 때의 태도’에 관한 것들을 꼬집고 있다.

글에서 밝힐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그래서 작가 트롬비는 누가 죽였는가. 혹은 어떻게 죽었는가. 범인은 누구인가. 블랑은 누가 고용했는가. 이 모든 궁금증은 관객이자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둔다. 최대한 서둘러 극장으로 가서 온라인의 각종 스포일러들을 피하라는 당부로 많은 말을 갈음한다. 확실한 건, 이 영화는 결코 후회 없는 선택일 것이라는 점이다.

 

미스터리 장르를 향한 라이언 존슨의 꾸준한 관심

라이언 존슨 감독이 갑자기 미스터리 장르에 관심을 가진 건 아니다. 선댄스영화제에서 호평받았던 장편 《브릭》(2005)은 여자친구를 죽인 범인을 추리해 가는 브랜든(조셉 고든 레빗)의 이야기다. 그는 ‘브릭’이라는 알 수 없는 말과 도와달라는 말만 남긴 채 숨진 여자친구의 경로를 추적해 나간다. 반전을 거듭한 이 영화의 놀라움은 《루퍼》(2012)로 이어진다. 젊은 킬러가 시간여행을 통해 30년 후에서 온 자신을 없애야 하는 기구한 이야기다. 과거가 변하면 미래도 달라지는 순환 속에서 주인공들은 존재론적 고민과 마주한다. 독창적인 소재와 작법으로 주목받는 존슨 감독은 시나리오를 쓰는 80%의 시간을 개요 잡기와 구조화에 투자한다고 한다. 대사 작성은 마지막 단계일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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