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화려한 뮤지컬 무대를 보고 싶다면 《물랑루즈!》
  • 조용신 뮤지컬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1.19 10:05
  • 호수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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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개봉 17년 만에 무대 뮤지컬로 재탄생…70여 곡의 팝송뿐 아니라 화려한 캉캉춤도 등장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2011)에 등장하는 아드리아나는 1920년대 파리에 살고 있다가 갑자기 온 세상이 예술과 낭만이 꽃피는 ‘벨 에포크(belle epoque)’ 시대로 시간 이동하게 된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끝난 1871년부터 1차 세계대전 발발 전인 1914년 사이로, 전쟁과 전쟁 사이의 휴지기와 세기말이 겹치며 잠시 주어진 일종의 보헤미안 시대다. 아드리아나는 몽마르트에 위치한 빨간 풍차라는 뜻의 카바레 클럽 ‘물랑 루즈’에 들어가 노래와 춤을 즐기고 한 화가를 만나는데, 그의 이름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이다.

당시 물랑 루즈의 댄서와 손님들을 많이 그린 화가로 사교계의 중심에 있었던 로트렉은 같은 시대를 다룬 영화 《물랑 루즈》(2001)에도 등장하는데, 런던에서 온 시인이자 남자 주인공 크리스티앙(이완 맥그리거)을 극단에 영입한 뒤, 물랑 루즈에서 무대 쇼를 함께 만드는 인물로 나온다.

뮤지컬 《물랑루즈》 무대 한 장면 ⓒCJ ENM 제공
뮤지컬《물랑루즈》 무대 한 장면© CJ ENM 제공
뮤지컬 《물랑루즈》 무대 한 장면 ⓒCJ ENM 제공

파리 바깥에서 파리를 재해석한 로맨스 오락물

《물랑 루즈》의 줄거리는 자유와 예술을 찾아 파리에 온 영국 시인(무대 버전에서는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크리스티앙이 카바레 ‘물랑 루즈’의 최고 인기 가수 겸 댄서 사틴을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지지만, 재정 위기에 빠진 카바레를 후원하는 조건으로 사틴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몬로스 공작과 대결을 벌이는 삼각 러브 스토리다. 오페라 《라트라비아타》에서 사교계의 뭇 남성 귀족들에게 가짜 사랑을 파는 여인 ‘비올레타’와 그런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귀족 청년 ‘알프레도’의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와 흡사하며 비올레타와 사틴 모두 폐병으로 죽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당시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쉽게 발견되는 통속 소설의 주요 소재로,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 이야기와 신파로 귀결되는 엔딩을 일부러 취함으로써 시대성을 갖게 만든 의도적인 설정이다. 특히 크리스티앙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음악의 신 ‘오르페우스’ 캐릭터와도 유사해 상대역 ‘에우리디케’에 해당하는 사틴이 그의 뮤즈라고 볼 수 있다. 가난한 예술가들이 돈에 쪼들리는 설정은 오페라 《라보엠》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물랑 루즈》는 과거의 찬란했던 시대를 배경으로 현대적인 감성을 가미한 사랑 이야기다. 호주 영화감독이 이끄는 호주 자본과 미국 영화사 20세기 폭스의 합작인 데다, 남녀 주인공도 각각 영국과 호주 배우들이다. 파리 바깥에서 파리를 재해석한 로맨스 오락물인 것이다. 영화는 크게 흥행했고 그 안에 들어간 노래들도 화제였다. 뮤지컬을 위해 새로 작곡된 곡은 단 한 곡뿐이었고, 나머지 모든 곡은 동시대 영어권 팝송 모음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몇몇 장면에서는 믹스 앤 매치(Mix & Match) 혹은 매시업(Mash-Up) 방식으로 여러 곡에서 필요한 부분만 짜깁기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했다.

새로운 영화를 보다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곡들이 나오면 갑자기 스토리에 대한 집중을 잃을 수도 있지만 창작진은 오히려 그것을 코믹의 요소로 활용했다. 크리스티앙은 사랑의 불멸함을 믿는 예술가이고, 사틴은 카바레에서 인기와 실력을 갖춘 가수 겸 댄서이기에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마다 사랑이라는 소재를 형상화해 보여주는 무대가 될 수밖에 없다. 관객들은 그 히트 팝송들로 인해 보다 유머러스하고 친숙한 로맨스 서사를 느낄 수 있다. 형식 면에서도 뮤지컬 《시카고》가 단막극으로 이어지는 보더빌 쇼 형식을 갖추고 있듯이 《물랑 루즈》도 장면마다 이를 이끄는 주요 팝송들이 주인공이 돼 서사가 있는 정교한 버라이어티 쇼 양식을 취하고 있다.

