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세계] 우리는 주인공보다 윤리적으로 얼마나 우월한가
  • 이나미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asm@sisajournal.com)
  • 승인 2020.04.25 14:00
  • 호수 1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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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세계》에서 드러난 부부의 내밀한 심리
진실과 허위, 선과 악을 함께 안고 살아가는 윤리적 딜레마

코로나로 일자리를 잃은 이들은 밥값을 걱정하고, 환자와 의료인들은 질병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시절에, 상류층 부부들의 가짜 인생을 보여주는 《부부의 세계》라는 드라마가 인기다. 비극에는 더 통렬한 비극을 들이대는 동종요법인가? 이 드라마는 몇 개의 신선한 시각 때문에 식상하지 않아 시청자들의 눈을 고정시킨다.

우선, 불륜 그 자체를 철없고 비도덕적인 남편과 상간녀, 선한 피해자인 아내라는 공식을 떠나 심층적 심리 분석이 가능하게 만드는 플롯을 제공한다. 또 아무도 선하지 않고 정직하지도 않을 수 있다는 리얼리즘이 높은 시청률을 보이고 있음에도 막장이라는 비난을 피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일러스트 김세중
ⓒ일러스트 김세중

관계와 선악에 대한 이중적 관점

여주인공은 십대에 외도를 한 아버지와 그 사실을 알고 아마도 고의적으로 교통사고를 낸 어머니를 한꺼번에 잃은 과거를 갖고 있다. 부모에 대한 분노와 버려짐, 무너진 가정에 대한 깊은 공포를 경험했으나 이를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여성으로 보인다. 꽤 많은 시청자가 남주인공에 대해 ‘쓰레기’라는 표현을 쓰고 있으나, 그의 어머니가 한 “네가 숨도 못 쉬게 했으니, 네 탓도 있다”는 말은 임상에서 꽤 많이 들었던 말이다.

배우자가 너무 완벽하거나 강한데, 자신에게는 그런 상대와 맞설 용기나 능력이 없고 가정도 깨기 싫다면 불륜 관계에서 위안을 받을 수도 있다. 속 모르는 당사자가 아닌 다음에야 함부로 단죄하기는 쉽지 않다. 또 완벽해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다가 상대방을 힘들게 한다고 해서 이들을 병적인 완벽주의로 비난하기도 어렵다. 나름 최선을 다하려는 그들을 무슨 근거로 비난만 하겠는가.

드라마에는 다양한 윤리적 질문을 던지게 하는 조연이 다수 등장한다. 겉으로는 친구를 도와주는 척하면서 은근히 혹은 뻔히 들키게 배신하는 여의사는 ‘질투심’에 사로잡혀 대단할 것도 없는 ‘부원장’ 자리에 매달린다. 선배 남편뿐 아니라 자기 남편의 불륜도 묵시적으로 허용하는 여성에게는 “이혼녀에게는 유산을 남겨주지 않는다”는 아버지의 말이 더 강력하다.

자수성가한 여주인공과 달리 상간녀는 엄청난 재력가 아버지, 누리고 살면서도 은근히 딸을 비하하는 나르시시스트 어머니와 오이디푸스·엘렉트라 콤플렉스의 핵심을 보여준다. 아버지상을 대신하는 나이 든 유부남과의 관계는 부모에 대한 양가감정의 연상이다. 심지어 정신과 의사조차도 내담자의 어머니와 병원 외부에서 따로 만나는 등 부적절하게 행동한다. 상류층 군상들이나 가난한 젊은이들 모두 사랑과 나눔 대신 복수와 집착 같은 부정적 감정에 휘둘린다. 하지만 극의 주인공에 비해 우리가 과연 윤리적으로 얼마나 우월한지는 잘 모르겠다.

