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우리는 ‘세습사회’에 살고 있다
  • 김정헌(화가, 4.16재단 이사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2.12 18:00
  • 호수 1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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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문희상 국회의장의 아들이 거창하게 ‘북 콘서트’를 열어 자기 아버지 지역구에 ‘세습 출마’를 선언했다가 비난을 받자 철회한 적이 있다. 이렇게 우리 사회에서 권력의 세습은 주로 정치권에서 일어나지만 이를 일반 시민들은 당연히 좋지 않게 보고 있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심재철 원내대표 등이 국회 본회의가 예정된 2019년12월13일 오후 국회 본청 입구 로텐더홀에서 문희상 국회의장의 아들 문석균 더불어민주당 경기 의정부갑 지역위원회 상임 부위원장의 지역구 세습 논란을 규탄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연합뉴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심재철 원내대표 등이 국회 본회의가 예정된 2019년12월13일 오후 국회 본청 입구 로텐더홀에서 문희상 국회의장의 아들 문석균 더불어민주당 경기 의정부갑 지역위원회 상임 부위원장의 지역구 세습 논란을 규탄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연합뉴스

세습, 소위 대물림은 왕조시대나 봉건사회의 유습이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이런 유습이 곳곳에서 활개를 치고 있다. 대개 이런 세습은 혈연으로 맺어진 사회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런 세습은 혈연관계에서만 나타나지는 않는다. 우리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지연’ ‘학연’을 중심으로 이보다 더한 세습이 만들어지는 것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어디 어디 지역 출신들은 자기들끼리의 내부자 거래망을 통해 밀어주고 끌어당긴다. 또 어디 어디 출신 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조직에서는 지역세습보다 훨씬 더 그 범위가 좁아져 소위 ‘밀당’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진다. 이와는 조금 다르지만 검찰 조직에서는 일단 검사가 되면 아예 개인은 없어지고 ‘검사동일체’라는 조직만 남게 된다. 이도 일종의 지위를 이용한 사회적 세습이다. 검사를 관두고도 그들은 ‘전관예우’를 받으며 넘치게 잘 먹고 잘산다.

세습은 윗대의 성과나 권력을 아무 노력도 없이 공짜로 자기 수중에 넣는 것을 말한다. 그야말로 불로소득이다. 특히 이익에 민감한 경제계에서는 부친이 이루어 놓은 기업을 그 아들이, 또 그 아들의 아들이 통째로 승계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재벌들의 세습은 절대화돼 아마도 이런 세습 승계는 영원할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이런 부의 세습은 세금으로 잘 처리되면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지는 않는다.

한때 예술계에도 그 비슷한 세습 사례가 없지 않았지만 유독 그런 세습 사례가 잘 발견되지 않는다. 윗대가 예술로 만든 재산은 세습될 수 있을지 몰라도 ‘재능’ 자체가 세습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요즘은 윗대보다 아랫대에서 이루어진 예술적 성과가 더 빛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나는 일찍 고등학교건 대학교건 ‘동창회’에 발을 끊었다. 아직도 가끔 가까웠던 동창들을 안 만나는 것은 아니지만 동창회 이름으로 벌이는 모든 행사는 사절이다. 좀 지나친 의심일지도 모르지만 모든 동창회는 ‘끼리끼리’의 단합대회를 통해 가능한 한 자기들끼리의 정보를 주고받고 하는 일종의 ‘내부자 거래’의 서식처다. 물론 동창회 조직이 흔히 벌이는 그들의 후배들에게 장학기금을 마련해 돕는 일 등은 그야말로 선한 행동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동창회의 그늘에서는 서로 간에 ‘밀당’하는 내부자 거래가 있기 마련이다. 이것도 사회를 좀먹는 세습의 일종이 아니고 무엇인가.

아마 ‘조국 사태’를 겪으면서 출간된 걸로 보이는 조귀동의 《세습 중산층 사회》에서는 세대별로 20대가 겪는 불평등을 계층 간 세습이라는 관점으로 분석하고 있다. 즉 ‘명문대 졸업장’과 ‘좋은 일자리’를 독식하는 세습 중산층 때문에 우리의 불평등 구조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며 조국 사태를 예로 들고 있다.

물론 계층 내에서의 세습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아마도 고도 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할수록 그 경쟁은 더 치열해질 것이다. ‘혈연’ ‘지연’ ‘학연’이 거대한 뿌리를 이루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학연으로 이루어진 중산층의 폐쇄적인 내부자 거래(동창회 같은 조직을 포함해)가 우리 사회를 거대한 ‘세습사회’로 만들고 있다. 이제는 동창회 조직도 사회적 세습이 아니라 좀 더 공공의 ‘숙주’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번이 마지막 칼럼이다. 그동안 어줍지 않은 글을 읽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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