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 같은 트럼프와 샌더스의 말은 왜 다를까 [로버트 파우저의 언어의 역사]
  • 로버트 파우저 독립학자(전 서울대 교수) (jongseop1@naver.com)
  • 승인 2020.03.04 11:00
  • 호수 1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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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언어학 측면에서 본 미국 대선후보들
‘자신만의 말투’ 고수는 강한 자신감 표시

미국은 선거철이다. 공화당 쪽은 재선을 꿈꾸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후보로 지명될 것이 예상되는 탓인지 TV토론도 거의 없고, 별다른 화젯거리도 없다. 반면 민주당은 지난해 봄 20여 명이 출마를 선언하면서 역사상 가장 많은 후보가 출마한 것부터 화제였다. 출신 지역과 연령대가 다르기 때문에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유심히 들어보면 미국 영어의 변화를 저절로 파악할 수 있다.  

민주당 여러 후보 중 사회언어학적으로 내 눈길을 끈 후보는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78), 엘리자베스 워런(Elizabeth Warren·70), 그리고 피트 부티지지(Pete Buttigieg·38)다. 민주당 후보는 아니지만 트럼프 대통령(73)도 빼놓을 수 없다. 

우선 같은 뉴욕 출신인 트럼프와 샌더스의 말을 살펴보자. 흥미롭게도 이 두 사람이 쓰는 말만 들어보면 같은 지역 출신이라는 걸 알아채기 어렵다. 발음에서 매우 큰 차이를 보인다. 퀸즈의 부유한 집안 출신인 트럼프의 말은 방송이나 화이트칼라 계층에서 주로 사용하는 ‘일반 미국 영어(General American English)’와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가상의 표준어를 쓰고 있는 셈이다. 예를 들면 단어 끝에 나오는 ‘r’ 발음은 거의 예외 없이 그대로 사용하지만 말을 빨리 할 경우 단어 중간에 있는 ‘r’ 발음은 종종 생략하곤 한다. ‘understand’ 같은 단어의 ‘r’ 발음은 자주 생략한다. 모음은 뉴욕의 방언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그다지 강하지 않다.

(왼쪽)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오른쪽)버니 샌더스 미국 상원의원 ⓒAP 연합
(왼쪽)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오른쪽)버니 샌더스 미국 상원의원 ⓒAP 연합

샌더스는 트럼프보다 강한 뉴욕 방언 구사

퀸즈 옆동네인 브루클린 지역에서 태어난 샌더스는 트럼프에 비해 훨씬 강한 뉴욕 방언을 구사한다. 그는 마지막 ‘r’ 발음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단어 가운데의 ‘r’ 발음 역시 자주 생략한다. 또한 모음 역시 뉴욕 방언의 특징을 강하게 드러내는데 예를 들어 ‘huge’와 같은 단어의 첫 글자인 ‘h’를 ‘y’로 발음할 뿐만 아니라 모음 역시 뉴욕 방언을 강하게 드러낸다.

이러한 샌더스의 말투는 20세기 중반까지 브루클린에 가면 쉽게 들을 수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미국은 수많은 이민자들을 받아들였는데, 그 관문이 바로 뉴욕이었다. 브루클린에는 주로 남부 출신 이탈리아인들과 이디시어(Yiddish)를 사용하는 폴란드나 러시아 등 중동부 유럽 국가 유대인들이 모여들었다. 이디시어는 중세 이래 유대인 공동체에서 주로 사용하는 언어로 독일어에서 파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이 한 지역에 모여 살면서 브루클린의 영어는 자연스럽게 이탈리아 남쪽 방언과 이디시어의 영향을 받게 됐다. 이 지역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샌더스 역시 이러한 언어적 환경에 노출되었다. 특히 폴란드 이민자 출신인 부친의 모어가 이디시어였으니 가족끼리는 주로 이디시어를 썼을 테고, 그로 인해 그의 말투는 브루클린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사용하는 이디시어 영향을 받은 영어가 됐다.그럼 살던 곳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옮긴 이들은 어떤 말투를 쓰게 될까. 샌더스와 워런이 좋은 예다. 샌더스의 ‘브루클린어’는 약간의 변화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인 워런은 오클라호마주에서 태어나 텍사스주에서 대학을 다닌 뒤 뉴욕 옆 뉴저지주로 이사했다. 남부 지역 방언의 영향을 받은 오클라호마 출신이지만 워런은 고향 말투를 거의 쓰지 않는다. 대학 졸업 후 변호사와 법대 교수로 활동하면서 미국 주류 화이트칼라 사회에서 사용하는 일반 미국 영어에 의도적으로 맞춘 것처럼 보인다.