얼핏 《부부의 세계》의 주제는 불륜인 것 같지만, 필자가 읽어낸 주제는 그와 같은 윤리적 딜레마다. 우리는 진실과 허위, 선과 악을 함께 안고 살기 때문이다. 아마 그래서 입장에 따라 주인공들에게 느끼는 동일시, 감정이입이 조금씩 다른 것 같다. 상대의 불륜으로 상처를 입었다면 여주인공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복수에 공감할 것이고, 배우자에 대한 분노를 억압하고 살았다면 남편의 외도, 새 출발 후의 성공과 복수에 후련할 수도 있겠다. 폭력적인 남자를 정리하지 못했던 경험이 있다면 때리는 남자친구에게 단호해진 조연에게, 자신을 뿌리까지 뒤흔든 누군가 때문에 욱하는 심정에 파괴적인 행동을 한 전력이 있다면 아내의 끔찍한 거짓말에 폭력을 휘두르다 감옥에 간 주인공에게 공감할 수도 있겠다. 내게는 사랑이지만 남이 볼 때는 불륜이고, 내게는 응징이지만 남이 볼 때는 집착과 사악함이다.

이렇듯 관계와 선악에 대한 이중적 관점은 인류에게 ‘이야기’가 가능하면서부터 등장하는 해묵은 주제다. 아버지를 배신하고 남편·남동생·아들까지 죽인 메데이아, 남편 헤파이스토스를 속이고 전쟁의 신 아레스와 관계하는 아프로디테, 질투에 사로잡힌 아내와 끝없이 밀당하며 여자를 쫓아다니는 제우스, 아서왕을 속이고 귀네비어와 관계를 맺은 기사 랜슬롯, 첫사랑을 못 잊다 남편에게 살해당하는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피가로의 결혼이나 세빌리아의 이발사에 등장하는 바람둥이들, 불륜이라는 속고 속이는 플롯이 반복해 등장하는 몰리에르의 소극(笑劇)들이 고전적인 예들이다.

 

오래된 질문 ‘사랑이 과연 무엇인가’

그렇다면 인간의 유전자에는 일부일처제가 내장되어 있을까. 영장류들이 원래 짝을 잘 속이는 걸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근대 들어 이동성과 효율성이 가장 커서 일부일처제가 정착되었다는 설도 있다. 중세의 방랑하는 음유시인(Troubadour), 백일기도 드리는 사대부 여성들을 회임시킨 승려들은 반은 합법적인 외도 상대였다.

그럼에도 왜 여전히 일부일처제인가. 우선 자녀 문제가 있다. 이혼 후 자녀들은 정체성 갈등과 불안을 겪기 때문이다. 돈 문제도 크다. 재정적 불이익이 크다면 껍데기뿐이더라도 가정을 유지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명예와 체면도 있다. 이른바 인맥 관리가 부부관계의 진실보다 훨씬 중요한 사람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건 파괴적인 열정에 휘둘려 폭력적인 행동을 합리화하는 시각은 위험하다. 바람피운 남편의 모든 것을 교묘하게 빼앗을 수도 있고, 사랑이 죄는 아니라고 강변할 수도 있지만, 자신과 자녀의 인생을 돌이킬 수 없이 망쳐버리고 있다면 확실히 큰 죄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부부들이라고 그런 파국적 순간들이 아주 없었겠는가. 이런저런 고비마다 자신의 욕망보다는 부부라는 공동체, 더 나아가 자신들이 책임져야 할 자녀에 대한 사랑, 남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려는 건강한 자아에 기반한 윤리의식 등등으로 가정을 깨고 싶은 본능적 욕구를 참았을 것이다.

완벽한 가면을 잘 유지하고 있는 부유하고 성공한 부부들의 파국적 관계의 뒷모습을 보여주면서 드라마는 평범한 시청자들에게도 오래된 윤리적 질문을 다시 던진다. 사랑이 과연 무엇인가? 소유하고, 보여주고, 이용하는 관계가 아니라 상대방의 영혼과 자신의 영혼이 아주 깊은 데서 고요히 만나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소망해야 하는가.

그리스 신화 중 한 대목이다. 신인지도 모르고, 불쌍해 보여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을 숨겨준 대가로 신들이 필레몬 부부에게 소원이 무엇인지 물어보자 노부부는 “한날한시에 죽게 해 달라”고 청한다. 그렇게 청할 수 있었던 까닭은 어떤 대상이건 소유의 관점이 아니라 나눔과 배려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부자 남편이 빨리 죽었으면 하고 노골적으로 말하는 여성들과 아내가 죽으면 장례식장에서 돌아서서 웃는다고 말하는 남성이 많은 세상에, 진정한 승자는 필레몬 부부 같은 노부부들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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