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가 트로피 된 세상…어른들 반성해야”
  • 공성윤 기자 (niceball@sisajournal.com)
  • 승인 2020.04.03 14:00
  • 호수 1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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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일탈계가 본 일탈계 정화책…“성범죄 반드시 잡힌다는 인식 못 주면 영원히 해결 못 해”

불을 끄는 방법엔 3가지가 있다. 산소 차단, 온도 조절, 그리고 탈 물질 제거다. 불이 ‘n번방 사건’이라고 생각해 보자. 사건이 터진 뒤 수사 당국이 성착취물3 유포자를 잡는 건 첫 번째나 두 번째 방법에 해당한다. n번방의 탄생 배경인 트위터와 텔레그램을 없애는 건 세 번째 방법이다. 혹은 적어도 SNS의 불법성을 차단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SNS가 없어진다면 음란물을 척결할 수 있겠죠. 어불성설이지만.” 트위터 유저 ‘저격계’의 말이다. 그는 n번방의 단초가 된 ‘트위터 해킹 성노예’ 사건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최초의 인물이다. 저격계는 해당 사건 내용을 만화로 만들어 지난해 7월20일 트위터에 올렸다. 이는 800번 이상 리트윗(공유)됐고, 각종 온라인 게시판에도 퍼졌다. n번방에 관해 한겨레가 최초 보도한 건 그 이후인 지난해 11월이었다. 

시사저널은 3월29일과 4월1일 이틀간 트위터를 통해 저격계를 인터뷰했다. 그는 n번방 사건을 뿌리 뽑으려고 온라인 창구를 막는 방안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오염된 토양을 파헤쳐봤자 또 다른 곳에서 씨앗이 자랄 거란 주장이다. n번방 피해자들과 상담하고 고발을 주도한 트위터 유저 ‘레미저격계’(이하 레미)도 대화에 참여했다. 

레미는 “n번방 이전에 이미 소아성애와 강간 등을 다룬 야동 공유방이 있었다”고 했다. n번방과 비슷한 사건이 되풀이돼 왔다는 지적이다. 저격계는 “n번방 사건은 온라인상의 음란물 유통 창구가 보안성이 뛰어난 텔레그램으로 옮겨간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저격계’가 트위터 해킹 성노예 사건을 알리기 위해 작가를 섭외해 만들었다는 만화의 일부. 그는 이 만화를 2019년 7월20일 트위터에 올렸고, 이는 800번 넘게 리트윗됐다. ⓒ저격계 제공
‘저격계’가 트위터 해킹 성노예 사건을 알리기 위해 작가를 섭외해 만들었다는 만화의 일부. 그는 이 만화를 2019년 7월20일 트위터에 올렸고, 이는 800번 넘게 리트윗됐다. ⓒ저격계 제공

소라넷·텀블러·인스타…무대만 바뀐 일탈계

저격계는 지난 2017년부터 온라인상의 음란물 유통 실태를 지켜봐 왔다. 이게 가능했던 건 자신이 ‘일탈계’로 활동해 왔기 때문이다. 일탈계는 일탈계정의 줄임말이다. 자신의 노출 사진이나 선정적인 글을 올리는 수많은 계정을 통틀어 이렇게 부른다. 단 플랫폼을 가리지 않고 일탈계가 생겨나다 보니, 이제는 ‘일탈세계’란 뜻도 지니게 됐다. n번방 운영자 ‘갓갓’과 조주빈(25·구속)도 트위터 일탈계에서 피해자를 물색했다. 

저격계에 따르면 일탈계는 소라넷, 텀블러, 인스타그램 등 무대를 바꿔가며 계속 형성됐다. 지금은 규제가 느슨한 트위터로 옮겨왔다. 저격계는 “트위터가 음란물 규제를 강화하면 일탈계는 틀림없이 다른 무대를 찾아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미 조짐이 보인다. 그중 하나는 야한 단체 라인(네이버의 모바일 메신저), 일명 ‘야단라’다. 레미는 “야단라에선 성인이나 미성년자도 모여 성적 얘기를 나눈다”며 “SNS에 비해 쌍방향 소통과 친목이 더 잘 이뤄진다”고 설명했다. 

