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에 달하다 [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 노혜경 시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3.07 16:00
  • 호수 1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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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진통

변동기를 살고 있다는 실감이 자주 드는 요즘이다. 시집 《극에 달하다》에서 김소연은 말한다. 우리는 모두 끝물. 끝물 과일은 반은 버려야 하지만, 끝물은 아주 달다고. 아주 달아서 자꾸 먹다 보면 썩은 과육도 한입 베어물게 되겠지. 그래서 시인은 “끝물 과일 시러”라고 어린애처럼 외치면서도 아주 달다고 마무리를 한다. 이 복잡한 심경이 아마 낡은 시대가 제 발로 못 물러가겠다고 마구 들러붙는 요즘 풍경에는 딱이다. 낡은 시대를 끌어안고 자폭이라도 해서 새 시대를 오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혁명하지 않는 한 세상을 바꾸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선거법을 바꾸는 것이다. 그 중요성은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 하여금 대연정을 제안하게 할 만큼 크다. 그 어려운 일을 20대 국회가 해냈다. 불완전하나마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함으로써 소수정당들이 의회에 진출할 계기를 마련했다. 희망사항이기는 하지만, 득표율 3%를 넘기는 정당이 10개만 나오면 국회에는 최소한 20여 명이 내는 새로운 목소리가 등장한다. 주류정치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소수자들의 목소리다.

물론 선거법이 아무리 소수정당의 등장을 기대하게 한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3%를 득표한다는 것은 백일몽에 가깝다. 21대 총선의 총 유권자는 2015년 인구 기준으로 보아도 4000만 명이 넘는다. 60%가 투표한다고 가정해도, 적게 잡아도 75만 표 이상을 득표해야 3%를 넘길 수 있다. 길 닦아 놓으면 똥차가 먼저 지나간다고, 유사종교당이 떡하니 금배지를 달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정치세력화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토머스 쿤은 유명한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세상을 지배하는 패러다임이 바뀌는 이치를 15% 법칙으로 설명하고 있다. 어떤 새로운 패러다임을 주장하는 인구가 15%를 넘어서면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 15%에 도달하기까지가 어려운 법. 새로운 선거법은 그 15%의 변화를 좀 더 수월하게 시작할 씨감자다.

12월3일 국회 로텐더홀에서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 등 야 3당 의원들이 연동형 비례대표제 촉구 연좌농성을 하고 있다. ⓒ 시사저널 박정훈
지난해 12월3일 국회 로텐더홀에서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 등 야 3당 의원들이 연동형 비례대표제 촉구 연좌농성을 하고 있다. ⓒ 시사저널 박정훈

‘새로운 꿈’을 이루기 위한 용기

며칠 전 정의당 비례대표를 뽑는 선거에 참여했다. 이번에야말로 페미니스트 정치인을 국회로 들여보낼 ‘절호의 찬스’라는 기쁨에 은근히 들뜨면서. 선거법 개정이 열어준 길은 정의당 비례대표 후보에 그치지 않는다. ‘여성의 당’이라는 당명을 지닌 여성들만의 정당이 창당을 했고, 변동기의 고개를 넘으면 필연적으로 등장하게 되어 있는 ‘페미당’이 창당을 향해 달리고 있다.

이 모든 꿈이, 미래한국당이라는 괴상한 정당과 그에 맞서서 “우리도” 비례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얼핏 보기에 절박한 논의 앞에 촛불 꺼지듯 꺼지려 하고 있다. 미래라니, 거대할 대로 거대해져서 제대로 작동하지도 않는 ‘앙시앙레짐-낡은 체제’의 시체가 거대 야당이고, 그들의 패악질을 핑계 삼는 반쯤 앙시앙레짐 정당이 거대 여당인 틈새를 얼마나 힘겹게 비집고 만든 기회인가. 페미당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야기해도 모자랄 지면에서 민주당에 “모험해 보자, 국민을 믿고”라고 말해야 하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구악들이 우수수 몰려 나온다. 극에 달했다는 증거다. 이른바 ‘옥중서신’까지 등장한다. 달콤한 썩은 끝물이다. 이거를 잘 물리치면 내일이 오고, 말려 들어가면 어제가 온다. 더불어민주당은 주권자들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믿고, 처음으로 찾아온 이 기회를 진짜 기회로 살려내 보자. 용기!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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