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밀양인의 성공스토리’ 책으로 나왔다
  • 부산경남취재본부 김완식 기자 (sisa512@sisajournal.com)
  • 승인 2020.02.10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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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관부터 사업가·예술가들의 치열한 삶과 고향 향수 담아

재부밀양향우회가 창립 70주년을 기념해 자체 제작비를 들여가며 1년간 ‘자랑스런 향우인’을 찾아 그들의 성공적인 삶과 고향에 대한 향수 등을 채록해 책으로 펴냈다.

재부밀양향우회 현영희 회장과 회장단, ≪자랑스러운 밀양인의 성공스토리≫ 주인공 등이 케이크를 절단하고 있는 모습. ⓒ재부밀양향우회
재부밀양향우회 현영희 회장과 회장단 등 《자랑스러운 밀양인의 성공스토리》 주인공 등이 케이크를 절단하고 있는 모습 ⓒ재부밀양향우회

재부밀양향우회는 지난 7일 오후 6시30분 부산 서면 롯데호텔 크리스탈볼룸에서 스토리 주인공 11명과 향우인들을 초청해 《자랑스러운 밀양인의 성공스토리》 출판기념회를 겸한 ‘자랑스러운 밀양인의 성공스토리 북콘서트’를 열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현영희 회장은 책을 펴낸 이유에 대해 “본인 스스로 밀양인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고향을 위해 기여한 인사, 타 지역인들에게 ‘밀양인’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정도로 성공하거나 존경받는 인사를 발굴했다”라며 “그들의 성공스토리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잔잔한 감동으로 찾아 줄 것”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올해가 재부밀양향우회 창립 70주년을 맞은 해”라며 “1950년 ‘재부밀양군향친회’로 창립한 재부향우회는 회원만도 40만 명에 육박한다”고 밝혔다. 이어 “모두가 밀양인으로 자부심을 갖고 제 역할을 하며 우리나라와 지역, 고향 발전을 위해 활기차게 사회 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엔 책자에 실린 주인공들은 우리 사회에서 성공해 존경 받고 있는 인물들이 참석했다. 김신 전 대법관, 김영기 화미주 인터내셔널 회장, 박만영 콜핑 대표이사 회장, 박정진 전 부산시의회 의원, 손기창 경창산업 명예회장, 배우 손숙, 작곡가 정풍송(부산MBC 재경사우회장), 임수복 (주)강림CSP 회장, 정문흠(주)태영 회장, 한백술 주식회사 중앙카프링 대표이사 회장, 황철수 전 가톨릭 부산교구장 등이 행사에 참석해 향우인들과 함께했다. 박일호 밀양시장과 향우인 등 200여 명도 참석해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현영희 회장이 박일호 밀양시장에게 100권을 책을 전달하고 있는 모습. ⓒ재부밀양향우회
현영희 회장(왼쪽)이 박일호 밀양시장에게 100권을 책을 전달하고 있는 모습. ⓒ재부밀양향우회

경제·문화·법조·종교 각 분야에서 성공한 향우 인사 발굴

북콘스터에 앞서 현 회장은 박일호 밀양시장에게 발간된 책 100권을 전달했다. 책을 전달 받은 박 시장은 “재부밀양향우회는 매번 밀양시를 깜짝 깜짝 놀라게 한다. 밀양시가 하지 않은 부문까지 (재부밀양향우회가) 챙기고 있다”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어 “현재 밀양은 발전에 속도를 내고 있다. 머지않아 향우인들이 고향을 자랑스러워하며 찾을 수 있도록 성장동력을 끊임없는 발굴 할 것”이라고 화답했다.  

《자랑스러운 밀양인의 성공스토리》는 박용연 발간위원장(전 부산 남구선관위 사무국장)과 박혜숙·신명숙·이양수 위원이 1년 동안 노력한 결과물이다. 박 위원장은 “전국 100만여 명의 밀양인을 대상으로 경제·문화·법조·종교·사회공헌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성공한 인생 이야기를 후배들과 공유할만한 내용이 있는 선배를 발굴하는데 중점을 뒀다”고 설명했다.

그는 “1950년 한국전쟁이라는 어둡고 암울했던 시절 태동한 밀양향우회는 향우인간 나눔과 배려,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면서 고난의 긴 터널을 달려왔다”면서 “이 책은 재부밀양향우회가 창립 70주년을 역경의 환경을 성공의 삶으로 이끌어 낸 고향 인들의 발자취를 엮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수천만원에 달하는 발간 비용도 밀양향우회가 부담했다.