일탈계는 어떻게 이토록 끈질기게 유지되는 걸까. 저격계는 인간의 본능과 관련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성욕이 끓는 청춘남녀가 일상에서 탈출하는 곳이 일탈계”라며 “이성끼리 (일탈계를 통해) 만나 합의하에 성관계를 하는 부분은 문제 삼을 수 없다”고 했다.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욕구도 섞여 있다고 한다. 레미는 “섹스 영상은 헌팅 트로피고, 사람들이 여자를 사냥한 걸 자랑으로 여기는 세상”이라고 지적했다. 미성년자도 예외는 아니다.

일탈계는 n번방 사건을 계기로 도마에 올랐다. 온라인에선 “일탈계 변태들이 아무 잘못 없다고 할 수 있나” 등 비판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화살은 일탈계에서 활동했던 n번방 피해자에게도 날아갔다. 피해자들의 평소 행실이 부적절했다는 소문마저 돈다. 

저격계는 “응대할 가치도 없는 얘기”라고 선을 그었다. 이어 “문제는 일탈계에서 미성년자를 유인하는 성인들의 모럴 해저드”라고 강조했다. 레미는 “발랑 까진 아이라서 벗은 사진을 공개했을 것이란 생각은 편협한 2차 가해”라고 꼬집었다. 그는 피해자를 직접 상담한 경험을 토대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상담한 피해자들은 모두 똑같이 겁에 질린, 보호가 필요한 아이들이었다. n번방의 경우 가해자로부터 ‘부모님을 살해하겠다’는 협박을 받아 아무 데에도 알리지 못하고 우리를 찾아온다. 믿음직한 보호자가 되지 못한 어른들이 반성해야 할 문제다.” 

트위터상의 성착취물 유포 피해를 막기 위한 대응책을 안내한 포스터. ‘레미저격계’가 직접 만들어 공유했다. ⓒ레미저격계 제공
트위터상의 성착취물 유포 피해를 막기 위한 대응책을 안내한 포스터. ‘레미저격계’가 직접 만들어 공유했다. ⓒ레미저격계 제공

“고발하러 갔다 절망적 수사 환경 알게 돼”

그 ‘어른’에는 수사 당국도 포함된다. 레미는 “n번방 가해자를 고발하러 갔다가 경찰의 절망적인 수사 환경에 대해 알게 됐다”며 “수사기관은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격계는 “사이버 범죄 수사에 대한 국제 공조를 구축하고, 성범죄에 대한 형량을 높여 판결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지난해 2월 일부 해외 인터넷 사이트의 접속 차단 수위를 높였다. 보안접속(https) 등의 방식으로 불법 콘텐츠를 유통하는 곳이 대상이다. 특히 차단을 강화한 곳은 디지털 성범죄와 관련된 영상 공유 사이트다. 그러나 이 또한 근본적 해결책은 아니란 지적이 이어졌다. 

저격계는 “애초에 대비해야 할 곳을 잘못 짚었다”면서 “(n번방 사건은) 디지털 성범죄에 둔감한 경찰의 안일한 대처와 국가 차원의 교육 부재가 원인”이라고 했다. 레미는 “성착취는 성인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릇된 성인식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n번방이 언론 보도로 공론화된 지 4개월이 지났다. n번방의 뒤를 이은 조주빈은 구속됐고, 검찰은 4월2일 구속연장을 신청했다. n번방 영상 제작·유포 혐의로 검거된 피의자만 97명이다. 민갑룡 경찰청장은 “이런 악질적 범죄를 완전히 뿌리 뽑겠다”고 밝혔다. 발언이 나온 날에도 트위터 일탈계에는 성적 게시물이 올라왔다. 

레미는 “트위터에서 불법행위를 적발해 봤자 이미 (범죄자는) 도처에 널려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디지털 성범죄는 반드시 잡히고 강하게 처벌받는다는 인식이 생기지 않는 이상,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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