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ECD 속 한국] 허물어진 약속 ‘약자부터 구한다’
  • 김종일 기자 (idea@sisajournal.com)
  • 승인 2020.10.05 14:00
  • 호수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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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 지출 순위 OECD 꼴찌에서 세 번째

불이 났을 때 누구부터 구해야 할까. 소방관이라면 임산부와 장애인, 노인과 아이 등부터 구할 것이다. 이 간단한 문답에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떠받치는 중요한 원칙과 약속이 담겨 있다. ‘위기가 닥쳤을 때 약자부터 구한다’는 대원칙은 우리가 약육강식의 정글이 아닌 공동체라는 사회에서 살고 있음을 방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질문에 2020년 한국 정부는, 한국 정치는 과연 어떻게 대답하고 있을까. 

지난 6월 광주에서 중증 발달장애를 갖고 있는 자녀와 어머니가 차량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지난 3월 제주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돌봄에 지친 가족이 자녀를 살해하고 극단적 선택을 한 비극이 발생한 것이다. 정부는 어떻게 응답했을까. 4차 추가경정예산(추경)에 ‘장애인’ 관련 직접적인 예산은 없었다. 반면에 통신비 지원 예산 4000억원이 담겼다. 역대 최대 규모라는 35조원이 넘는 3차 추경에선 발달장애인 관련 예산 30%가 감액됐다. 무려 100억원이 깎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월9일 국무회의에서 “위기가 불평등을 키운다는 공식을 반드시 깨겠다. 상생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위기 극복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한 말이 무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장애인만큼 한국에서 소외된 사회적 약자가 있을까. 우리가 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파악해 보는 일은 ‘한국은 어떤 나라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또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 

한국의 장애인 복지지출 규모(2017년 기준)는 GDP 대비 0.6%로 낮다. ⓒ연합뉴스

장애인 복지지출, OECD 평균의 1/3 수준

한국의 장애인 복지지출 규모(2017년 기준)는 GDP(국내총생산) 대비 0.6%다. OECD 평균은 1.9%다. 3분의 1에도 못 미친다. OECD 회원국 중 멕시코(0%)와 터키(0.5%)에 이은 꼴찌에서 세 번째 순위다. 미국(1.3%)과 2배, 헝가리(1.9%)와 3배, 스페인(2.4%)과는 4배 차이가 난다. 장애인 복지지출 규모 1~3위인 덴마크(4.4%), 노르웨이(4.3%), 스웨덴(4.1%)과는 약 7배의 차이가 난다. 비교 자체가 민망한 수준이다. 

장애인 관련 예산만 적을까. 한국의 공공사회복지 지출 규모(2018년 기준)는 GDP의 11.1%로 OECD 평균인 20.1%보다 절반가량 작다. 역시 멕시코(7.5%), 칠레(10.9%)에 이은 꼴찌에서 세 번째다. 일본(21.9%)과의 격차도 상당하다. 1위 프랑스(31.2%)와는 거의 3배의 차이가 난다. 

이런 현실은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머무르고 있는 이들에게 잔인한 상황을 빚어내고 있다. 최근 중증장애인들과 그 가족들은 그야말로 전쟁 같은 일상을 견뎌내고 있다. 바로 장애인들이 “현대판 고려장”이라 부르는 활동지원 연령 제한 때문이다. 

현재 시설 밖에 사는 중증장애인들은 장애인활동지원법에 따라 하루 최대 24시간까지 장애인 활동지원사의 도움을 받는다. 혼자서는 식사를 할 수도, 화장실에 갈 수도 없을 만큼 몸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지원은 만 65세까지만 받을 수 있다. 이후엔 노인장기요양보험법이 적용돼 비장애인과 동일하게 하루 최대 4시간으로 제한된 방문요양보호 서비스를 받게 된다. 병원 방문 같은 외부 활동까지 도와주는 활동지원과 달리 방문요양지원의 범위는 집 안으로 제한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정부는 예산 문제를 든다. 보건복지부는 문제 해결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과도한 재정 소요와 형평성 문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시사저널이 복지부로부터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복지부는 만 65세 활동지원 연령 제한을 폐지하면 향후 5년간 최소 1조8864억원의 예산이 필요하다고 봤다. 

장애인들과 그 가족들이 청와대 앞에서 활동지원 연령 제한에 항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文 대통령 “해법 찾겠다” 했지만 ‘깜깜 무소식’

이런 문제를 보고받은 문 대통령은 지난해 ‘국민과의 대화’를 통해 “빠른 시일 내에 해법을 찾겠다”고 했다. 대통령이 말했으니 문제는 바로 해결됐을까. 그렇지 않다. 관료들이 일하는 방식은 국민 생각과는 다르다. 부처엔 근거와 계획, 자료가 필요하다. 그래서 복지부는 올해 5억원의 예산을 책정해 연구용역을 보건사회연구원에 맡겼다. 연구용역은 대통령이 “해법을 찾겠다”고 말한 지 반년이 지난 5월에야 시작됐다. 결과는 연말에나 나온다. 문제는 시간이다. 관료들에게 꼭 필요한 이 시간은 중증장애인들에겐 죽음의 시간이다. 

중증장애인 김순옥씨는 이 문제로 활동지원 서비스를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있다. 그는 기다림에 지쳐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냈다. 현행 법률(장애인 활동지원법)에 대한 헌재의 ‘위헌’ 결정을 받아 법 개정을 이루는 게 바람이다. 아직까지 별다른 소식은 없다. 그사이 김씨는 욕창이 났다. 수술도 받았다. 인권위가 정부에 문제 해결을 촉구하며 우려했던 부분이 바로 욕창이다. 인권위는 “욕창은 한 번 발생하면 쉽게 낫지 않고 방치할 경우 발생한 부위를 도려내야 하는 심각한 상황에 이르게 된다”며 “활동보조지원이 이뤄지지 않으면 건강권과 생명권을 보장받지 못해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예산이 부족한 게 아니라 정부의 의지가 부족한 것이라고 말한다. 공공재정 혁신 방안을 연구하는 싱크탱크 ‘나라살림연구소’의 송윤정 선임연구원은 이 문제와 관련해 ‘재정 관련 의견서’를 헌재에 보냈다. 장애인 활동지원 대상 확대 여부는 재정 부담보다는 정책 방향과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이 요지다. 송 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복지부는 이 문제 해결에 5년간 총 2441억원(연평균 488억원)이 필요하다고 추계했는데 올해는 6300억원의 예산이 추가로 소요된다고 했다. 그는 복지부의 추계 기준이나 추계액이 매번 다르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오차범위를 감안하더라도 복지부의 추계는 안이하다”며 “수요자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최소한의 제도 개선 노력 등에 대한 고려가 보이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송 연구원은 “수요자 중심의 제도 설계가 필요하고 또 가능하다”며 “한국은 사회복지지출을 늘릴 충분한 재정 여력이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복지부의 장애인 활동지원 예산이 확충되면 그만큼 국민건강보험 재정 지출은 줄어들 것이다. 복지부에서 하든 건강보험에서 하든 장애인 활동보조 사업이 확대되면 그 예산액에 해당하는 수준의 사회 서비스 공공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진우 국회 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보는 “우리나라 장애인의 경제 상태는 장애로 인한 추가비용, 저임금, 고질적인 고용 불안정 등을 이유로 하여 전반적으로 소득수준이 매우 낮다는 특징이 있다”면서 “이를 근본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 장애인 복지지출 규모를 OECD의 평균 수준까지 확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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