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열된 미술시장에 일침을 가하다
  • 반이정 미술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9.06 13:05
  • 호수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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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시장 쏠림의 대척점에서 차분히 진행된 두 전시 주목

지난해 최고 수익을 기록했던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키아프)가 올해 9월 세계 3대 아트페어로 꼽히는 《프리즈》와 최초로 공동 개최된다. 이를 두고 서울이 아시아 최대 미술시장으로 뜰 거라는 호들갑스러운 보도도 잇따랐다. 작년부터 부상한 시장 편향의 미술 현상을 두고, 필자는 실험미술과 비엔날레가 주도했던 시절이 지면서 격세지감을 느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아트페어는 장르적 사유를 존중하고 관객의 기대치를 크게 벗어나진 않는다. 때문에 대개 조각은 조각답고, 회화는 회화다운 규범을 따른다.

시장가치의 반대편에서 미술 장르의 고정된 분류를 의심하고 동시대 미술의 전개도를 사유하는 전시가 아트페어를 앞두고 열렸다. 권오상, 최하늘의 2인전 《나를 닮은 사람》과 오민 개인전 《노래해야 한다면 나는 당신의 혁명에 참여하지 않겠습니다》는 두 개의 독립된 전시지만 같은 기간(2022년 8월23일~10월2일) 일민미술관에서 열렸다.

오민 《노래해야 한다면 나는 당신의 혁명에 참여하지 않겠습니다》 포스터와 권오상, 최하늘 《나를 닮은 사람》 포스터ⓒ반이정 제공

쉽게 주조 가능한 우레탄폼·레진·피규어 등 사용

‘돌과 금속을 재료로 중량감 있게 공간의 부피감을 과시하는 조형물.’ 조각에 대한 장르적 사유는 이렇다. 구체적인 대상이나 공동체가 숭앙하는 위인을 도심에 영구불변하게 세우는 것도 조각이 흔히 기억되는 방식이다. 《나를 닮은 사람》에서 조각을 전공한 권오상과 최하늘은 지금 주류 미술판에서 주목받는 작가들로서, 종이와 스티로폼 심지어 스펀지처럼 푹신푹신한 재료로 부피 큰 작품을 내놓거나, 종량제 쓰레기봉투처럼 평범한 주변 사물을 조각으로 재현한다. 최하늘의 작품 《버젓이》는 그 어떤 것도 모방하지 않는 2m 가까운 높이의 무정형 스펀지 덩어리다. 스펀지 표면의 반짝반짝한 회색빛은 기원전부터 조각의 주재료로 자리한 육중한 대리석이 21세기 미감에 수용되면서 변화한 미적 반전 같기도 하다.

최하늘의 스펀지 작업과 권오상의 고양이 도상이 있는 전시 전경ⓒ반이정 제공

2000년 초반 무렵 무거운 조각 재료를 버리고 동시대의 주류 매체인 사진으로 입체 구조물의 피부를 입히며 떠오른 권오상은 20세기 초 현대 조각가 브랑쿠시의 《잠자는 뮤즈》나 동양의 석불 두상 같은 조각의 규범을 예의 스티로폼 골격에 사진을 이어 붙여 경량화된 사이즈로 내놓았다. 좌대 위에 고양이 머리를 얹은 《세 망령들 – 고양이 좌대》나 연예인 유아인의 상반신을 딴 《Y의 흉상》 같은 권오상의 또 다른 작업은 오늘날 실재적인 숭상과 취향의 대상으로 떠오른 고양이와 대중 스타를 주제로 가져와, 육중한 조각 재료에 눌려 있던 현실의 취향에 숨통을 뚫어 줬다.

유아인의 상반신 딴 권오상 《Y의 흉상》ⓒ반이정 제공

두 작가처럼 보존성에 개의치 않고 쉽게 주조할 수 있는 우레탄폼, 레진, 시중에서 파는 피규어 등을 조각 재료로 택하는 세대가 미술계에 주류로 등장했다. 이런 세대 변화를 정리한 전시가 북서울미술관에서 8월 중순까지 열린 《조각충동》이었다. 조각예술의 두드러진 변화는 재료의 경량화나 범상한 사물의 재현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일상품인 남자 소변기를 예술작품으로 제시한 뒤샹의 출현을 현대미술의 시작점에서 평하는 데서 보듯, 예술의 세대교체는 앞세대가 고정한 규범을 고의로 파괴하고, 예술과 생활의 위계를 납작하게 평준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나곤 했다.

