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TV+ 야심작 《파친코》는 킬러 콘텐츠가 될 수 있을까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4.02 15:00
  • 호수 1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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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놓을지라도

《파친코(Pachinko)》라는 작품을 처음 인지한 건, 버락 오바마 전(前) 미국 대통령을 통해서다. 오바마는 연말마다 책·영화·음악 등의 추천 리스트를 발표해 오고 있는데, 그 안목이 상당해 어느 순간부터 찾아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런 오바마의 2017년 추천 리스트에서 한인 작가의 이름을 발견했다. 민진 리(Min Jin Lee). 그녀가 쓴 작품이 바로 부산 영도에서 출발해 일본 오사카를 경유, 미국으로까지 확장한 한 가문의 흥망성쇠를 4대에 걸쳐 그려낸 소설 《파친코》다. 《파친코》에 대해 오바마는 이렇게 평했다. “첫 문장부터 당신을 끌어당기는 매혹적인 책!”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작가가 “나의 주제문(thesis statement)”이라고 밝힌 저 첫 문장은 《파친코》가 지닌 일종의 태도다. 역사라는 거대한 파도가 삶을 집어삼키더라도, 그 물결에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내고자 하는 의지의 표명이 문장에 스민 것이기도 할 테다. 작가는 한국과 일본의 경계에 선 자이니치(在日·일본에 사는 한국인 또는 조선인)의 삶을 심도 있게 써내려갔고, 그들이 지닌 강인한 회복력에 주목했다. 회복과 연민의 강렬한 서사는 곧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파친코》는 2017년 북미 베스트셀러로, 뉴욕타임스와 BBC로부터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며 세계 독자들에게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삶과 한·일 관계를 알리는 다리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런 《파친코》의 가치를 알아본 독자 중에는 애플TV+도 있었다.

Apple TV+ 웹드라마 《파친코》 포스터ⓒApple TV+ 제공
Apple TV+ 웹드라마 《파친코》 포스터ⓒApple TV+ 제공

‘1인치 자막의 장벽’을 넘어라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플랫폼 후발주자로 뛰어든 애플TV+는 한국에서 기대와 달리 고전 중이다. 첫 번째 한국 오리지널 드라마였던 김지운 감독의 《Dr. 브레인》이 이렇다 할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면서, 애플TV+ 안에서도 분위기를 반전시킬 킬러 콘텐츠에 대한 갈증이 새어나오고 있었던 상황. 두 번째 한국 오리지널 시리즈 《파친코》의 성적은 애플TV+에도 중요할 수밖에 없다. 한·영·일 3개 언어가 작품 안에 녹아들었다는 점에서 ‘1인치 자막의 장벽’을 전 세계 시청자들이 얼마나 뛰어넘어 줄지도 궁금증이 이는 대목이다.

《파친코》는 미국 자본으로 만들어진 미국 작품이다. 그러나 콘텐츠를 만든 주축은 한국계다. 한국계 미국인 코고나다 감독과 저스틴 전 감독이 공동 연출한 것을 비롯해 각본가이자 총괄 프로듀서를 맡은 수 휴와 테레사 강 로우 총괄 프로듀서도 재미교포다. 김민하·윤여정·이민호 등 한국 배우 외에도 ‘박소희’라는 한국 이름을 가진 재일교포 아라이 소지, 브로드웨이에서 활약 중인 한국계 배우 진하도 참여했다. 7명의 작가진 중 4명이 한국계라는 점 역시, 이들이 한 나라의 감수성을 이해하려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보여준다.

시대 순으로 전개된 원작과 달리 드라마 《파친코》는 세 가지 시간을 쉴 새 없이 교차하며 달린다. 어린 선자(전유나)가 부모로부터 삶의 강인함을 배우며 자라는 1910년대, 청년기 선자(김민하)가 한수(이민호)와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경험한 후 선교사 이삭(노상현)과 오사카로 떠나는 1930년대, 노년의 선자(윤여정)와 손자 솔로몬(진하)이 존재하는 1989년이 갈지자로 전개된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선자의 고향인 부산, 선자의 손자인 솔로몬이 근무하는 뉴욕, 노년의 선자가 있는 일본을 오간다.

