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 ‘5·18광주민주화운동’, 그 열흘간의 기억들
  • 호남취재본부 정성환·배윤영 기자 (sisa610@sisajournal.com)
  • 승인 2020.05.17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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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어둠을 밝힌 불혹의 5·18광주민주화운동
국민저항권 정당성·무장투쟁 합법성 첫 공인
“시대를 넘어 대동세상의 일상민주주의로 나가야”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광주 금남로 거리에서 다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진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한국 민주주의에 드리워져 있던 어둠을 밝히는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5.18민주화운동이다. 5·18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18일부터 27일 새벽까지 열흘 동안,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당시 신군부 세력의 진압에 맞서 광주시민과 전남도민이 ‘비상계엄 철폐’, ‘유신세력 척결’등을 외치며 죽음을 무릅쓰고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항거한 역사적 사건이다. 특히 항쟁 기간 중 22~26일 닷새 동안은 시민들의 자력으로 계엄군을 물리치고 광주를 해방구로 만들어 세계사에서 그 유래가 드문 자치공동체를 실현하기도 했다.

‘올해는 5.18 40주년’ 5월 1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앞에서 열린 ‘모이자 연희동으로! 전두환은 사죄하라! 5·18 드라이브스루’ 집회에서 차량에 깃발이 걸려있다. ⓒ연합뉴스
‘올해는 5.18 40주년’ 5월1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앞에서 열린 ‘모이자 연희동으로! 전두환은 사죄하라! 5·18 드라이브스루’ 집회에서 차량에 깃발이 걸려있다. ⓒ연합뉴스

한국 민주주의의 분수령…‘남겨둔 마침표’

5·18민주화운동은 계엄군에 의해 진압당한 이후 한때 ‘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매도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상규명을 위한 끈질긴 투쟁으로 1996년에는 국가가 기념하는 민주화운동으로, 2001년에는 관련 피해자가 민주화 유공자로, 5·18묘지가 국립5·18묘지로 승격돼 그 명예를 회복했다. 5·18민주화운동은 한국 민주주의의 분수령이 되는 1987년 6월 항쟁의 동력이 돼 민주주의 쟁취와 인권회복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5·18민주화운동은 올해로 불혹(不惑)을 맞았지만 진실 규명은 아직 미완이다. 5·18은 국가기념일 제정으로 역사적 의미를 세우고 신군부 처벌로 사법 판단을 얻었으나 진상규명이라는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40년 동안 밝혀지지 않은 발포명령자를 찾아내고 무고한 시민들을 향해 왜 군인들이 총을 쏴야만 했는지 경위를 밝혀내야 한다. 사망사건, 집단학살, 행방불명자, 여성성폭력사건, 군 조직의 역사 왜곡과 조작 등 해결되지 못한 진실들을 규명해 내야 한다. 또 5·18이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를 받기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 마련도 과제다. 시사저널은 온전한 진실 규명과 그날의 기억을 되살린다는 차원에서 5·18기념재단의 자료를 바탕으로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했다. 

1980년 5월 금남로 ⓒ5·18기념재단
1980년 5월 금남로 ⓒ5·18기념재단

5·18의 전초인 서울역 회군

5·18민주화운동은 어느 날 갑자기 터진 일이 아니다. 그 시대적 전후 상황을 제대로 이해해야만 민주화 투쟁의 의미를 알 수가 있다. 1979년 10월 16일 ‘부·마 민주항쟁’으로부터 열흘 뒤인 10월 26일, 박정희는 부하였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의해 사망하게 된다. 군사독재에 신음하던 국민들은 박정희의 사망을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여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신군부는 국가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12·12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이에 반해 재야인사와 주요 야당의원은 ‘계엄해제와 민주화 이행’을 주장했고, 전국의 수많은 대학생은 학원의 자율화와 민주화를 요구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사회 전반에 걸쳐 분출되던 ‘80년의 봄’이었다. 1980년 5월 10일, 23개 대학 대표로 구성된 전국 총학생 회장단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 전두환·신현확 등 유신잔당의 퇴진’ 등을 담은 결의문을 포고했고, 거리시위를 계획했다. 이런 시위의 조짐을 감지한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은 북한이 남한을 침략할 조짐을 보인다는 이유로, 비상경계태세 돌입 명령을 내렸다.

