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살아나는 일본 ‘대동아공영’의 망상
  • 이원혁 항일영상역사재단 이사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11.30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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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혁의 ‘역사의 데자뷰’] 42화 - 아소 다로 부총리, 패전 후 금지어 됐던 ‘대동아’ 용어 공식 석상서 사용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11월 일본 도쿄에서 대동아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는 겉으로는 “아시아를 서구 제국의 침략에서 구해내자”면서 아시아인의 공존공영·자주독립·호혜제휴 등의 구호를 내걸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구미 열강들을 내쫒고 이들의 식민지를 차지하려는 일제의 야욕이 숨어 있었다. 회의 참석자는 일본의 총리대신 도조 히데키를 비롯해 중국·만주국·필리핀·태국·미얀마 등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에 세워진 친일 정권의 수장들이었고 인도 임시정부의 대표가 배석했다. 이미 식민지 상태에 놓인 한국과 대만은 이 자리에 참석할 자격조차 갖지 못했다.

 

일제의 달콤한 유혹, ‘대동아공영’에 농락당한 아시아 해방의 꿈

일본이 패망한 후 이 회의에 참석한 친일 부역자들은 어떤 최후를 맞게 되었을까. 만주국 총리 장징후이(張景惠, 1871~1959)는 소련군에 붙잡혀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그 뒤 중화인민공화국에 넘겨져 푸순의 전범관리소에 갇혀 있다가 숨을 거뒀다. 또 1940년 중국 난징에서 친일 정권을 세운 왕자오밍(汪兆銘, 1885~1944)은 일제의 항복   1년 전 나고야에서 병으로 죽었다. 인도 국민군을 이끈 수바스 찬드라 보세(1897~1945)는 일본군과 함께 인도로 진격했지만 영국군에게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종전 직후 소련으로 망명을 시도한 그는 대만에서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죽고 말았다.

태국은 대동아회의에 총리를 대신해 외무장관을 파견했다. 평소 일본 군국주의를 숭배한 쁠랙 피분송크람(1897~1964) 태국 총리는 추축국에 가담했지만 전후 재빨리 미국 편으로 돌아서 한국전쟁 때 정예 부대와 군함을 보내기도 했다. 군 출신인 그는 군사 독재를 펼치다 쿠데타로 쫓겨난 뒤 일본으로 망명해 그곳에서 죽었다. 미얀마의 바 모우(1893~1977) 수상 역시 일본으로 도망쳐 절에서 숨어 지내다가 연합군에 붙잡혔다. 귀국한 뒤에는 반혁명분자로 몰려 고초를 겪다가 사망하게 되었다.   

대동아공영 선전 포스터와 대동아회의 참석자들. 오른쪽 위 왼쪽부터 만주국 장징후이,       필리핀 라우렐, 미얀마 바 모우
대동아공영 선전 포스터와 대동아회의 참석자들. 오른쪽 위 왼쪽부터 만주국 장징후이, 필리핀 라우렐, 미얀마 바 모우

이와 같이 친일 괴뢰정권의 수장들은 대부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들은 아무런 실권이 없는 꼭두각시에 불과했지만 모두 전범으로 지목되었고, 대체로 명문가 출신의 유학파 엘리트라는 공통점도 지녔다. ‘두부 장수’에서 마적단 두목으로 인생을 갈아탄 만주국 장징후이가 예외적이긴 하나 그 또한 일본 관동군의 지시에 무조건 ‘좋아요’를 외쳐 ‘하오하오(好好) 선생’으로 불릴 정도로 뼛속 깊은 친일파였다. 여기에다 영국 식민지였던 미얀마의 바 모우 수상은 “일본은 백인 지배로부터 우리를 구했다. 일본만큼 아시아에 공헌한 나라도 없고, 또한 오해받고 있는 나라도 없다”라며 침략을 옹호하기도 했다.

사실 대동아공영권에 속한 나라들은 오랜 동안 서구 제국의 폭정에 시달려 온 터라  “아시아 사람끼리 잘 살아보자”는 일제의 달콤한 유혹에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속전속결로 ‘백인 군대’를 몰아낸 일본군의 위용은 이들에게 해방의 꿈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반면 베트남의 호찌민과 미얀마의 아웅산 장군 같은 이들은 ‘일본의 독립 약속은 거짓’이란 사실을 일찍이 간파했다. 특히 일본군과 손잡고 영국을 내쫓은 아웅산은 이들의 음흉한 속내를 알아채고 총부리를 다시 일본으로 돌려 독립을 이뤄내게 되었다. 이처럼 일제의 대동아공영론은 어떤 이에게는 해방의 헛된 망상을 심어 주기도 하고, 또 다른 이에게는 ‘독립 사기극’으로 여겨져 각기 나라의 명운을 갈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대동아회의가 열린 1943년 11월 5일 당시 한반도 사정은 어땠을까. 궁금한 마음에 자료를 뒤지다 보니 그날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실린 글이 눈에 띄었다. “오늘날 대동아인으로서 이 성전에 참여함은 대운(大運) 중의 대운임이 다시 의심이 없다 (중략) 순정의 청년들아! 헛된 논의를 집어치우고 대운에 들어서서 선선하게 역사적 임무를 맡아 보세나” 육당 최남선(1890~1957)이 쓴 지원병 권유의 글이었다. 3·1 운동 때 민족 대표로서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그는 이후 변절하여 조선인으론 최고 명예직인 중추원 참의를 지내는 등 적극적인 친일 행각을 벌였다.