이러한 이야기의 교차는 자칫 흐름에 혼란을 안기는 단점으로 작용할 수 있으나, 연출이 시대별로 잘 정돈돼 있기에 난삽해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사투리와 영어, 일본어 등 여러 언어의 부딪힘이 역동성을 끌어올리는 작용을 하기도 한다. 배우들 또한 각자가 살아가는 시대를 물 흐르듯 타고 넘는다. “쌀 맛” 하나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길어올리는 윤여정의 노련함은 물론이거니와, 신예 김민하가 뿜어내는 기운도 상당하다. 지켜보고 싶은 배우의 발견이다.

ⓒApple TV+ 제공
Apple TV+ 웹드라마 《파친코》의 한 장면ⓒApple TV+ 제공

우리가 몰랐던 자이니치의 삶

프로덕션 디자인도 눈에 띈다. 거대한 예산을 투입하고도 그 많은 제작비를 어디에 썼는지 티가 나지 않는 작품들이 있는데, 《파친코》는 1000억원 규모의 제작비가 프로덕션 디자인 곳곳에서 그 위용을 드러낸다. 특히 1930년대 영도의 어시장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구현해 냈다. 8부작 중 3부까지 공개된 시점에서 다음 에피소드(4월29일까지 매주 금요일에 한 편씩 업로드)에 대한 기대치를 끌어올린다.

드라마 제목이기도 한 ‘파친코’는 서양의 핀볼에서 유래된 일본의 대표적인 사행성 게임이다. 일본에서 각종 차별을 당하고, 직업의 선택을 제한받았던 자이니치에게 파친코 사업은 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게임’으로 인식하면 합법이지만 ‘도박’으로 바라보면 불법인 회색지대에 놓인 파친코는, 일본과 한국의 경계에 놓였던 자이니치의 그것과도 퍽 닮았다.

재미교포인 이민진 작가가 재일교포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된 출발지는 1989년 예일대학교 강연이다. 조선계라는 이유로 집단 따돌림을 당하다 투신자살한 일본 중학생 이야기를 들은 이민진 작가는 훗날 자신의 인생을 바꿀 소설 초안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의 방향이 바뀐 건 2007년. 일본계 미국인 남편을 따라 도쿄로 이주해 4년간 거주하면서 자이니치를 직접 취재한 작가는 초고를 지우고 다시 책을 써가기 시작했다. 하나의 책이 나오기까지 그렇게 30년 가까운 시간을 품었다. 그 시간은 자이니치의 삶을 이해하려 노력한 시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미국 자본’으로 ‘한국계 창작자’들이 머리를 맞대 만든 ‘자이니치의 삶’이란 점에서 《파친코》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콘텐츠다. 우리와 같은 피를 나누고 있지만, 잘 모르고 지냈던 자이니치를 정면에서 바라본 드라마라는 점에서 각별하기도 하다. 자이니치는 멀리 있는 것 같지만, 생각처럼 멀리 있지 않다. 당장 떠오르는 건 2020 도쿄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유도 선수 안창림이었다. 일본의 귀화 유혹을 뿌리치고 태극마크를 단 안창림은 ‘자이니치에 대해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게 하는 것도 선수인 자신의 사명’임을 여러 차례 밝혀온 인물. 안창림을 비롯한 많은 자이니치가 왜 일본에서 차별받으면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려 하는가. 《파친코》는 그에 대한 답을 4대에 걸친 가족과 그 주변인들의 투쟁의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준다.

뒤늦게 소설 《파친코》를 둘러보다가 멈춰선 구절이 있다. “자신의 존엄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과 살아가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구절이었는데, 비단 이민자들을 향한 말로만 들리지 않았다. 지금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말처럼 다가왔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향한 공격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가 기이하게 끓어오르고 있는 지금 우리 사회에 ‘파친코’는 묻는 듯했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용기를 내야 한다고. 좋은 소설은 이렇게 보편적 함의를 가지고 시대를 건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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