대형태극기를 앞세우고 민족민주화대성회 참석을 위해 교문을 벗어나 금남로로 향하고 있는 전남대학교 교수들, 이들 뒤를 학생들이 따르며 민주주의를 위한 구호를 외치고 있다. ⓒ5·18기념재단
대형태극기를 앞세우고 민족민주화대성회 참석을 위해 교문을 벗어나 금남로로 향하고 있는 전남대학교 교수들, 이들 뒤를 학생들이 따르며 민주주의를 위한 구호를 외치고 있다. ⓒ5·18기념재단

그해 5월13일부터 민주화를 요구하는 사람들, 특히 대학생을 중심으로 거리시위를 시작했다. 5월15일 서울역 앞 집회는 그 정점을 이뤘고, 그날 밤 신현확 국무총리는 ‘시위를 그만두라’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이에 반발한 시위대는 ‘서울역 회군’을 단행했고, 야당 지도자들은 정부 측에 ‘19일까지 시국수습대책에 대한 답변을 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신군부는 5월17일 자정을 기해 전국 계엄령 확대를 시행했다. 시위는 서울뿐만 아니라 광주에서도 전개됐다. 5월14일 전남대 총학생회장이던 박관현을 필두로 대학가와 전남도청 일대에서 거리시위가 벌어졌다. 이들은 “계엄령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는 구호를 외쳤다.

 

전남대 정문 앞에서 촉발된 5·18

학교정문에서 전경과 대치하고 있는 전남대생들 ⓒ5·18기념재단
학교정문에서 전경과 대치하고 있는 전남대생들 ⓒ5·18기념재단

5월18일 계엄군은 전남대 정문 앞에서 등교를 하는 학생들을 막아 세웠다. 이에 학생들이 “계엄 해제하라” “휴교령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시위를 했으며, 이에 곤봉을 휘두르는 공수부대원들의 진압으로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거세게 항의하자 계엄군은 진압봉을 앞세워 학생들을 구타하고 연행하기 시작했다. 이를 만류하려던 시민까지도 폭행을 당했다. 등교하지 못한 학생들은 이런 계엄군의 폭력을 알리기 위해 금남로 전남도청으로 진출했다. 소식을 전해 듣게 된 사람들도 하나둘, 도청으로 몰려들었다. 이때만 해도 시민은 소극적이었고, 조직화되지 않았다.

이후 계엄군은 조금이라도 사람이 모이면 해산하라는 위협과 폭력을 가했다. 계엄군의 진압봉은 경찰의 진압봉과는 다른 형태로, 구타를 당한 시민은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계엄군의 잔인함에 분노한 시민이 계엄군의 의도와는 달리 거세지고 집단화되자, 계엄사령부는 광주지역의 통행금지 시간을 저녁 9시로 앞당겼다.

 

계엄군 증파·민주화운동 본격화

5월 19일 오후3시경 계엄군들이 금남로와 충장로로 출동, 전 지역을 들쑤셔댔다. ⓒ5·18 기념재단
5월19일 오후3시경 계엄군들이 금남로와 충장로로 출동, 전 지역을 들쑤셔댔다. ⓒ5·18 기념재단

5월19일 새벽 3시경 증파된 계엄군 공수부대 11여단 병력이 광주역에 도착했고, 오후 3시쯤 계엄군들이 금남로와 충장로로 출동해 전 지역을 들쑤셔댔다. 이에 시민의 저항은 극심해졌고, 도심 곳곳에서는 시민과 계엄군의 격렬한 대치와 충돌이 일어났다. 장갑차와 헬기까지 동원하던 계엄군은 결국 발포하기에 이르렀다. 이날 오후 4시30분께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김영찬 군은 계림파출소 인근에서 11공수여단 소속 차 아무개 대위가 시위대를 향해 쏜 M16 소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전날 계엄군에게 영문도 모른 채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던 청각장애인 김경철(당시 29세)씨도 19일에 사망했다. 김씨는 계엄군의 총탄에 희생된 최초의 사망자다. 시민들은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임동, 누문동 파출소를 방화했고,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투석전을 전개했다. 저녁이 되자 수만 명의 시민들이 ‘전두환 타도’를 외치며 시위에 나섰다.