공교롭게도 그의 글이 실린 날 중추원 고문과 참의들은 “출진 예정자들을 직접 만나 사기를 북돋우는 데 힘을 쓰자”라는 결의문을 채택하기도 했다. 지원병의 모집 마감일이 다가오자 국민총력조선연맹, 중추원 등 친일 세력들은 지원병 적격자의 집을 돌며 설득 작업에 열을 올렸다. 이들은 “대동아 천년의 운명을 가를 성전(聖戰)이 진정한 결전의 단계에 들어섰다”면서 출진을 부추겼다. 일제가 괴뢰 정권의 대표들을 불러 모아 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만방에 떨친 바로 그 날, 식민지 조선에선 일제와 그 부역자들이 ‘총알받이’ 젊은이들을 침략 전쟁에 내모는 아이러니가 연출되었던 것이다.

최남선과 그가 매일신보에 쓴 지원병 권유 글. 오른쪽은 조선인 지원병과 가족들
최남선과 그가 매일신보에 쓴 지원병 권유 글. 오른쪽은 조선인 지원병과 가족들

그 무렵 조선에서는 30만 명이 넘는 청년들이 지원병이나 강제 징집 등으로 전쟁에 동원됐다. 이에 가담한 최남선은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곧 풀려났고 이후 언론 기고 활동을 지속하다 사망했다. 그의 아들은 서울대 의대에서 소아병 권위자로 이름을 날렸고 손자들도 의사·교수 등 사회지도층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최남선의 행적은 필리핀 친일 정권을 이끈 호세 라우렐(1891~1959)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대동아회의에 참석한 라우렐 수상 역시 전범으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고 전후에도 정치 활동을 계속하다 병으로 죽었다. 비참한 최후를 맞은 다른 친일 괴뢰국 수장들과 달리 비교적 순탄하게 삶을 마감한 셈이다.

그도 그럴 것이 1948년 필리핀의 로하스 대통령은 라우렐을 비롯한 친일 부역자들에게 사면령을 내려 수천 명의 사람들을 풀어주었다. 마치 우리의 반민특위 해체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실제로 종전 이후 필리핀의 상황은 우리의 굴곡진 현대사와 많이 닮았다. 두 나라 모두 일본 지배에 놓였다가 미 군정을 거쳐 독립을 이루었다. 독재 정권과 민주화 과정도 함께 겪었고, 불행하게도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점 또한 같다. 1986년 아시아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린 ‘피플 파워’로 집권한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도 부역자 가문 출신이었고, 부통령은 대동아공영을 부르짖은 호세 라우렐의 아들이었다.

“일본의 승리가 곧 필리핀의 승리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대동아전쟁 선전물. 오른쪽은 국회에 출석한 아소 다로 부총리와 아베 총리
“일본의 승리가 곧 필리핀의 승리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대동아전쟁 선전물. 오른쪽은 국회에 출석한 아소 다로 부총리와 아베 총리

더 당혹스러운 건 지난 70여 년 동안 거의 잊혀졌던 ‘대동아’란 용어가 일본에서 다시 소환되는 현실이다. 지난 9월 아소 다로 부총리는 공식 석상에서 ‘대동아전쟁’이란 명칭을 사용해 논란을 일으켰다. 전후 연합국사령부는 이 용어를 사용 금지시켰고, 지금까지도 일본 정부의 공식 문서나 교과서, 언론에서는 ‘태평양전쟁’이란 표현을 대신 쓰고 있다. 대동아란 침략 전쟁을 미화하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금지어로 인식되어 왔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2008년 총리 재임 시절에도 이 용어를 썼다가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반성 아닌 추억’, 70여 년 만에 일본에서 되살아나는 대동아전쟁의 섬뜩한 기억

아베 총리는 한술 더 떠 지난 10월 임시국회 개막 연설에서 제국주의 일본을 ‘식민주의에 맞선 인종평등 주창국’으로 표현했다. 침략 전쟁을 ‘침략 아닌 시혜’로, ‘식민지배 아닌 인종평등의 성전’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아베와 아소 두 사람 모두 대동아 성전을 소리 높여 외친 자들의 후손이니 그 DNA가 어디 가겠는가 싶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처럼 거짓, 선동, 뒤집기에 능숙한 나라와 이웃하고 있다. 어찌보면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지소미아 종료 유예에 대한 한·일 간의 진실 공방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앞으로 강제징용, 독도 문제에서 더욱 기막힌 일이 벌어질 게 뻔하다. 자칫 설마가 현실이 되는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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