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가락’ 가상화폐 정책에 시장도 "헷갈려!"
  • 김희진 시사저널e 기자 (heehee@sisajournal-e.com)
  • 승인 2020.01.02 10:00
  • 호수 157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디지털 화폐 도입에 회의적이라던 정부 “내년부터 가상화폐에 대한 과세 추진”

지난 12월1일 홍경식 한국은행 금융결제국장은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한국은행 전자금융 세미나에서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할지는 모르겠지만 디지털 화폐(CBDC) 발행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홍 국장은 “기존의 금융 시스템에 비해 분산원장 기술이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고, 제도적 배경도 아직 미숙하다”면서도 “높은 가격 변동성으로 인해 암호화폐가 가치 저장 수단으로 한계가 있지만, 한편으로 정보의 무결성 확보라는 측면에서 분산원장 기술의 장점이 새롭게 인식됐다”고 말했다.

디지털 화폐 도입에 회의적이던 정부가 최근 가상화폐에 대한 과세 계획을 밝혀 주목된다. 사진은 서울 강남구의 한 가상화폐 거래소 모습 ⓒ 시사저널 박정훈
디지털 화폐 도입에 회의적이던 정부가 최근 가상화폐에 대한 과세 계획을 밝혀 주목된다. 사진은 서울 강남구의 한 가상화폐 거래소 모습 ⓒ 시사저널 박정훈

한국은행 “디지털 화폐 발행 검토 중”

디지털 화폐 도입 필요성에 회의적이던 이전 입장과 배치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 1월 한국은행은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 보고서를 통해 “우리나라는 현금 이용 축소에 대응하거나 금융 포용을 제고한다는 CBDC의 발행 유인이 크지 않은 만큼 가까운 장래에 CBDC를 발행할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지난 10월 지급결제 세미나에서도 홍 국장은 “한국은 지급결제 인프라가 선진적이고 다양한 지급 수단이 발달한 상태여서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를 발행할 필요성은 거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한국은행이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입장을 선회한 데는 디지털 화폐 발행에 대한 세계 각국의 태도가 변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현재 일부 주요국을 중심으로 국경 없는 결제 시장을 구축해 지불·결제의 편리성과 비용 절감을 위한 CBDC 발행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중국과 프랑스다. 지난 10월 황치판 중국국제교류센터 부이사장은 “중국은 CBDC를 발행하는 첫 국가가 될 것이다. 출시가 머지않았다”고 발표했다.

‘디지털화폐전자결제(DCEP)’로 불리는 중국의 CBDC는 중국 정부와 인민은행이 직접 발행하는 디지털 화폐로 알리바바, 텐센트 등 중국 IT기업이 도입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무창춘 인민은행 지불결제국 부국장은 12월21일 베이징 금융포럼에서 “DCEP의 설계와 표준 제정, 기능 개발, 통합 테스트 등 모든 작업을 마쳤다”며 “조만간 시범지역을 정해 화폐를 공급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정부가 인민은행을 통해 국가 차원의 DCEP 발행을 사실상 공식화한 것이다. 중국은 내년 중 발행을 목표로 하고 있다.

프랑스의 중앙은행인 프랑스은행(Banque de France) 역시 12월4일 “2020년 1분기까지 디지털 유로 도입을 위한 시험운영을 시작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프랑수아 빌루아 드 갈로 프랑스은행 총재는 “조속히 디지털 화폐 실험에 돌입하고자 한다”며 “이번 시험운영이 페이스북 리브라 같은 민간 디지털 통화에 대한 대항력을 확보하는 것은 물론 디지털 유로화 발행으로 발전하기 위한 중요한 단계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은의 디지털 화폐 발행 검토에 앞서 정부는 내년부터 가상화폐에 대한 과세를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지난 12월8일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정부는 가상자산 소득세 과세 방침을 정하고 내년 세법 개정안에 구체적인 과세 방안을 담기로 했다. 기재부 관계자는 “‘소득 있는 곳에 과세 있다’는 원칙에 따라 가상자산 관련 과세 방안을 계속 논의해 왔다”며 “내년 세법 개정안에 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정부는 암호화폐가 법정화폐는 아니지만 ‘가상자산’으로 분류해 과세하겠다는 입장이다. 11월25일 비트코인을 비롯한 암호화폐를 가상자산으로 정의하는 ‘특정 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특금법)’ 개정안이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회의를 통과한 상태다. 특금법을 통해 암호화폐를 가상자산으로 분류함으로써 과세 근거를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한국은행과 마찬가지로 정부도 그동안 “가상화폐는 법정화폐가 아니다”는 완고한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지난 5월 국무조정실 주재로 열린 가상화폐 시장 동향 점검회의에서 노형욱 국무조정실장은 “가상통화는 법정화폐가 아니며 어느 누구도 가치를 보장하지 않는다”며 “불법행위·투기적 수요, 국내외 규제 환경 변화 등에 따라 가격이 큰 폭으로 변동해 큰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암호화폐 과세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업계에선 가상화폐가 점차 제도권에 들어오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이 생겨나고 있다. 그동안 불법이나 투기 이미지가 강하던 가상화폐가 법에 따라 일종의 자산으로 분류되면서 제도권 진입을 통한 이미지 쇄신에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특금법이 제정되면 부정한 방법으로 거래소를 운영해 온 사업자들은 금융 당국의 제재를 받게 된다.

경찰이 최근 가상화폐 관련 피의자를 검거한 후 브리핑하고 있다. ⓒ 연합뉴스
경찰이 최근 가상화폐 관련 피의자를 검거한 후 브리핑하고 있다. ⓒ 연합뉴스

가상화폐 과세 예고에 엇갈리는 업계 시각

가상화폐 역시 거래를 통해 소득이 발생하는 만큼 세금을 징수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시각도 있다. 한호현 한국전자서명포럼 의장은 “소득에 대해 세금을 매기는 건 모든 시장에서 당연하게 적용되는 원칙이다. 주식에도 거래세와 소득세를 부과한다”며 “그동안 가상화폐 시장은 과세 대상에서 제외되면서 오히려 특혜를 누려왔다. 정부의 과세 추진은 가상화폐 시장에 대한 적극적 규제가 아니라 다른 시장과 공평하게 제도를 적용하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일각에선 그간 가상화폐에 대해 자산 가치를 인정하지 않던 정부가 제대로 된 규제를 마련하기도 전에 과세부터 하겠다고 나선 것에 대한 불만도 제기된다.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가상화폐에 세금을 부과하겠다는 건 가상화폐에 대한 자산 가치를 정식으로 인정한다는 것과 다름없다”며 “그동안 가상화폐를 투기로 규정하면서 시장을 압박하더니 이제 와서 세금은 걷겠다는 것 아니냐”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그는 “과세 추진을 논의하기 전에 제도화를 통해 산업이 진흥될 수 있는 법안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