다음날인 20일 오전 8시경, 계엄 당국에 의해 중학교와 고등학교에도 휴교령이 내려졌다. 10시 20분 경 가톨릭센터 앞에서 남녀 30여명이 속옷만 입힌 채 심하게 구타당했으며 공수부대와 시민간의 공방전이 계속됐다. 오후가 되자 도심으로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계엄군은 진압봉으로 이를 저지하려 했다. 

젊은 남녀가 금남로 2가를 지나다 공수부대가 휘두른곤봉에 머리를 맞아 피 흘린 채 끌려가고 있다.ⓒ5·18기념재단
젊은 남녀가 금남로 2가를 지나다 공수부대가 휘두른곤봉에 머리를 맞아 피 흘린 채 끌려가고 있다.ⓒ5·18기념재단

오후 6시40분경, 금남로에는 버스, 화물차, 택시 등으로 구성된 200여 대의 차량 시위대가 출현했다. 계엄군과 경찰은 최루탄과 가스로 이를 저지하고, 탑승자를 공격했다. 사람들은 노동청과 세무서로 몰려가 정부의 잔혹한 진압을 규탄했으며, 광주의 상황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방송국에 찾아가 항의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오후 9시50분경 광주 MBC건물에 불이 났다. 밤 11시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의 발포로 시민 2명이 사망했다. 이날 무등경기장을 출발한 차량시위는 계엄군의 만행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목격한 운전기사들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5월 항쟁의 최대 전환점을 가져다줬다. 

 

계엄군 집단발포→시민군의 등장→계엄군 철수

5월 20일 오후 7시경 무등경기장을 출발한 200여대의 차량시위는 계엄군의 만행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목격한 운전기사들의 용기있는 행동이었으며 5월 항쟁의 최대 전환점을 가져다줬다. ⓒ5·18 기념재단
5월20일 오후 7시경 무등경기장을 출발한 200여대의 차량시위는 계엄군의 만행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목격한 운전기사들의 용기있는 행동이었으며 5월 항쟁의 최대 전환점을 가져다줬다. ⓒ5·18 기념재단

5월21일 오전 0시35분 노동청 방면에서 군중 2만여 명이 계엄군과 공방전을 전개했다. 오전 2시18분, 이윽고 광주와 외부를 연결하는 시외전화가 두절됐다. 도심 곳곳에서 계엄군에 의해 처참히 살해된 시신이 발견됐다. 도심 여기저기 화재로 말미암은 불꽃과 연기가 피어올랐다. 새벽 4시 30분 광주 KBS건물이 불길에 휩싸였고, 오전 10시19분 광주세무서건물이 전소됐다. 이어 11시10분 대형헬기가 도청광장에 도착했으며, 12시59분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시민들이 몰고 온 장갑차 1대가 도청광장으로 진출했다. 

오후 1시경, 전남도청을 향한 시민의 물결은 더욱 거세졌고,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계엄군의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발포가 시작됐다. 오후 3시48분 공수부대원들이 도청 주변 주요 빌딩 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을 했고, 총탄에 맞은 수많은 시민들이 차례로 금남로에 쓰러졌다. 계엄군의 사격은 시신을 대열에서 끌어내고 부상자를 병원에 후송하려는 시민에게도 향했다. 광주 시내의 병원은 이송된 환자와 시신으로 넘쳐났다. 

계엄군이 진압을 위해 총기를 사용하자 시민들도 스스로를 무장하기 시작했다. 아시아자동차(현 기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 등의 차량을 확보하고 광주·전남 일대의 경찰서와 예비군 탄약고에서 무기를 꺼냈다. 무기를 확보한 시민들은 점차 ‘시민군’이란 이름으로 편제됐고 이후 금남로와 충장로에서 벌어진 계엄군과의 공방은 시가전 양상을 띠었다. 화순, 나주지역에서 무기를 획득한 시위대들이 도청 앞에서 시가전을 전개했다. 결국, 오후 5시30경 계엄군은 전남도청에서 조선대학교로 철수했다.

