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댁은 피해자 중심주의를 몰랐지만 [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 노혜경 시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5.30 17:00
  • 호수 1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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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캔 스피크 아이 캔 크라이

학교에서 글쓰기를 가르칠 때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이 나는 두 가지다. 글의 뼈라 할 생각을 전개할 때 저지르기 쉬운 각종 오류들을 이해시키는 일. 학생들은 문법적이거나 논리적 오류 못지않게 잘못된 생각습관이 빚어내는 오류를 자주 저지른다. 왜 그것이 오류인지를 이해시키고 사용하지 않게 하는 일은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그냥 “그건 오류야”라고 해 버리면 쉽겠지만, 정신의 긴장이 풀리면 도로 습관으로 돌아가는 것이 사람인지라 오류, 즉 틀렸음을 이해시키는 일은 정말 중요하면서도 어렵다.

그다음으로 역점을 두는 일은 역지사지의 중요성을 납득시키는 것이다. 현대인이 지녀야 할 상상력의 기본이 어쩌면 역지사지다. 타인의 처지나 관점이 되어 생각하는 능력이 없으면 공존할 수 없다. 어느 순간 나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었는데, 그 이유가 점점 더 역지사지와 오류를 가르치기 힘들어서라고 말하고 싶을 지경이다.

에둘렀다. 이용수 ‘할머니’의 두 차례 기자회견이 몰고 온 소용돌이 속에서, 할머니의 말을 맥락 없이 따다가 마구잡이로 써먹으면서 정치적 물의를 만들어내는 것을 보며 그 속에 있는 두 사람이 너무 염려되었다. 당연히 이용수 할머니와 윤미향 당선인이다. 특히 이용수 할머니는 스스로 ‘위안부’라 불리는 일의 상처를 드러내면서 많은 동료 여성의 마음을 사정없이 아프게 한다.

이 일을 두고 사람들이 피해자 중심주의를 많이 이야기한다. 할머니의 말을 자구대로 잘 들어주는 게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주장부터, 피해자가 하자는 대로 다 해 주는 게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주장까지 갖은 오해가 난무한다.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지 모르겠다. 자구대로 들어주려면 그야말로 진위 검증을 해야 하는 것이고, 사실관계가 틀린 말이 나오면 피해자성을 의심받기까지 하는 일도 생긴다. 피해자의 말에 대한 깊은 오해다. 마찬가지로, 피해자 말이면 다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 또한 억지다. 피해자 중심주의가 뭔데 이렇게 말이 많냐고요. 차라리 영화 한 편을 추천하련다.

5월25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92)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5월25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92)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귀 기울이며 그들의 곁에 서 보자

여성인권운동가 이용수의 탄생 비화 같은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 등장하는 슈퍼마켓 사장님 진주댁을 기억할랑가. 나옥분 할머니가 위안부였음을 밝히고 난 후 그토록 친했던 진주댁은 나옥분 할머니를 자꾸 피하고 외면한다. 할머니는 진주댁이 자신을 더럽게 생각해서 그러는 줄 알고 몹시 상처를 받지만, 용기를 내어 나에게 왜 그러느냐고 따진다. 그때 진주댁이 했던 대사야말로 피해자 중심주의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명대사고 명장면이다.

진주댁은 그렇게 말했다. “서운해서 그랬어요. 서운해서.” 진주댁이 말하는 서운함은 나옥분이 그동안 혼자서 상처를 싸매고 살아온 것을 몰랐다는 자책이기도 하다. 매끄러운 위로의 말보다 진주댁이 보여준 날것의 분노는 훨씬 강렬한 치유로 나옥분뿐 아니라 관객들에게도 스며들었을 것이다.

“그 긴 세월을 혼자서 아유, 얼마나 힘드셨을꼬. 아프고 쓰렸을꼬”라며 우는 진주댁이 나를 울렸다. 피해자 중심주의란 진주댁이 나옥분 할머니의 마음에 들어가 그 아픔에 귀 기울이듯이 귀 기울여 듣는 것이다.

역지사지해 보는 것. 곁에 서 보는 것. 피해자라고 해서 피해당한 순간에 고착되어 살지 않는다. 나옥분 여사의 패기만만한 모습 뒤에 숨은 아픔을 어루만질 수 있는 진주댁의 역량은, 피해자를 납작하게 보는 오류를 저지르지 않고 종합적이고 총체적으로 인간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데서 오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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