1947년 뉴욕에서 발행된 이디시어 신문 ⓒWikimedia Commons 제공
1947년 뉴욕에서 발행된 이디시어 신문 ⓒWikimedia Commons 제공

뭔가 이루려는 이들은 상류 방언 쓰기 위해 노력

미국 사회에서 일반 미국 영어는 ‘성공한 사람들’이 주로 쓰는 말투로 인식되기 때문에 일종의 ‘상류 방언(prestige dialect)’으로 여겨진다. 이 때문에 사회적으로 뭔가를 이룬 사람들, 이루려는 이들은 상류 방언을 쓰기 위해 노력한다. 이들 중 어떤 이들은 원래 자신이 쓰던 말투를 아예 잊어버리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때때로 사용하기도 한다. 워런은 주로 상류 방언을 쓰지만, TV토론에 나와 때로는 ‘mother’ 대신 ‘mama’, ‘father’ 대신 ‘daddy’라는 남부 방언의 단어를 쓰기도 한다. 

남은 사람은 이제 피트 부티지지다. 그의 말투는 전형적인 일반 미국 영어다. 그도 그럴 것이 오대호 지방에서 사용하는 영어가 바로 일반 미국 영어이고, 시카고는 이 지역의 대표적 도시다. 부티지지는 시카고에서 동쪽으로 150km 떨어진 사우스벤드시에서 태어나 자랐고, 이 지역 시장을 8년 동안 역임했다. 하버드대학을 나와 로즈 장학금 혜택을 받으며 2년 동안 옥스퍼드에서 공부한 초엘리트인 그는 상류층 방언이자 그 권위를 인정받는 일반 미국 영어를 사용한다. 논리적인 연설로 대중들로부터 뜻밖의 관심을 얻고 있다. 소도시 시장 출신의 30대 젊은 정치인이 이 정도의 호응을 받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매우 똑똑하고 믿음직스럽다는 인상을 주는 데는 그의 말투와 논리적인 언변이 일조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 부분에서 매우 취약한 트럼프와 대조적이라는 점도 인기를 끄는 요인이 아닐까?

사회언어학이 학문 분야로 정립해 가던 시기인 1966년, 윌리엄 라보프(William Labov·1927~)의 책 《뉴욕시 영어의 사회적 계층화》(The Social Stratification of English in New York City)가 출간되었다. 뉴욕 방언에 대해 다룬 책으로, 저자는 현장 조사를 통해 이민자 출신이 많은 서민층이 상류 방언인 일반 미국 영어에 가깝게 말하기 위해 신경을 쓰면서 노력한다고 기록했다. 최근 치러지고 있는 미국의 선거운동에서도 이런 현상은 여전한 듯하다. 워런의 말투는 사회적 성취를 위한 노력의 결과처럼 보이고, 젊은 부티지지 역시 일반 미국 영어의 ‘원어민’이지만 각별하게 신경을 쓰면서 그 말투를 무기처럼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원래부터 쓰고 있던 자신만의 말투를 그대로 쓰고 있는 샌더스와 트럼프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자신들의 말투를 고수하는 태도야말로 굳이 상류 방언에 신경 쓰지 않아도, 나아가 그런 말투를 무시해도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의 표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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