 

고립된 시민공동체의 ‘항전’

항쟁기간 전남도청앞 광장은 사태의 추이를 알고자 하는 시민들로 가득 메워졌고, 항쟁지도부는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를 통해 사태의 본질을 알리는 한편 시국을 성토했다. ⓒ5·18 기념재단
항쟁기간 전남도청앞 광장은 사태의 추이를 알고자 하는 시민들로 가득 메워졌고, 항쟁지도부는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를 통해 사태의 본질을 알리는 한편 시국을 성토했다. ⓒ5·18 기념재단

항쟁 나흘째인 5월22일 9시 도청광장과 금남로에 시민들이 집결했다. 군용헬기가 공중을 선회하며 ‘폭도들에게 알린다’는 내용의 전단을 살포하는 가운데 적십자병원 헌혈차와 시위대 지프가 돌아다니며 헌혈을 호소했다. 이런 가운데 시민수습위 대표 8명이 상무대 계엄분소를 방문해 7개 항의 수습안을 전달했으며 서울서 대학생 500여 명이 광주에 도착해 환영식이 거행됐다. 오후 3시58분 시체 18구를 도청광장에 안치한 채 시민대회가 개최됐다. 

도심에서 물러난 계엄군은 광주의 외곽을 둘러싸고서 광주와 전남을 오가는 시민을 향해 총을 쏘며 통행을 막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계엄군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수습대책위원회를 꾸린 광주 시민은 계엄군 대표와 만나 협의를 도출해내려 했지만,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진 못했다. 신군부는 타 지역에 광주가 ‘치안 부재 상태’인 곳이라 전했다. 이날 밤 박충훈 신임 국무총리는 “광주는 치안 부재상태”라고 방송했다. 하지만 계엄군인 공수부대가 철수한 시기의 광주는 치안부재상태가 아닌 진정한 ‘자치공동체’로 단 한건의 강도나 절도도 발생하지 않았다.

광주시내 각 동마다 부녀자들이 쏟아져나와 주먹밥을 만들거나 음식을 만들어 시민군들에게 제공했다. ⓒ5·18 기념재단
광주시내 각 동마다 부녀자들이 쏟아져나와 주먹밥을 만들거나 음식을 만들어 시민군들에게 제공했다. ⓒ5·18 기념재단

5월23일 오전 10시 경 시민 5만여 명이 도청광장에서 집회를 열었고, 학생수습위가 총기 회수작업을 시작하고 도청과 광장주변에 사망자 명단과 인상착의 벽보를 게시했다. 오후 1시 지원동 주남마을 앞에서 공수부대가 소형버스에 총격해 17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음날인 24일 오후 1시20분경 공수부대원들이 원제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게 사격했으며, 오전 8시경, 남구 송암동에서는 퇴각하던 공수부대와 전교사 사이에 오인에 의한 교전이 발생해 군인 다수가 사망하기도 했다. 이때 금남로에서 시위대를 향해 첫 실탄 발포자로 지목된 공수부대 차 아무개 대위가 사망했다. 

5월26일 새벽, 계엄군은 다시 탱크를 앞세우고 도청을 향했다. 계엄군이 화정동 쪽에서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하자 김성용 신부를 비롯한 시민 대표들은 맨몸으로 탱크의 진입을 저지하는 ‘죽음의 행진’을 감행했고, 간신히 하루를 버텨냈다. 항쟁 당시 광주는 무정부상태였지만 시민들이 구성한 수습대책위원회를 중심으로 광주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질서를 지키고 어려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지혜와 용기를 모아내고자 했다. 항쟁기간 전남도청 앞 광장은 사태의 추이를 알고자 하는 시민들로 가득 메워졌고, 항쟁지도부는 제4차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를 통해 사태의 본질을 알리는 한편 시국을 성토했다.

항쟁 당시 광주는 무정부상태였지만 시민들이 구성한 수습대책위원회를 중심으로 광주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질서를 지키고 어려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지혜와 용기를 모아내고자 했다. ⓒ5·18 기념재단
항쟁 당시 광주는 무정부상태였지만 시민들이 구성한 수습대책위원회를 중심으로 광주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질서를 지키고 어려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지혜와 용기를 모아내고자 했다. ⓒ5·18 기념재단

시민군이 전남도청을 사수한 5월21일부터 26일까지의 일주일 동안, 광주에서는 시민 자치제가 실시됐다. 전남도청 분수대에서는 매일 ‘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됐다. 궐기대회에서는 사건의 진상과 정황을 알리는 성명서와 투사회보 등의 유인물이 배포됐고, 누구나 자유롭게 발언함으로써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지혜를 모았다. 사람들은 주먹밥과 빵 등을 대가없이 나눴고, 많은 광주시민들은 부상자를 돕기 위해 헌혈을 하는 등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실천했다. 

