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디》, 시스템에 저당 잡힌 스타의 삶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4.04 12:00
  • 호수 159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주디 갈랜드와 그를 연기한 르네 젤위거

누가 그랬더라. ‘초년 출세’는 인생의 3대 악재 중 하나라고. 이는 단순히 일찍 성공하면 불행하다는 의미가 아닐 것이다. 중요한 건 성공의 빠르기가 아니라 성공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는가, 그만큼 성숙했는가의 문제다. 할리우드 스타 주디 갈랜드의 삶을 그린 영화 《주디》를 보며 그 의미를 되새겼다.

1939년 개봉한 《오즈의 마법사》는 주디 갈랜드가 부른 주제곡 ‘오버 더 레인보우(Over the Rainbow)’만으로도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판타지 뮤지컬의 고전이다. MGM 소속 아역 배우로 활동하던 주디 갈랜드는 이 작품을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당시 주디 갈랜드의 나이 열일곱. 그야말로 스타 탄생이었다.

MGM은 《오즈의 마법사》의 순수한 소녀 캐릭터로 사랑받은 주디 갈랜드의 이미지를 어떻게든 연장하려고 했다. 지독한 다이어트를 종용했고, 몸에 꽉 끼는 코르셋으로 발육을 억제했으며, 쉴 틈 없는 스케줄 소화를 위해 각성제를 삼키게 했다. 불규칙한 생활로 불면증을 호소할 땐 수면제가 어김없이 처방됐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이야기지만, 낯설지 않다. 이른 나이에 매니지먼트 산업에 편입돼 혹독한 성장기를 치른 스타들은 지금의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적지 않게 목격된다. 스타는 걸어 다니는 기업이고,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문화상품이다. 스캔들이 터지면 광고가 끊기고, 몸무게가 증가하면 드라마가 끊기고, 말 한마디 잘못하면 명성이 깎인다. 인기가 많아지고 관심이 늘어날수록 조심해야 할 것도 잃게 될 것도 많아진다. 주디 갈랜드처럼 인생을 제대로 알기도 전에 국민 여동생 혹은 아이돌 스타로 자리매김하는 경우엔 상황이 더욱 빡빡하다. 일거수일투족이 대중에게 생중계되는 상황 속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욕망은 위협을 당한다.

영화 《주디》의 한 장면 ⓒTCO(주)더콘텐츠온
영화 《주디》의 한 장면 ⓒTCO(주)더콘텐츠온

쇼 비즈니스 세계의 어두운 이면

《주디》가 주목한 것은 바로 이것. 영화는 스타 커리어가 막 시작될 무렵 주디 갈랜드가 견뎌야 했던 스튜디오의 혹독한 관리 시스템과 전성기가 끝난 후 오른 런던의 마지막 무대를 교차로 뒤섞음으로써 ‘냉정한 쇼 비즈니스 세계’의 이면을 들춘다. 루퍼트 굴드 감독은 주디의 삶을 누가 파괴했는가를, 다소 촌스러울 정도로, 직선적으로 제시한다.

제1 악당은 MGM 창업자이자 할리우드 거물인 루이스 B 메이어(리처드 코더리)다. 영화는 루이스 B 메이어가 어린 주디(달시 쇼)를 몰아세우는 장면으로 포문을 연다. “너 말고도 이 역을 맡고 싶어 하는 소녀들은 많아, 주디.” 캐스팅을 미끼로 한 협박성에 가까운 발언은 주디의 손과 발을 꽁꽁 묶어버린다. 주디를 흡사 애완견처럼 길들이려는 담당 영화사 직원은 제2 악당, 이 모든 걸 알고도 묵인한 주디 주변의 모든 인물이 공범자일 테다.

30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이어지는 47세가 된 주디(르네 젤위거)의 삶은 냉엄한 비즈니스 세계가 한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안타까운 응답이다. 주디는 두 아이와 함께 무대에 오르지만, 삶은 녹록지 않다. 아들과 딸을 부양할 돈이 없는 주디에게 전남편은 양육권을 요구하고, 아이들을 뺏길 위기에 놓이자 다급해진 주디는 런던 투어에 나선다.

