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기의 책보기] 당신을 흔든 그 한 마디를 가졌는가
  •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thebex@hanmail.net)
  • 승인 2019.12.23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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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흔든 그 한마디》ㅣ정남구 지음ㅣ라의눈 펴냄ㅣ288쪽ㅣ1만 4800원
ⓒ 라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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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 이상 성인 중 절반 가까이가 지난 1년 동안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책에 대한 인식이 너무 고급스럽게 박힌 것도 이유가 될 듯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나 저자의 책 정도는 돼야 "책 읽었다"고 말이라도 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 말이다. 그런 책들은 대부분 전문분야의 어려운 내용이거나, 일반 독자들과는 거리가 멀거나, 읽기 부담스럽게 두꺼운 것이 특징이다. 문체는 팝콘이나 뻥튀기처럼 읽기 쉬우나 울림은 오랫동안 끓인 보리차처럼 깊고 그윽한 책들이 참 많은데 그런 인식 때문에 더불어 읽히지 않는 문화가 안타까울 뿐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돼 첫 중간시험을 치를 때였다. 긴 답안지에 한두 문제를 논술로 푸는 것이 고등학교 때와 달랐다. 대부분 과목은 조교들이 들어와 시험지를 나눠주고, 부정행위를 막기 위해 감독을 했다. 그런데 A과목은 조교 대신 K교수가 직접 들어와 시험지를 배포했다. 시험지 배포를 마친 교수는 “점수 몇 점 때문에 인간성 포기하지 마라”고 한 마디 툭 던지고 나가버렸다. 학생들은 잠시 멍했다. 부정행위를 하려고 소위 컨닝 페이퍼를 준비했던 한 친구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뭉쳐 교실 밖으로 던져버렸다. 그날 부정행위를 하는 학생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 이후 K교수의 그 한 마디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말과 더불어 머리 뒤끝에 붙어서 수시로 나를 흔든다.

《나를 흔든 그 한마디》에 나오는 한 마디를 소개한다. 1953년 5월 29일 오전 11시 30분, 동북아 끝 한반도의 38도선 백마고지에서는 청춘들이 초개처럼 목숨을 던지며 고지전(高地戰)을 벌이고 있을 때 뉴질랜드 산악인 에드먼드 힐러리와 네팔인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가 인류 최초로 해발고도 8848m 에베레스트(초모룽마) 정상에 올랐다. 오전 11시, 정상 바로 밑에 먼저 도착한 것은 텐징이었다. 30분 후 지친 힐러리가 올라오자 텐징은 정상 몇 걸음 앞에서 영광을 힐러리에게 양보했다. 텐징은 ‘점수 몇 점’보다 셰르파로서 ‘가오’를 택했던 것이다. 기자들이 소감을 묻자 텐징은 “내가 할 말을 산의 정상에 두고 내려왔기 때문에 할 말이 없습니다”고 답했다. 그리고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티벳어 초모룽마는 ‘신성한 어머니’란 뜻이다.

"나는 일곱 번 도전했다. 돌아왔고, 다시 도전했다. 나는 적을 대하는 군인으로서 긍지나 힘이 아니라 어머니 무릎에 오르는 '아이의 사랑'을 갖고 산에 올랐다."

에베레스트는 자신과 싸우려는 사람에게는 결코 정상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하다. 당신은 삶의 어떤 경우에도 텐징일 수 있겠는가? 당신은 당신을 흔든 그 한 마디를 가지고 있는가? 가령 "일체의 욕망 다 끊고 한 소식 얻겠다고 산방(山房)에 틀어 앉아 있는 것도 엄청난 욕망"이라는 시인 황지우의 통찰이 담긴 그런 한 마디를.

▲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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