현영희 회장은 북콘스트를 마무리하면서 “이 책을 통해 선배들의 땀 젖은 삶의 흔적을 공유해 오늘날 우리의 삶을 환기하고, 현재를 살아가고 고향 후배들에게 꿈과 희망, 그리고 좌절 없는 생의 좌표를 제시하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이 책은 고향 밀양시와 부산시, 부신시교육청 등 관공서 도서관에 비치되고, 전국 서점에서 판매하고 있다. 

≪자랑스러운 밀양인의 성공스토리≫ 주인공들이 200여명이 향우인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북 콘스트를 진행하고 있는 장면. ©재부밀양향우회
《자랑스러운 밀양인의 성공스토리》 주인공들이 200여명이 향우인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북 콘스트를 진행하고 있는 장면 ©재부밀양향우회

북콘스트서 주인공들, 어릴적 고향 생생하게 그려내

축하 행사에 이어 진행된 북콘스트에서 11명 주인공들의 기억 속엔 고향 사천의 옛 모습이 많이 바뀌었지만 마음속에는 아직도 어릴적 고향모습이 생생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주인공들이 북콘스트를 통해 보여준 삶의 흔적을 정리했다.  

◇김신 전 대법관 “청년들과도 대화 통하는 어른으로 살고 싶다”

 “나는 나 자신만 위하고 잘난 체 하는 꼰대로 늙고 싶지 않다. 청년들과도 대화가 통하는 어른으로 살고 싶다. 가능하면 청년들이 재능을 개발하고 발휘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일을 하고 싶다. 지금도 밀양 인들과 이 일을 함께 하는 바람이다.”

내일동이 고향인 김 전 대법관은 부산고(29회)와 서울대 법대를 거쳐 1980년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하며 법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83년 부산지방법원 판사에 임명된 후 부산고등법원 판사, 부산지방법원 부장판사, 부산고등법원 수석부장판사, 울산지방법원장 등을 역임하고 2012년 대법관에 임명돼 6년 동안 근무했다. 2018년 8월 대법관 임기를 마칠 때까지 35년 6개월 동안 법관으로 근무했다. 퇴임 후 현재까지 동아대학교 석좌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김영기 화미주 인터내셔널 회장 “다르게 생각하라, 간절하게 밀어붙여라”

1960년 9월 내이동 용평리에서 2남 4녀 중 다섯째로 태어난 그는 공식 학력은 중졸이다. 가정 형편으로 열일곱 살에 소년가장이 된 후에는 머슴살이(아내는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걸 싫어한다)부터 40여 가지 일을 해야 했다. 그는 현재는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다고 했다. 부산·울산·경남권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미용산업 프랜차이즈 ‘화미주 인터내셔날 그룹’을 이끌고 있다. 70여 개 지점에 직원만 800명이 넘는다. 연간 고객 100만 명에 연매출 400억 원 전후의 알짜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일터에서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혁신할 것이 참으로 많지 않은가. 그리고 지금도 이렇게 생각한다. ‘난 할 수 있다. 난 할 수 있다. 난 정말 잘할 수 있다’라는 게 신조다.”

◇박만영 콜핑 대표이사 회장 “오뚜기 인생, 불어터진 라면이 나의 힘”

“단장면 고레에서 태어나 열아홉 살이었던 1975년 부산에서 청춘의 첫 발을 내디뎠다. 당시 부산 서면에 있던 광덕물산이란 와이셔츠 만드는 회사에 미싱 기사로 일했는데 월급이 5000원이 채 안 되는 처지였다. 방 월세가 5000원이었으니 허투루 돈을 쓸 형편이 아니었다.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기는커녕 제대로 밥도 챙겨 먹지 못할 때가 많았다. 회사에 가면 식사가 나오기 때문에 잔업이며 야근을 그야말로 밥 먹듯 했다. 어쩌다 집에 일찍 오는 날은 저녁을 거르는 일이 잦았다. 그래서 꾀를 낸 것이 라면을 끓여 저녁밥과 다음 날 아침을 한꺼번에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라면 한 개 반을 끓여 밤새 퉁퉁 불리면 아침엔 비록 떡이 됐지만 양이 제법 늘어나 주린 배를 채우는 데 조금이라도 낫기 때문이었다.” 

