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들, 국민 안중에 있나”…'막장 국회'에 시민들만 한숨
  • 박성의 기자 (sos@sisajournal.com)
  • 승인 2019.11.29 20:2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당 ‘필리버스터’ 선언에 정기국회 '올 스톱'
시민들 “타협없는 국회에 지쳐…민식이법이라도 통과시켜야”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기지, 의원들이 싸우면 국민이 피를 봐요.”

29일 서울 종로에서 만난 택시기사 이진철씨(47)가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택시 안 라디오에서는 자유한국당의 필리버스터 돌입 소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씨는 “의원들이 총선 때만 국민들에게 귀를 열지 막상 뽑히고 나면 자기들 끼리 말하기 바쁘다”며 “이번 국회도 ‘막장’으로 끝날 게 훤히 보인다. 그 나물의 그 밥이지…”라며 말을 줄였다.

공직선거법 개정안,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법안 등을 둘러싼여야 대립이 격화하면서 정기국회가 ‘올 스톱’ 된 가운데, 이날 서울에서 만난 시민들은 국회의 파행에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10대 청소년부터 70대 노인까지, 의원들이 민생 법안을 볼모로 잡고 정략적 다툼을 벌이고 있다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29일 국회에서 필리버스터 신청과 관련한 기자회견을 마친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29일 국회에서 필리버스터 신청과 관련한 기자회견을 마친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29일 한국당은 공직선거법 개정안, 공수처 설치법안 등을 막을 때까지 무제한 토론, 즉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는 기자회견에서 "불법으로 출발시킨 패스트트랙 폭거의 열차가 대한민국을 절망과 몰락의 낭떠러지로 몰고 있다"며 "불법과 다수의 횡포에 한국당은 평화롭고 합법적인 저항의 대장정을 시작할 것이고, 그 차원에서 필리버스터를 신청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이날 본회의는 물론, 다음 달 10일 종료되는 정기국회는 사실상 중단됐다. 긴급 최고위원회의까지 열며 본회의 참석을 고민했던 민주당은 본회의를 열지 않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필리버스터를 중단시킬 수 없다고 보고 본회의 개의를 미루고 한국당을 상대로 한 규탄대회를 열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 탓에 여야가 합의한 ‘민식이법’ 등 비쟁점 법안의 의결도 불투명해졌다.

여야가 격한 대립을 이어가는 가운데, 이날 거리에서 만난 시민들은 국회에 대한 실망감을 드러냈다. 가뜩이나 경기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여야가 민생 보다 정략 싸움에 몰두하고 있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시청 앞 광장에서 만난 이필호씨(68)는 “나는 대한민국의 보수 중의 보수인데 오늘 한국당의 결정(필리버스터)은 너무나 실망스럽다”며 “아이들이 보고 있고 온 국민이 보고 있다. 아무리 상대가 싫어도 처리할 법들은 처리해가며 다퉈야지”라며 혀를 찼다. 그러면서 이씨는 “북한이 미사일을 쏘고 일본이 호시탐탐 경제침략을 노리고 있다. 민주당도 이럴 땐 통 크게 양보도 하고 그래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종각역에서 만난 직장인 최충우씨(33)는 “한심스럽다”며 “(국회에) 기대한 것도 없었는데 계속 실망만 하니까 이제 투표하기도 싫어지는 것 같다”고 했다. 그 옆에 서 있던 전민기씨(33)는 “뉴스를 이제 안 본다. 정치 뉴스는 이제 소음”이라며 “올해 들어 정당 간 대타협 같은 게 이뤄진 게 있었나. 나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10대들의 비판도 이어졌다. 수능을 끝내고 대입을 앞뒀다는 이채령양(18)은 “정치에 대해 잘 모르는데 드라마에서 나오는 ‘악역’ 그대로를 보는 것 같다. 다 이기적인 사람들 같다”고 전했다.

주부들은 ‘민식이법’이라도 통과시켜야 하는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민식이법'과 '하준이법', '해인이법' 등으로 불리는 어린이 교통안전 관련 법안은 이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거쳐 본회의에 상정될 예정이었으나, 한국당이 이날 본회의에 상정되는 모든 안건에 대해 필리버스터을 신청함에 따라 처리 여부를 장담할 수 없게 됐다.

종각역 상가 앞에서 5살 딸 아이의 손을 잡고 있던 박예란씨(31)는 “다른 건 몰라도 우리 아이들 위한 법은 무조건 통과시켜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일반 시민들이 당장 체감할 수 있는 법들이 얼마나 된다고”라며 고개를 저었다.

한편, 국회법 제106조의 2, 필리버스터 실시 규정에 따라 국회의장은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의 요구를 받았을 경우 필리버스터를 실시해야 한다. 필리버스터를 실시하는 본회의는 종결 선포 전까지 산회하지 않고 회의를 계속한다.

한국당 소속 의원 전원(108명)이 4시간씩 무제한 토론에 나설 경우 9일 정기국회 종료 때까지 표결을 막을 수 있다. 유치원 3법, 민식이법 뿐 아니라 본회의에 상정될 법안 200여개 모두 처리가 불발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