영화가 나온 지 17년 후인 2018년 《물랑 루즈》는 드디어 무대 뮤지컬로 처음 만들어져 미국 보스턴에서 첫 공연을 가졌고, 이듬해 브로드웨이에도 진출했다. 런던 웨스트엔드에서도 팬데믹을 뚫고 2021년 개막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첫 라이선스 공연이 지난해 12월 서울에서 개막해 순항 중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원작 영화가 큰 인기를 끌었고, 영화에 등장한 1970~90년대의 히트 팝송들도 인기가 많았다. 엘튼 존의 《유어 송》은 사랑의 주제가로 쓰였고 유일한 오리지널 창작곡 《컴 왓 메이》도 주제를 드러내는 대표곡이었다. 여기에 무대 버전 창작진은 17년 사이에 나온 2000~10년대 히트곡을 대거 추가했다.

뮤지컬 《물랑루즈》 무대 한 장면 ⓒCJ ENM 제공

CJ ENM이 브로드웨이 기획 초기부터 투자

무대 버전은 크리스티앙보다 사틴의 캐릭터가 강화됐다. 전담 코러스 ‘레이디 M’을 비롯해 화려한 쇼가 자주 연출되며 사틴이 카바레 무대에 등장하는 모든 장면을 멋지게 받쳐준다. 영화가 ‘물랑 루즈’의 위기를 상징하는 다소 음울하고 서글픈 곡으로 오프닝 공연을 시작했다면, 무대 버전은 화려한 앙상블들이 벌이는 첫 곡 《레이디 마말레이드》로 화끈한 오프닝을 장식한다.

1막이 주로 주인공들의 만남과 사랑의 시작이라면 2막에서는 사랑의 위기가 닥쳐오고 이와 대비되는 조연과 앙상블들이 재미를 주는 장면들이 보더빌 쇼처럼 이어진다. 여기에 쓰이는 곡들은 레이디 가가의 《배드 로맨스》, 시아의 《샹들리에》, 아델의 《롤링 인더딥》 등 2010년대 여가수 디바들의 무게감 있는 히트곡이 많이 추가된 게 특징이다. 무대 버전에서 한 소절이라도 쓰인 팝송들만 70곡이 넘고 《물랑 루즈》의 상징인 캉캉춤까지 선보이는 등 현재 한국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중에서 가장 화려한 무대를 선보인다.

관객들은 이미 극장에 입장하는 순간부터 붉은색 대형 하트로 겹겹이 놓여 있는 중앙의 아치 무대 장치와 극장 전체를 휘감은 화려한 장식에 깜짝 놀라게 된다. 무대 왼쪽에는 ‘물랑 루즈’의 뜻인 커다란 빨간 풍차가 설치돼 있고, 오른쪽에는 극 중 사틴의 분장실이자 사랑의 공간인 코끼리 방을 상징하는 코끼리 장식이 위치해 있다. 바즈 루어만 감독이 원작 영화를 처음 만들 때 볼리우드 뮤지컬에 자주 등장하는 인도 코끼리 장식에서 힌트를 얻었다. 영화에는 실제로 코끼리 장식이 자주 등장한다. 아예 카바레 극중극도 인도 소재 쇼라는 설정이다. 무대 버전으로 오면서 극중극이 인도가 아닌 프랑스 연극으로 바뀌었지만 코끼리 장식은 영화에 대한 오마주로 여전히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한국판 《물랑 루즈》인 《물랑루즈!》는 CJ ENM이 브로드웨이 기획 초기부터 투자했을 뿐 아니라 공동 제작사이기도 하다. 주인공 크리스티앙 역에는 홍광호와 이충주가 열연 중이다. 뛰어난 가창력의 두 배우 모두 순박하면서 사랑에 빠진 주인공을 잘 연기한다. 사틴 역으로는 믿고 보는 아이비와 김지우가 훨씬 강력해진 여주인공 캐릭터를 소화해 낸다. 어느 배우 조합을 볼까 고민하지 않아도 화려한 쇼와 함께 진정한 사랑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하는 즐거운 관극 경험이 돼준다. 공연은 3월5일까지.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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