부상자들로 초만원을 이룬 광주시내 각 병원에서 피가 부족하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광주시민들이 팔을 걷어부치고 헌혈에 앞장섰다.ⓒ5·18기념재단
부상자들로 초만원을 이룬 광주시내 각 병원에서 피가 부족하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광주시민들이 팔을 걷어부치고 헌혈에 앞장섰다.ⓒ5·18기념재단

계엄군의 재진입

항쟁 마지막 날인 5월27일 새벽 3시,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들이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했고, 광주 도심 곳곳에서는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여성의 애절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소리는 오래도록 광주 시민의 뇌리에 남아 5·18민주화운동 정신을 잇겠다는 의지와 열정을 갖게 했다. 도청을 사수해 버티기 어려울 것임을 누구나 알았지만, 많은 시민군이 도청에 남아있었다. 

광주 시내를 재장악하기 위해 서구 화정동에 위치한 ‘돌고개’를 넘고 있다. ⓒ5·18 기념재단
광주 시내를 재장악하기 위해 서구 화정동에 위치한 ‘돌고개’를 넘고 있다. ⓒ5·18 기념재단

새벽 4시경, 계엄군은 다시 도청을 향했다. 교전 시간은 1시간 남짓에 불과했고, 항쟁지도부 대변인 윤상원을 비롯한 많은 시민군이 시신으로 남겨졌다. 오전 6시 계엄군은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오지 말라고 선무 방송을 하고 7시엔 공수부대가 20사단 병력에 도청을 인계했다. 이날 전남도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머물렀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는지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당시 생명을 잃었던 많은 이들이 지금, 망월동 시립묘지 제3묘역에 안장돼 있다.

 

사태에서 혁명으로, 폭도에서 유공자로

5·18은 당시에는 독재 정권에 의해 ‘폭동, 난동, 소요, 사태’ 등으로 불릴 것을 강요받다가 80년 이후 계속적으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끈질긴 저항에 의해 이제는 ‘민주화 운동’이나 ‘민중 항쟁’ 등으로 불리고 있다. 광주민중항쟁은 불의와 억압에 대한 국민 저항권의 정당성을, 나아가 저항의 수단으로서 ‘무장투쟁’의 합법성까지 처음으로 공인 받았다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1980년 5월 29일 망월동에서 일제히 진행된 1백 29구의 장례식, ‘폭도’라는 이름으로 진실이 왜곡되고 통제되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유족들의 슬픔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5·18 기념재단
1980년 5월 29일 망월동에서 일제히 진행된 1백 29구의 장례식, ‘폭도’라는 이름으로 진실이 왜곡되고 통제되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유족들의 슬픔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5·18기념재단

5·18민주화운동은 이후 한국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전개된 민주화운동의 원동력이 됐고, 군부독재에 결정적 타격을 가한 87년 6월 항쟁의 밑거름이 됐다. 5·18민주화운동은 95년 5·18특별법으로 제정됐으며, 전직대통령이었던 전두환, 노태우 등 92명이 내란·내란목적살인죄 등으로 처벌받기까지 전 국민의 염원이 모여 5·18민주화운동 정신계승으로 이어졌다. 이 운동으로부터 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광주를 비롯한 전 국민이 보인 저항과 참여, 연대의식은 오늘날 세계 곳곳에 중요한 민주화운동 사례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중요성을 인정받아 2011년 5·18민주화운동 관련 자료들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국내적으로도 ‘5·18’은 1980년대를 지나면서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이었다. 일제강점기 시대에 ‘광복’이 시대정신이었다면 그 이후 한국전쟁의 전후 복구를 통해 ‘잘 먹고 잘 사는’ 시대정신의 시간을 지나 민주화에 대한 시대정신이 만들어진 계기가 바로 5·18민주화운동이다. 이 미완의 혁명을 통해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가 꽃을 피울 수 있었고 민주주의의 가치를 전 국민이 느끼고 실천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5·18정신은 앞으로 광장에서의 시대정신 외침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사회 곳곳에서 독버섯처럼 자리 잡고 있는 배제와 차별을 씻어내고 대동 세상을 열어가는 ‘일상민주주의’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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