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운동의 ‘권력’이 된 윤미향과 정의연 [유창선의 시시비비]
  • 유창선 시사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5.22 14:00
  • 호수 1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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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투명 회계 및 운영방식 ‘도마’… 30년 동지마저 등 돌리게 해

사람이 살다보면 화(禍)가 복(福)이 되기도 하고, 복이 화가 되기도 한다. 국회의원이 되는 복을 차지하나 했더니 이내 화가 되어 버린 윤미향 당선자의 경우도 그러하다. 국회의원 같은 자리에 가려면 먼저 자신의 주변부터 살펴봤어야 했는데 정작 가장 가까운 곳들을 보지 못한 탓이었다. ‘30년 동지’라 했던 이용수 할머니가 “속을 만큼 속았고 이용당할 만큼 당했다”는 기자회견을 할 줄 누가 알았을까.

언론들을 통해 수많은 의혹이 무차별적으로 제기됐다. 그 가운데는 과도한 억측도 많았지만, 충분히 의심을 살 만한 대목 또한 많았다. 여론의 도마에 집중적으로 오른 것은 구멍투성이 부실회계, 막대한 기부금 손실을 자초한 졸속 운영같이 주로 ‘돈’과 관련된 문제들이었다. 8억원대의 국고보조금이 공시에서 누락되는 상상하기 어려운 문제가 드러나는가 하면,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 샀다가 수억원의 손실을 입고 팔게 된 안성 쉼터는 동네 구멍가게보다 못한 주먹구구식 살림을 보여주었다. 경기도 안성 쉼터에 1억3000만원의 기부금을 사용하고서도 지출 증빙 서류들을 내지 않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회계평가에서 F등급을 받았다고 한다. 번번이 개인 계좌로 모금이 이루어지고 그 돈이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는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말한다. 자기 돈이라면 저럴 수 있었을까. 정의연이 위안부 운동에서 사실상 유일의 대표성을 갖게 되면서 다른 시민단체들은 누리지 못할 기부금과 국고보조금의 풍요를 낳았고, 그런 혜택이 돈 관리에 대한 긴장의 해이를 낳은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정의연 주최 정기 수요집회가 5월20일 서울 종로구 옛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고 있다. ⓒ시사저널 박정훈
정의연 주최 정기 수요집회가 5월20일 서울 종로구 옛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고 있다. ⓒ시사저널 박정훈

2004년에도 33명의 위안부 할머니가 비슷한 성명 내

하지만 문제는 단지 돈에 그치지 않는다. 이 할머니가 말하고자 했던 “지난 30년간의 투쟁 과정에서 나타났던 사업 방식의 오류나 잘못”에 대한 근본적인 진단과 성찰이 있어야 정의연과 윤 당선자가 선도했던 위안부 운동은 국민의 신뢰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대협에 이어 정의연이 이끌었던 30년 위안부 운동은 피해자 중심의 운동이 아니라 활동가 중심의 운동이 돼 버렸음을 알게 되었다. 시민운동에서 피해자와 활동가들의 관점 차이는 종종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위안부 운동은 피해자 할머니들의 존재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특성을 갖고 있음에도, 정작 할머니들은 소외되고 활동가 중심의 사업에 치중해 왔음이 이번에 드러났다.

이용수 할머니와 비슷한 문제제기는 이미 오래전에도 있었다. 지난 2004년, 33명의 위안부 할머니는 성명을 내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역사의 무대에 앵벌이로 팔아 배를 불려온 악당들”이라고 정대협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나선 일이 있었다. 할머니들은 그때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답시고 전국 각처에서 손을 벌려 걷어들인 성금이나 모금액이 전부 얼마입니까. 그 많은 돈 대체 어디에 사용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 뒤로도 문제들은 방치되었고, 그때 제기된 모금한 돈의 사용처에 대한 의문, 수요집회에 대한 반대, 정대협을 거쳐 정·관계로 간 인사들에 대한 불신 등이 이용수 할머니에 의해 그대로 재현되는 상황을 맞은 것이다.

