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보다 더 무서운 영국의 ‘노딜 브렉시트’ 공포
  • 방승민 영국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10.14 10:00
  • 호수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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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 지지부진했던 브렉시트 전환 후 8개월, 영국 사회는 지금 새로운 환경에 적응 중

영국은 1월31일 유럽연합(EU)을 탈퇴한 후 11개월의 조정기간을 통해 EU와 미래관계 및 브렉시트 합의문 세부 사안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오는 12월31일이면 영국은 완전히 EU를 떠나게 된다. 현재 영국은 10월15일 EU와의 마지막 정상회의를 앞두고 9월29일부터 마지막 협상인 9차 미래관계 협상을 진행 중이다.

그러나 올해 초부터 지속되고 있는 코로나19 사태로 영국과 EU는 지난 8개월간 브렉시트 합의문 세부화에 큰 진전을 보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9월9일 영국 정부는 ‘국내시장법’ 입법을 추진하며 브렉시트 협상에 급제동을 걸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제안한 국내시장법은 브렉시트 유예기간 이후 잉글랜드·웨일스·스코틀랜드·북아일랜드 지역 간 국내 교역 규제를 다루며, EU 법을 대체할 공통 규율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현재 이 법안은 하원의 수정 단계인 3독회제와 최종 투표를 통과해 상원으로 넘겨졌다. 이후 상원 토론과 수정, 최종 표결을 거쳐 상원까지 통과하면 여왕의 재가를 받아 정식 법률이 된다.

이 법안에는 영국과 EU의 기존 합의문과 상충하는 내용이 담겨 법안이 공개된 후 영국 의회와 EU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이 법안은 영국 정부로 하여금 북아일랜드와 영국 본토 간의 교역 규제를 자율적으로 검토하고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한다는 점에서 큰 논란을 낳았다. 영국이 EU와 합의한 북아일랜드 프로토콜에 의하면, EU 소속 국가인 아일랜드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북아일랜드의 경우 영국 본토와는 별개로 EU 규제에 따르게 된다. 물리적 국경을 나누어 교역을 통제하는 것은 비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며, 동시에 아일랜드와의 원활한 교역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미셸 바르니에 유럽연합(EU) 브렉시트(Brexit) 협상 수석대표가 런던에서 영국과 8차 미래관계 협상을 마친 뒤 회의장을 나서고 있다. ⓒEPA 연합
미셸 바르니에 유럽연합(EU) 브렉시트(Brexit) 협상 수석대표가 런던에서 영국과 8차 미래관계 협상을 마친 뒤 회의장을 나서고 있다. ⓒEPA 연합

노딜 브렉시트 우려에 파운드 가치도 급락

그러나 이번 국내시장법에 의하면 기존에 합의된 북아일랜드 프로토콜 내용과는 달리 북아일랜드에도 영국 본토와 동일한 교역 규제 및 상품, 서비스 기준이 적용된다. 이뿐만 아니라 해당 법안은 영국 국회가 자율적으로 국내 교역 규제 및 기준을 정하고 적용할 수 있도록 한다. 동시에 영국은 이와 상충하는 규제나 법안을 무력화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다. 즉 영국이 국내시장법을 우선해 브렉시트 합의문에 따른 북아일랜드 프로토콜을 지키지 않거나, 기존 브렉시트 합의문 내용을 무력화할 수 있도록 설계된 셈이다. 이는 ‘해당 조약의 조항들은 영국 국내법에 우선한다’는 브렉시트 합의문 제4항에 정확히 위배된다.

EU는 영국 정부에 즉각적인 국내시장법 폐지를 요구했으나 영국 정부는 이를 거절했다. EU는 영국 정부가 9월말까지 해당 법안 입법 추진을 중단하지 않으면 국제소송도 불사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그럼에도 영국 정부는 법안 폐지는커녕 하원을 통과해 상원에 상정시켰고, 이에 따라 EU는 기존 입장대로 공식 통지문을 보내 법적 대응을 시작했다.