당시 그는 40년 후 여러 개 회사를 운영하며 연매출 3000억 원을 넘는 기업가가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박 회장은 어려운 시절 함께 고생했던 그 친구와 객지 생활을 버텨야 했던 그 시절을 회상했다. 

◇박정진 전 부산시의원 “나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다”

삼랑진 출신인 박 전 의원은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서울대학교 상대를 나왔다. “부를 쌓은 것도 아니고, 중년이 되어 뒤늦게 정치에 뛰어들었지만 ‘정치인의 꽃’이라는 국회의원이 되지도 못했다. 선거에 네 번 나가 두 번 승리하고 두 번 졌으니 명예를 누렸다 하기에는 부족한 셈이다. 살아오면서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고 할 지 모르겠다. 적어도 일반적인 눈으로 보면 그렇다.”

그는 그래도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주어진 환경에 안주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도전을 거듭해 ‘여성 최초’란 타이틀을 여럿 얻었기에 자부심을 갖는다고 했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큰 재산을 모으지도, 빛나는 명예를 얻지도 못했지만 자식들에게 주위의 젊은이들에게 자신 있게 ‘나처럼 살아라’고는 말하지 못할지언정 ‘나처럼 살아도 괜찮다’고 조언할 정도의 삶은 살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 손기창 경창산업 명예회장 “아홉 번 넘어져도 일어나 걸은 정도(正道) 가야”

손 명예회장은 1923년 음력 8월 산내면 송백리 양송정에서 위로 딸 다섯을 두고 여섯 번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으니 정말 귀한 자손이었다. 하지만 1930년 일곱 살 때 어머님을 잃었고, 1년 만에 아버지가 새 장가를 가면서 외가에서 빌려주었던 논의 상당 부분을 떼어 가버렸다. 그 바람에 하루아침에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먹고 살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이 오늘의 경창산업을 있게 했다. 

“일본에선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고 왜소한 몸으로 공장에서 일하자니 정말 말 못하는 고통이 따랐다. 고국의 동생들과 함께할 날을 고대하며 잠자리에서 눈물을 흘린 밤도 잇지 못했다. 90평생이 꿈만 같다.” 수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칠전팔기’가 아니라 ‘구전십기’의 정신으로 버텨내 지금의 손 명예회장이 있게 했다. 그는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는 후배들이 내 인생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는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고 용기를 줬다.

◇배우 손숙 “죽을 때까지 연극 무대에 서겠다”

산외면 다죽리 죽서마을로 8촌까지 모여 사는 안동 손씨 집성촌에 태어났다. 천석꾼 집안이었다는 이야기는 전해 들었으나 그가 어릴 적엔 천석은 아니라도 체면치레를 할 만큼의 땅은 물론, 안채와 사랑채 등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 하인들도 여럿 있었다. 문학소녀이던 그는 고교 3학년이던 어느 날 서울 남산드라마센터에서 미국 극작가 유진 오닐의 연극 ≪밤으로의 긴 여로≫를 접하게 됐다. 이 작품은 그의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았다. 전율이 느껴졌다. 그때부터 갑자기 모든 게 연극으로 쏠렸다. 인생의 방향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따지고 보면 반은 현실에서 반은 무대 위에서 산 것이 내 인생이다. 그러니 때론 뭐가 진짜 내 인생인지 가릴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마치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처럼 현실의 내가 나인지, 무대 위의 내가 나인지….”

◇임수복 (주)강림CSP 회장 “고개는 숙이고 남의 말은 들어라”

“1947년 삼문동에서 4남1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있는 조선소에서 엔지니어셨다. 8·15 광복을 맞아 아버지는 그동안 벌어둔 돈을 모두 가지고 귀국하셨다. 처음에는 풍족했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결국 아버지는 찹쌀떡 공장도 만들고 과자 공장도 지지만 모두 실패했다. 결국 몇 년 만에 거지 아닌 거지 신세가 되었다. 이런 형편 때문에 나는 일찌감치 돈에 눈을 떴다.”

