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표현을 거부할 자유 [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 노혜경 시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2.22 16:00
  • 호수 1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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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는 자유가 아니다”

소위 지식인이라는 이름표를 이마에 붙이고 공적 매체에 글을 쓰기 시작한 지 그럭저럭 사반세기가 됐다. 그동안 내가 부여잡고 달려온 질문은 개인과 평등 공동체라는 화두다. 최근 들어 이 질문이 들어야 하는 답변의 가장 예민한 부위에 도달하고 있다는 감이 든다. 애정하는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 식의 묘사를 하자면, 유능하고 직업윤리에 충실한 의사들이 탄생했고, 수술을 잘하면 살고 못하면 죽는 환자가 등장했다. 마취는 잘했고 배는 열었고, 이제 병든 부위를 도려내고 배를 닫으면 되는데 여기저기서 배를 열기 전엔 몰랐던 출혈이 있는 그런 상황.

지금까지 나는 언제나 개인을 국가권력이 억압하는 데 반대해 왔다. 집단 대 집단이 부딪칠 땐 기꺼이 힘이 약한 편에 서고자 했다. 도덕적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강한 개인, 수는 많은데 자기 담론을 못 만들어내는 약한 집단 중에서는 후자를 돕고자 했다. 내 안의 공평감각 때문이다. 수평이 안 맞으면 어지럽다. 나는 페미니스트로 스스로를 정체화했다. 내가 여성이라서가 아니라 소수자의 편이 되고자 하기 때문이다.

ⓒ시사저널 고성준
ⓒ시사저널 고성준

‘혐오 표현을 거절할 자유야말로 자유’

정권이 여러 번 바뀌는 동안, 아직 해결되지 못한 문제가 산적해 있음에도 페미니즘이 전면으로 부상하는 것을 본다. 가히 본질적 싸움이라 할 만하다. 성별은 인간이 사회를 구성할 때 가장 핵심적인 구분이다. 구별 짓기 없이 사회는 존재하지도 지속하지도 못한다. 그 첫 번째 구별 짓기의 축이 바로 성이다. 인간의 성이 둘로 고정되어 있어서가 아니라, 둘로 고정하는 것이 세상을 이분법으로 정리정돈하기에 적합해서다. 페미니즘은 이 구분을 흔드는 데까지 발전해 왔다. 개인, 또는 한 사람 자체의 존엄이 사회가 강제하는 딱지를 넘어설 수 있는가 없는가. 구별 짓는 거 다 이해한다. 그런데 왜 꼭 그것이 약자를 혐오하고 탄압하는 방식이어야 하는가.

‘페미니즘의 분화인가’ ‘그것은 페미니즘이라 부를 수는 없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불러낸 ‘숙명여대 A씨 입학 포기’ 문제만 해도 그렇다. 이 문제는 생물학적 여성이란 무엇이냐는 논쟁으로 갈 수도 있고, 관점을 달리하면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정체성과 소망을 다른 사람들이 쪽수로 부정하거나 억압해도 되는가.

사회 또는 국가에 해롭다는 주장을 할 수는 있다. 해롭다고 소수집단을 몰아내는 것은 잘못이다. 논쟁할 자유, 힘이 아니라 말로 싸울 권리가 보장돼야 한다. 경청할 자세와 환대할 태도가 필요하다. 트랜스젠더로 인해 촉발된 질문이 나의 오랜 질문 가운데 하나를 끄집어낸다. 정치색이, 성별이, 지역이,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한 집단은 다른 집단을 혐오해도 되는가. 분리해 버려도 되는가.

이 질문은 최근 읽고 있는 이정희의 책 때문이다. 그 책의 이름은 《혐오 표현을 거절할 자유》이고, 나는 내가 질문을 잘못 구성했음을 깨달았다. 통합진보당 해산이라는 폭거는, 사상과 결사의 자유 문제가 아니라 혐오의 문제에 더 가까웠다는 사실 말이다. 물론 그 둘은 1미터쯤 아래에서는 만나지만, 그것이 같음을 평소 우리 삶에서는 잘 알아채기 어렵다. 우리가 코리아라는 공동체를 결속해 내기 위해 돌파해야 할 우리 안의 파시즘이다. 혐오 표현을 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혐오 표현을 거절할 자유가 자유다. 여기에 덧붙이고 싶다. 차별하고 배제해서 공동체의 안녕을 지킬 수 있다는 믿음은 원시적이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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