‘노래해야 한다면 나는 당신의 혁명에 참여하지 않겠습니다’라는 결기가 밴 문장을 개인전 제목에 쓴 오민의 주 전공은 피아노였다. 후일 디자인을 공부했지만 순수 미술계에 있던 이는 아니었다. 그런데 작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후보에 지명될 만큼 동시대 미술의 비중 있는 지각변화에 예시될 만한 미술가가 되었다. 미술가는 대개 말을 못한다. 그 점에 관해선 필자가 본지(1712호)에서 “미술이나 연주 음악 같은 비언어적 예술을 언어로 풀이하는 일을 비평이라 할 때…(중략) 비평이 언어와 이성의 기능을 관장하는 대뇌피질의 영역에 가깝다면, 언어로 풀이하기 어려운 어떤 종류의 미술은 말이 통하지 않고 신속하게 직감으로 반응하는 편도체의 영역에 가깝다”고 빗댄 바 있다.

맥락은 달랐지만 이와 유사한 주장이 오민의 영상작품 《포스트 텍스처(Post-Texture)》에서 독일 미술가 카타리나 그로스의 고백을 인용하면서 나오는 걸 봤다. 건축과 조각, 회화 등 다매체 작가 카타리나 그로스가 회화에 몰두하던 때, 글을 읽을 수 없었다는 고백으로 글은 선형적인 데 반해 회화는 비선형이어서 글을 읽지 못한 것 같다는 취지다. 《포스트 텍스처》는 52분 분량의 영상물로, 오민이 지금의 미감각에 도달하게 된 경위를 음악사, 나아가 예술사의 전체 지형도와 진행 방향에 대한 그녀의 해석을 강연 형식으로 풀어냈다. 작품이면서 영상으로 재구성한 작가노트이기도 하다. 짧지 않은 길이지만 비슷한 고민을 했던 관객에게라면 특히 앎의 쾌감과 지적 후련함을 주는 몰입도 높은 영상물이다.

《포스트 텍스처》에 따르면 종래 음악사, 나아가 예술사는 선형성 조화 완결을 궁극적으로 추구했고, 그에 따른 위계를 지켰단다. 중세에서 현대로 진행되면서 배음열은 차츰 파기되는 게 그 사례다. 이런 비선형적, 비위계적 흐름은 음악에선 존 케이지처럼 화성을 고려하지 않고 우연성에 비중을 둔 현대음악 작곡가로 나타났고, 무용에선 우연과 즉흥성을 인체에 도입한 머스 커닝엄으로 나타났으며, 영화에선 누벨바그 영화의 서사를 절단하는 화면 편집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미술에서야 기성품을 작품의 재료로 쓰는 비일비재한 사례가 지금 충분히 많다.

오민 작가
오민 작가ⓒ반이정 제공

예술의 세대교체 가속화

요약하면 동시대 감각은 종래의 선형과 조화와 통합을 지향하는 미감과 어울리지 않게 되어, 악보에 담을 수 없는 일상의 이질적인 소음을 엄연히 예술로 흡수했다. 그 결과, 소리 움직임, 이미지의 조화로운 통합을 지향한 종래 예술(그 정점으로 오민은 바그너의 총체예술을 예로 든다)의 규범을 따르지 않고, 각기 다른 감각이 서로 독립적인 성질을 유지하면서 위계 없는 작업으로 귀결된다는 것. 또 그것이 그녀의 미학이자 지금까지 그녀의 작업 전개도라는 논리였다. 오민은 위계 없는 예술이 또 다른 위계가 될 수 있다는 위험의 여지를 남겼는데, 이 지점은 필자가 거리 미술가들이 어느 날 셀럽으로 부상한 현상을 다루며 꺼낸 ‘성공의 역설’(본지 1713호)과 결이 다르지 않다.

시장 친화적인 미술 쏠림의 정점을 찍는 9월에, 고정된 장르와 위계에 반하는 선언문 같은 작업은 지적 쾌감을 주는 해방구와 같았다. 한데, 위계를 벗어난 새로운 ‘덩어리 감각’ 실험의 미적 효과는 무엇일지에 대한 답도 필요하리라 본다. 예술이란 수용자의 감상 단계에서 매듭지어질 텐데, 창작의 배후에 완벽한 논리가 전제된다 한들, 선형적 감식안과 위계에 따른 분류법에 최적화돼 진화한 게 인류인 점에선 예술 전문가건 비전문가건 다르지 않으니 말이다. 다시금 성공의 역설 얘기이기도 하나, 주류와 비주류 사이의 길항으로 삶은 선형으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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