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힐 권리의 조건 [시론]
  • 김경원 세종대 경영대학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2.05 18:00
  • 호수 1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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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래전 기억이다. 필자는 초등학교 4학년에 올라가자 국어 교과서에서 ‘망각’이란 단원을 맞닥뜨렸다. 이 단어 자체도 어려운 데다 그 내용도 매우 심오해 참 난감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꼬마들이 배운 걸 잘 기억하지 못해 시험점수가 안 나오자 너도나도 ‘기억력’이 좋았으면 하고 푸념하고 있었다. 지나가던 노인이 그 이야기를 듣더니, ‘망각’ 즉 잊어버림이 얼마나 좋고 필요한지를 말해 준다. 인생에는 안 좋고 괴로운 일도 많아 이런 일을 모두 기억하고 있으면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질 것이니 그렇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에 충격을 받아서인지 필자는 초등학교 6년간 배운 국어 교과서 내용 중에서 이 단원만은 일생 ‘망각’되지 않고 남아 있다.

#2: 그리스 신화에 ‘레테’라는 여신이 나온다. ‘불화’의 여신 에리스의 딸로서 망각의 신이다. 저승 하데스를 흐르는 5개 강 중 하나가 이 여신의 이름을 딴 레테강이다. 죽어서 저승으로 향하는 힘든 여정을 걸어온 망자들은 이 강을 건너면서 갈증으로 강물을 마시면 이전 기억을 모두 잃는다. 오늘날 스페인의 카디즈에는 과달레테라는 강이 흐른다. 아랍어로 ‘레테강’이라는 뜻이다. 원래 이 강의 이름은 레테였으나 이 지역을 점령한 사라센 세력이 자기 식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고대에 그리스와 페니키아인들이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이 지역에서 충돌하자, 외교적으로 문제를 해결한 후 이 강의 물을 마시고 서로에 대한 미움을 잊자고 강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는 것이다. 다시 그리스 신화다. 므네모시네는 기억의 여신이다. 하늘의 신 우라노스와 대지의 여신 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제우스는 기간테스라는 거인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이 기쁨을 영원히 ‘기억’하고자 이 여신과 9일간 동침했다. 그 후 9명의 ‘무사이’라는 딸들을 낳았다. 기억과 예술, 특히 음악의 여신들이다. 글자가 없었던 옛날에는 노래가 기억을 전승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으니 음악의 여신이 동시에 기억의 여신이 된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실제로 ‘무사이’라는 말에서 영어 단어 ‘뮤직’과 ‘기념’관을 뜻하는 ‘뮤지엄’이 나왔다.

ⓒ 연합뉴스
ⓒ 연합뉴스

#3. 유럽 국가에서는 ‘잊힐 권리’가 입법화된 경우가 종종 있다. 영국의 경우 전과자 기록이 일정 기간이 지나면 말소되어 구직 등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하는 법이 있다. 2014년 스페인의 한 개인이 자신의 정보가 더 이상 검색되지 않도록 구글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유럽연합(EU) 대법원은 ‘불충분, 부적절, 시간상으로 더 이상 의미가 없거나 과다한’ 같은 ‘특정조건’하에서는 검색이 되지 않게 하는 ‘망각권’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연두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은 퇴임 후 “잊힌 사람으로 그렇게 돌아가고 싶다”며, ‘기념’ 사업 같은 것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바람과 달리 언론들은 임기 중 세금 2500조원 이상을 쓴 당사자가 잊힐 수는 없다며,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등 제도적 장치 때문에도 ‘잊힐 권리’가 없음을 일제히 지적하고 나섰다. ‘적폐청산’이란 명분으로 전 정권과 수장들의 잘못을 온통 털어왔으나 정작 자기 차례에는 이를 당하지 않겠다는 것이냐고 비판한 기사도 보인다. 하기야 미국의 역대 대통령의 경우를 보아도 그렇다. 미국에서도 밴 뷰렌, 타일러, 폴크, 필모어, 피어스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잊힌’ 이들은 치세 동안 큰 업적도 없지만 큰 잘못도 없는 경우다. 재임기간 중 경제성장률도 역대 최저가 될 것 같은 등 ‘특정조건’ 만족이 어려운 상황에서 과연 국민 모두가 레테를 건널까, 아니면 한 사람이 무사이들의 입에 오를지는 점점 답이 정해져 가는 모습이다.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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