영국 내에서도 존슨 총리의 국내시장법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가 우세하다. 존슨 총리가 속한 보수당의 원로 의원들뿐만 아니라 보수당 출신의 영국 전직 총리 5명 모두 이 법안을 강력히 반대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테리사 메이 전 총리는 9월21일 하원 의회 발언을 통해 “존슨 총리의 독단적인 법안 추진은 국제사회에서의 영국의 명성과 신뢰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힐 것”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메이 전 총리와 제프리 콕스 전 법무장관을 포함한 20여 명의 보수당 의원들이 하원 최종 표결에서 기권표를 던졌다.

같은 이유로 영국 국회 수석변호사이자 법무부 사무차관인 조나단 존스 경은 사임을 통해 존슨 총리의 국내시장법에 반대 입장을 표시했다. 북아일랜드 부장관인 로빈 워커도 이번 국내시장법이 북아일랜드와 관련한 조항의 해석에 치명적인 법적 결함을 초래할 수 있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아일랜드 정부 또한 존슨 총리의 법안에 대해 ‘독단적이고 자극적인 행위’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브렉시트 유예기간 종료가 100일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 국내시장법 입법 시도로 인해 노딜 브렉시트 가능성이 높아지자 영국 파운드화 가치 또한 급락세를 보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노딜 브렉시트가 코로나19로 인한 경기 침체보다 영국 경제에 더욱 심각한 타격을 입힐 것으로 내다본다. 런던정경대의 연구에 따르면, 코로나로 인한 영국의 미래 GDP 가치 하락률은 2.1%로 예상되지만 노딜 브렉시트로 인한 GDP 하락률은 5.7%에 달한다. 또한 코로나로 평년 대비 76%까지 감소했던 GDP는 향후 3년 내 98%가량 정상 회복될 것으로 보이나, 노딜 브렉시트가 현실화할 경우 GDP는 향후 15년에 거쳐 92%까지 지속적으로 감소할 것으로 예측됐다.

 

“예상했지만…” 다가올 생활 속 불편함

유럽의 타 국가 이주 및 여행 때 늘어날 절차에 대한 영국인들의 적응도 필요하다. EU 회원국 입국 시, 그동안 생략됐던 입국 심사 과정이 대폭 추가된다. 현재까지 영국인들은 유럽을 여행할 때 해당 국가 체류기간에 유효한 여권을 소지하면 체류가 가능했고 취업·학업·거주 등에 별다른 제약이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입국일부터 최소 6개월 이상 유효한 여권을 소지해야 하고 취업과 학업 또는 업무상 출장 때에는 사전에 적절한 비자를 발급받아야 한다. 다만 EU 소속 국가인 아일랜드로의 여행은 EU 규정과는 별도로 영국과 아일랜드 간 공동여행지역협정에 따른 것이므로 기존대로 유지된다.

또한 그동안 영국인이 EU 회원국 내에서 운전할 때 영국 운전면허가 인정됐으나, 2021년 1월부터는 반드시 별도 국제면허증을 발급받아 소지해야 한다. 유럽 건강보험카드를 발급받은 영국인이 EU 국가 체류 시 해당 국가 국민과 동일하게 건강보험을 적용받을 수 있었던 혜택도 올해를 마지막으로 종료된다. 현재까지 영국 정부가 상기 보험카드를 발급해 준 영국 국민 수는 2700만 명에 달한다.

이처럼 브렉시트는 영국의 세계적 위상과 정치, 경제뿐만 아니라 영국인들의 삶 전반에 크고 작은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 10월 최종 협상을 앞두고 보리스 존슨 총리와 영국 정부가 새롭게 제시한 국내시장법이 과연 존슨 총리의 의도대로 영국을 보호하는 ‘득’이 될지, 반대로 코로나보다 무서운 노딜 브렉시트를 초래하게 될지 영국엔 또 하나의 거대한 분수령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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