임 회장은 부산 중구 창신동에 있는 부산우체국 소관의 저금관리국 원무과에 합격해서 학생들이 맡긴 예금 이자를 계산하는 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자기를 희생해야만 사업을 성공할 수 있다는 의미로 ‘부지런히 일하고 겸손하게 살자’를 좌우명으로 삼았다. 임 회장은 “돈을 벌기 위해서 사업을 하지만, 돈은 물과 같다. 물은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기 때문에 자기를 높이면 높일수록 물(돈)은 상대방으로 가는 것이고, 자기를 낮추면 낮출수록 물(돈)이 자기에게 온다. 때문에 겸손해야 하고, 머리를 숙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문흠 (주)태영 회장 “꿈은 용기를 낳고, 용기는 기회를 낳는다” 

“밀양에서 나고 고등학교까지 밀양에서 마친 밀양 사람이다. 고향이라 그렇기도 하지만 나는 밀양에 애착이 많다. 사업을 위해 부산에서 살고 있지만, 누구를 만나든 밀양 사람임을 알리고, 밀양 사람임을 자랑스러워한다. 가만히 되돌아보면 내 삶에는 세 번의 선택의 순간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프로스트의 시처럼 가지 않은 길을 선택했다. 그래서 어쩌면 모든 것이 달라졌고 지금의 내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부산에 민간 시티투어를 출범시킨 정 회장은 수차례 부산고용대상을 수상하는 등 부산에서 주목받는 사업가다. “꿈은 용기를 낳고, 용기는 기회를 낳는다고 믿는다. 후배들이 큰 꿈을 그리고 자신의 일에 충실히 했으면 한다.”

◇작곡가 정풍송, ‘한국의 포스터’를 꿈꾸며 

가수 조용필의 《허공》 한혜진의 《갈색추억》 등을 작곡한 정풍송 작곡가는 내일동이 고향이다. 그는 “100년이 지나도 200년이 지나도 사람들에게 감동과 아름다움을 주는 노래를 남기고 싶고, 더 나아가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명곡을 남기고 싶다는 꿈을 가슴 깊이 품고 있다”고 했다. 

그는 “기업이 한류를 이용한 문화, 상품 관광을 더욱 활성화 시키고, 한류를 통해 브랜드 가치를 높인다면, 비단 한류가 문화뿐만 아니라 제품까지 이어질 수 있는 교두보가 될 수 있다”면서 대중문화인으로서 향우 기업인들에게 조언했다.

◇한백술 (주)중앙카프링 회장 “유능한 자는 행동하고, 무능한 자는 설명한다”

1940년 무안면 신법리에서 태어난 한 회장은 결혼 후 당숙의 권유로 부산에 내려와 당숙내의 가내수공업을 돕다 1977년 자동차 부품회사인 ㈜중앙카프링을 창립했다. 중앙카프링은 기계부품 전문 기업으로 연 매출은 100억 원 대를 올리고 있다. 1980년대 경운기·버스 부품 쪽으로 회사를 특화하고, 동력 기계에 주로 쓰이는 기계부품 ‘카플링’을 국산화하면서 탄탄한 중소기업을 일궜다.

한 회장은 “1997년대 IMF 사태가 터졌지만 신용과 기술력을 앞세워 회사는 살아남았다”며 “돈보다 중요한 신용과 실력이라고 믿는다. 후배들이 주위에 믿음을 주는 사람으로 살아갔으면 한다”고 했다.

◇황철수 전 가톨릭 부산교구장 “안식년에 택시 몰던 ‘섬기는 사목자’”

1953년 부북면 지동에서 2남2녀 중 둘째, 장남으로 태어난 황 전 교구장의 집안은 6대째 천주교 신앙을 이어온 뿌리 깊은 교우 집안이다. 1983년 2월에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사제품을 받고 부산 망미동 본당에서 보좌신부로 1년간 사목활동을 한 후 3년간 망미 본당 주임신부를 맡았다. 이후 부산 가톨릭대학교 교수, 전하 본당 주임신부, 메리놀병원 관리부장, 선교사 목국장, 사무처장을 지내고 2006년 1월 부산교구 보좌 주교로 임명돼 2006년 2월 남천 주교좌성당에서 정명조 주교의 주례로 주교 서품식을 받았다. 

“보좌주교 서품식을 받을 때 안식년 때 영업용 택시를 운전하면서 손님을 모시던 심정, 그때 배운 마음으로 주교직을 수행하기로 다짐했다. 나 자신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고, 항상 그 사실에 깨어 있는 사람이 되자고 늘 마음에 되새긴다”고 전했다.

≪자랑스러운 밀양인의 성공스토리≫ 주인공들이 향우 인들에게 사인을 하는 장면. ⓒ재부밀양향우회
《자랑스러운 밀양인의 성공스토리》 주인공들이 향우 인들에게 사인을 하는 장면 ⓒ재부밀양향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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