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불행’ 근원 담은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 조철 북 칼럼니스트 (sec@sisajournal.com)
  • 승인 2020.08.16 12:00
  • 호수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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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직 민주주의자가 되지 못했다”

“이탈리아 철학자 프랑코 베라르디는 《죽음의 스펙터클》에서 한국 사회의 특징을 네 가지로 짚었다. ‘끝없는 경쟁, 극단적 개인주의, 일상의 사막화, 생활 리듬의 초가속화’가 그것이다. 나는 이것이 꼭 지옥의 구성 목록처럼 느껴져 섬뜩하다. 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우리가 이룬 이 엄청난 정치적·경제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아야 하나? 왜 이렇게 비참하게 굴종하며 기어야 하나? 왜 우리 아이들은 행복해야 할 유년기와 청년기를 이렇게 우울하게 지내야 하나?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한국 사회가 가진 문제를 지적해 많은 이에게 놀랄 만한 통찰과 충격을 안겨주었던 김누리 중앙대 독문학과 교수. 그가 비판적 분석과 전망을 보충 정리해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를 펴냈다. 책은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위험하고 비인간적인 노동에 내몰려 목숨을 잃은 김용균씨의 어머니가 비정한 세상을 향해 토해 낸 말 ‘우린 지금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다’로 시작한다.

“최근에 들은 말 중 가장 슬픈 말이었다. 비참한 죽음의 원인을 뒤쫓으면서 어머니는 당신의 나라를 처음으로 낯설게 보게 된 것이다. 정말이지 우리는 참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정치 민주화를 이루고, 세상이 놀라워하는 경제 성장도 거두었는데, 우리의 불행은 날로 커져만 가고 있다. 세계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 세계에서 노동시간이 가장 긴 나라, 세계에서 불평등이 가장 심한 나라, 세계에서 노동자의 죽음이 가장 빈번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그뿐 아니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아이들이 가장 우울한 나라이고, 세계에서 아이들을 가장 적게 낳는 나라이며, 세계에서 모두가 모두를 가장 불신하는 나라다.”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김누리 지음│해냄 펴냄│260쪽│1만6500원 ⓒ해냄출판사 제공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김누리 지음│해냄 펴냄│260쪽│1만6500원 ⓒ해냄출판사 제공

정권 교체해도 우리 현실이 제자리인 이유

김 교수는 한국이 거듭되는 정권 교체에도 매년 자살률 1위와 출산율 최하위라는 기록을 세우고 심각한 불평등 사회가 된 근본 원인을 혁명의 부재와 기만적인 정치 구조, 맹목적인 야수 자본주의, 분단 체제에서 찾는다.

“얼마 전 한 신문에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다. 광화문에 모여서 목이 터져라 민주주의를 외친 사람이 집에 가서는 완전히 가부장적인 아버지요, 다음 날 학교에 가서는 아이들을 쥐 잡듯이 들볶는 권위주의적 교사요, 혹은 회사에 가서는 갑질을 일삼는 상사라면, 민주주의는 어디서 하나? 이 나라에서는 ‘광장 민주주의’와 ‘일상 민주주의’가 괴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충분히 민주주의자가 되지 못한 것이다.”

김 교수는 교육 시스템과 경제 구조 등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문제를 뜯어고치지 않는 한 우리의 불행은 끝나지 않을 것이며, 더 늦기 전에 한국의 86세대가 다음 세대를 위한 제 역할을 하면서 새로운 복지와 평화의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국 사회가 질적으로 새로운 사회로 변화하지 못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86세대가 가지고 있는 일종의 도덕적 우월감이다. 86세대가 자신들의 도덕적 결단에 의해서, 또 수많은 희생을 통해서 한국 민주주의를 이만큼 진전시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진정한 의미의 상대와 싸워본 적이 없다. 그들의 상대는 언제나 외세에 기대어 기회주의적으로 사적인 이익만을 탐하는 수구 보수들이었다. 도덕적 하자가 너무나도 분명한 수구 보수 세력하고만 경쟁해 왔기 때문에 항상 도덕적으로 우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독일에서 일그러진 우리의 자화상을 보다

1989년 독일로 유학을 떠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상황을 지켜보았던 김 교수는 경쟁 없는 학교, 등록금과 생활비가 전액 무상인 대학, 이사회의 절반이 노동자인 기업 등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복지정책과 사회적 정의가 자리 잡은 문화를 독일에서 처음 마주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문제를 ‘상식적으로’ 해결하는 독일을 지켜보며 자신이, 그리고 한국의 문화와 사회 시스템이 ‘이상하다’고 느낀 그는 두 나라의 역사와 교육·정치·사회·문화를 살펴보며 그 비정상성의 수수께끼를 하나씩 풀어나간다.

“독일의 교육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민주주의 최대의 적은 약한 자아’라고 했다. 이 말이 옳다면 약한 자아를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민주주의를 할 수 없다는 얘기다. 민주주의를 하려면 구성원 하나하나가 강한 자아를 가진 성숙한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니까. 나는 이 말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가 왜 취약한지를 깨닫게 되었다.”

김 교수가 독일을 ‘거울’로 삼은 이유는, 우리와 같이 전쟁과 분단이라는 공통분모를 지녔고, 통일 이후의 인구 규모가 유사하며, 철저한 과거 청산과 사회복지, 경제 성장을 균형 있게 발전시킨 국가로서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다시 정권이 교체되었는데도 불평등, 실업, 비정규직, 재벌개혁, 교육개혁 등 여러 가지 정치적·사회적 문제들 중 무엇 하나 제대로 개혁된 것이 없다. 이제야 국민들이 깨닫기 시작했다. ‘이건 정권 교체 문제가 아니구나’라고. 문제는 바로 한국의 정치 구도가 세계에서 가장 보수적인, 극단적으로 우경화된 지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가장 보수적인 정당인 기민당이 사회적 시장경제를 실행하고 있는 데 반해, 한국에서는 진보라고 불리는 민주당조차 자유시장경제를 신봉하는 상황이 한국이 헬조선으로 빠져드는 이유를 선연하게 설명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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