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季節)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 … … 소학교(小學校) 때 책상(冊床)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소녀(異國少女)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詩人)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 … …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 … … ‘
일제식민지 시대 민족저항시인으로 일본 감옥에서 요절했던 시인 윤동주의 ‘별 헤는 밤’ 시의 일부분이다. 만약 위의 예처럼 이 시 끝에 프랑스 파리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던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별이 빛나는 밤에’가 함께 편집된 책이 있다면 그 느낌은 어떨까? 호불호에 따라 다르겠지만 《동주와 빈센트》는 전체가 이런 형식으로 편집된 책이다. 시는 모두 124편, 그림은 129점이다.
윤동주 시인은 1917년에 만주에서 태어나 연희전문학교를 다녔고 일제강점에 문학으로 저항하다 1945년 옥사했다. 만 28세, 참으로 안타까운 나이였다. 빈센트 반 고흐는 1853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1890년 프랑스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만 37세였다. 고흐와 동주의 활동시기는 약 반세기 정도 세월의 간극이 있다. 불운했던 운명만큼이나 둘 사이에는 텔레파시라도 통했던 것일까? 한 세기를 지나 서로 만난 동서양 두 작가의 글과 그림은 놀라우리만치 메시지의 조화를 이룬다. 아래와 같다.
자화상(自畵像)
산모퉁이를 돌아 논 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며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