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에게 더욱 중요한 민주적 절차
  • 노혜경 시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12.07 17:00
  • 호수 1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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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절차적 민주주의라도 제대로 하자

제1 야당의 정치 포기로 국민 된 자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럴 때마다 그리워지는 것이 열린우리당의 실험이다. 짧은 정당 경험이지만, 당시 특히 여성이자 당내 소수파로서 겪은 일들은 나중에라도 이야기하고 싶다.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준비위원회 시절 중앙위원회에서였다. 개혁당 출신은 나이로도 민주당 출신 중앙위원들보다 평균 10살쯤 젊었다. 의회나 정당 활동 경험도 전혀 없다시피 했다. 무언가 결의를 해야 하는 회의였다. 안건이 무엇이었는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일을 내가 기억하는 것은 안건 때문이 아니라 표결 방식 때문이었다. 표결이냐 박수냐.

나를 비롯해 개혁당 출신 중앙위원들이 의사진행발언을 통해 집중적으로 표결할 것을 주장했다. 어떤 소수의견이 있는가를 잘 아는 것이 더 좋고, 발언과 토론의 기회가 충분한 것이 더 좋으며, 그런 뒤에 표결로 생각의 차이가 어느 정도 수준인가를 아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그래야 보다 민주적이라는 거다.

12월4일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왼쪽 네 번째)가 국회에서 자유한국당을 뺀 바른미래당·정의당·민주평화당 및 대안신당과 4+1 예산안 실무회동을 하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12월4일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왼쪽 네 번째)가 국회에서 자유한국당을 뺀 바른미래당·정의당·민주평화당 및 대안신당과 4+1 예산안 실무회동을 하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토론과 설득의 과정을 아끼다 보면 ‘쪽수’가 지배

그러나 현역 의원이 많던 민주계는 표결은 분열을 가져오기 쉬우므로 박수로 만장일치 통과시키는 편이 낫다는 김원기 임시의장의 발언에 더 많이 동조했고, 결국 그렇게 되었다. 토론을 하다 보면 반대의견이 점점 날카로워지기 쉽고, 결국 상처와 분열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공화주의적인 생각이었을까? 잘 모르겠다. 개혁당파는 수적으로 당연히 열세였기 때문에 표결을 하면 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더라도 우리의 의사를 충분하게 설명할 토론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승복할 수 있다는 것이 당시 우리의 생각이었다.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대등한 의제로 대결해서 표로 졌다면 당연히 승복해야지. 그 통과된 안건을 비록 반대했더라도 말이다. 충분하지 않아도 설득할 기회가 있어야 한다는 전제 아래 말이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박수가 만장일치라는 당시의 결정에 흔쾌히 승복하지 못했다. 아니 왜 꼭 만장일치여야 하는가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다는 편이 옳겠다. 세상에는 얼마나 다른 생각들이 많은데, 얼마나 다른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데, 만장일치가 형식적으로는 몰라도 가능한 일인가.

사실 더 불만이었던 것은 토론이 충분치 않았던 점이다.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을 반박하고 의견을 개진하던 개혁당계 위원들은 휴식시간에 누군가에게 불려가 너무 많이 발언하지 말라는 주의를 듣기도 했다. 이 중앙집권적 분위기는 전당대회로 새로운 지도부를 선출하고 체제를 정비하면서 많이 달라졌다. 충분치는 않지만, 그리고 경험 없음이 주는 어리석은 판단이 없지도 않았지만, 토론하고 설득해 표를 모으고 약속을 지키면서 표결에 임하던 경험 덕분에 나는 정치불신이 끓어오르는 요즘도 여전히 정치에 희망을 건다.

자유한국당의 필리버스터 예고로 정치마비 상황이 전개되었지만, 이 상황은 민주당으로 하여금 한국당 아닌 다른 야당들과 협의하고 타협할 의무를 상기시켰다. 억지로라도 말하게 하고 들어야 하게 되었다. 사실 처음부터 그랬어야 했다. 억지로 되도록 많은 숫자로 화합의 국회를 보여주고 싶다는 것은 오히려 낡고 구닥다리인 비민주적 발상이다. 토론과 설득의 과정을 아끼다 보면 쪽수가 지배하게 된다. 특히, 침묵당하기 쉬운 페미니스트로서는 민주적 절차를 지켜주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 언젠가는 절차적 민주주의나 대의제 민주주의를 넘어 한 사람 한 사람이 제대로 존중받는 민주주의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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