런던 공연은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돈을 벌 수 있는 작업장인 동시에, 주디가 자신의 명성을 다시금 증명해 보일 기회의 장이다. 그러나 무대에 오르기 전 주디는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며 괴로워한다. 낮은 자존감과 애정 결핍, 무대에서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주디를 압박한다. 실수를 용납받지 못하고 살아온 삶이 낳은 총체적인 부작용인 것이다.

영화에서 다뤄지지 않은 30년의 세월 동안 주디의 삶은 찬란했기에, 어둠도 짙었다. 지옥 같은 스튜디오에서 벗어나고자 19세의 나이에 결혼을 선택하지만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다섯 번의 결혼과 다섯 번의 이혼. 반복되는 이별 속에서 그녀는 약물에 의존했고, 급기야 자살 시도라는 극단의 선택도 했다. 배우 커리어 관리에서 오는 불안도 컸다. 스타에게 히트작은, 뒤집어 말하면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어린 소녀 이미지로 성장한 주디 갈랜드는 이 같은 이미지에서 탈피하고자 섹시 콘셉트의 작품을 선택하기도 했으나 세간의 반응은 좋지 못했다. 술에 취해 현장에 나타나는 일이 잦아지면서, 그녀를 기피하는 영화사도 늘어갔다.

그런 주디를 잠시 재기에 성공하게 도운 작품은 조지 쿠커 감독의 1954년도 작품 《스타 탄생》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스타 탄생》은 무명에서 스타로 성장하는 여성 뮤지션(주디 갈랜드)과 스타에서 바닥으로 추락하는 남자(제임스 메이슨)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로 2018년 개봉한 브래들리 쿠퍼의 《스타 이즈 본》까지 4차례 리메이크된 바 있다.

흥미롭게도 극 중에서 한때 스타였지만 알코올 문제 등으로 경력에 흠집을 내고 업계로부터 버림받는 남성 캐릭터는 주디 갈랜드의 실제 삶과 오버랩된다. 주디는 《스타 탄생》으로 배우 인생의 정점을 찍었으나, 이러한 기회를 오래 살리지 못하고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으니 말이다.

자신을 지우고 캐릭터에 몰입하는 연기자, 르네 젤위거는 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주디》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연합뉴스
자신을 지우고 캐릭터에 몰입하는 연기자, 르네 젤위거는 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주디》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연합뉴스

주디를 완벽히 소화한 르네 젤위거

영화 《주디》는 연출적으로는 다소 맹맹하다. 전기 영화로서 다소 관습적이고, 감동을 위한 감동도 존재한다. 그런 영화에 매력을 부여하는 것은 주디 갈랜드의 실제 삶과 그런 주디 갈랜드를 연기한 르네 젤위거의 명연기다. 《제리 맥과이어》에서 ‘도로시’를 연기한 르네 젤위거에게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로 명성을 얻은 주디 갈랜드와의 만남은 어쩌면 운명이다. 주디가 세상을 떠난 해에 르네 젤위거가 태어났다는 사실이 더해져 이 운명을 더욱 극적으로 보이게도 한다.

르네 젤위거는 엄밀히 말해 자신을 지우고 캐릭터에 몰입하는 유형의 연기자다. 《브리짓 존슨의 일기》에서 완벽한 영국식 억양을 구사, 뭇 대중으로 하여금 영국인으로 오해하게 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뮤지컬 경험이 전무했던 르네 젤위거는 세간의 우려를 뒤집고 뮤지컬 영화 《시카고》에서 록시 하트라는 요염한 캐릭터를 천연덕스럽게 수행하기도 했다.

《주디》는 이러한 르네 젤위거의 능력에 크게 빚진 작품이다. 주디와의 교집합을 위해 엄청난 체중 감량을 한 르네 젤위거는, 주디의 발성과 가사 전달 방식 등을 꼼꼼하게 마스터했다. 주디 특유의 저음을 따라 하기 위해 가지고 태어난 목소리 톤을 변형하는가 하면 주디가 무대 위에서 사용한 제스처를 고스란히 흡수하는 마법도 부렸다.

물론 이러한 외부적인 요소는 주디가 겪어야 했던 심리 상태 표현을 위한 일종의 도구. 르네 젤위거는 인생의 굴곡진 비상과 추락, 인기의 허무함과 염세주의를 세심하게 표현하며, 이제껏 꺼내 보이지 않은 얼굴이 있었음을 증명해 보인다. 그런 르네 젤위거에게 올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트로피가 돌아간 건, 반박 불가한 일이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