물론 정의연의 활동은 피해 할머니들에 대한 생활지원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세계에 알리는 활동, 전시 폭력 방지를 위한 연대, 미래 세대를 위한 역사 교육, 연구조사 등 다양한 사업들을 정의연은 해 왔다. 정의연에 ‘생존자 복지지원’은 여러 활동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여기서 정대협과 정의연이 해 온 많은 활동이 갖는 의미를 부정할 이유는 없다. 모두가 위안부 운동을 보편적인 평화인권 운동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노력들이었다. 하지만 다른 활동들에 가려 정작 피해자 할머니들이 뒷전으로 밀려나고 소외됐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상황이 되지 못한다. 안성 쉼터를 만들었던 과정을 보면 정의연 사고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할머니들이 아니라 활동가들이었음을 읽을 수 있다.

 

운동 방식 변화 등 새 방향 고민해야 할 때

정의연과 윤 당선자를 둘러싼 논란이 확산되던 와중에 이용수 할머니의 어려운 형편에 관한 일화가 알려졌다. 사연인즉, 지난해 추운 겨울에 난방 지원을 받지 못한 이 할머니를 더불어민주당의 한 당직자가 도우러 찾아갔다는 내용이었다. 고시원을 연상케 하는 좁은 방에서 한겨울 추위에도 할머니는 이불 하나에만 의지한 채 생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난방 지원의 책임은 정부나 지자체에 있다는 설명은 이 일화의 의미를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이다. 정의연은 수십억원의 기부금과 국고보조금을 주무르는데, 안성 쉼터를 부실하게 사고팔면서 수억원대의 손실이 발생했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일처럼 처리해 왔는데, 피해자 할머니들은 그렇게 힘들게 살고 있다면 너무도 모순적인 상황임에 분명하다. 대체 시민들은, 정부는, 기업들은 누구를 보고 십시일반 정의연에 돈을 보냈던 것일까. 정의연의 활동가들이나 윤미향 당선자를 보고 그랬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기부를 하면 할머니들이 고통을 치유받고 여생을 편안하게 지내는 데 쓰일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정의연의 부실 운영에 관한 소식들에 국민이 속았다는 배신감을 느꼈던 이유는, 자신들의 기대와는 달리 정의연의 성장이 할머니들의 삶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의연의 외형과 영향력이 커지면서 활동가들이야 자신들의 신념을 실현하는 성취감을 느꼈겠지만, 정작 피해자 할머니들은 소외감을 느꼈다면 운동의 주객이 전도되고 만 셈이다.

윤미향 당선자가 위안부 운동에 30년 세월 동안 바쳐온 헌신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영향력이 점차 커지면서 정의연과 윤 당선자는 누구의 감시나 견제도 받지 않는, 위안부 운동의 권력이 되어 버렸다. 흐르지 않는 물은 썩게 되는 법, 윤미향이 곧 위안부 운동이었던 결과가 오늘 이렇게 터져 나오게 된 것이다. 정의연과 윤 당선자를 둘러싼 논란은 일본군위안부 운동이 지나온 길을 성찰하고 새로운 길을 열어가기 위한 고민을 우리 사회에 던져주고 있다. 그 고민은 단지 돈 문제에 관한 투명성 제고에 국한되지 않는다. 특정 개인의 생각이 아닌 사회적 공론의 과정을 거쳐 노선을 정립하는 문제, 이용수 할머니가 “학생들에게 증오와 상처만 키운다”고 우려했던 운동 방식의 변화, 국민을 ‘반일 아니면 친일’로 갈라치기 하는 분열적 작풍의 극복 등, 미래 세대를 위한 위안부 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고민해야 할 때다. 인간의 삶에는 흥망성쇠가 있는 법이니 개인은 부침하더라도, 평화인권 운동의 이정표가 되었던 위안부 운동은 더 나은 길을 찾아가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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