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러시아-우크라 전쟁’ 아닌 ‘바그너-우크라 전쟁’
  •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3.19 08:05
  • 호수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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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병 바그너그룹, 러시아 2023년 춘계 대공세에 선봉장 역할
목소리 커진 바그너 수장 프리고진에 푸틴과 러시아군 ‘쩔쩔’

우크라이나 북동부 바흐무트에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격전을 벌이면서 이를 주도하는 용병부대 ‘바그너그룹’(러시아어로 그루파 바그네라)과 그 수장인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바그너그룹은 흔히 민간군사기업(PMC)으로 불리지만, 실상은 러시아군 총참모국 산하 군사정보국(GRU)이 운용에 깊이 개입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비밀스러운 손’으로도 불린다.

AP통신은 바그너그룹이 지난해 9월 이후 교착상태에 빠진 돈바스 지역(도네츠크주+루한스크주)에서 새로운 전투에 불을 댕기는 시동모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영국 BBC 등에 따르면 우크라이나가 지난해 9월 대반격으로 동부 대도시 하리키우와 인근 지역을 탈환한 이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돈바스 서부에서 참호전을 펼치며 대치해 왔고 전선은 소규모 접전 외에는 교착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1월16일 바그너그룹이 인구 1만 명의 도네츠크주 소읍 솔레다르를 점령하면서 상황이 다시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솔레다르는 지난해 8월 이래 5개월 이상 치열한 접전이 펼쳐진 곳이다. 솔레다르 점령 이후 인구 8만 명의 인근 도시 바흐무트(러시아에선 주로 옛 소련 시절 이름인 아르툐몹스크로 부른다)에서 전투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AP 연합 뉴시스
2022년 12월24일 우크라이나에서 특수작전 중 사망한 바그너그룹의 전사 장례식에 프리고진이 참석해 있다. ⓒAP 연합

푸틴이 집착하는 바흐무트 점령, 용병이 주도

미국의 CNBC는 바흐무트에서 3월11일 하루 동안에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측에서 각각 수백 명이 숨졌다며 전투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가 지난해 9월21일 부분 소집한 30만 명 예비군의 훈련이 끝나는 올해 초 대대적인 공세에 들어갈 것으로 예상됐는데, 대공세의 불길을 바그너그룹이 점화한 셈이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미국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등 서방 측은 바흐무트에 전략적 가치가 별로 없다며 반복적으로 평가절하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러시아와 바그너그룹은 바흐무트를 결전지로 삼는 것일까. 지난해 9월 우크라이나의 반격으로 돈바스까지 밀린 상태에서 승전보에 목말라 있는 푸틴에게 소도시인 바흐무트 점령은 ‘상징적인 승리’로서 손색이 없기 때문으로 보인다. 침체된 러시아군의 사기를 끌어올리고 국내 애국주의를 더욱 강화하며, 국제사회에서 친러시아 국가들의 결집을 이끌어내기에 이만한 선전 기회는 없다는 것이다.

바흐무트 점령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는 바그너그룹은 한낱 용병에 지나지 않음에도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어떻게 러시아 전력의 핵심으로 떠오른 것일까? 군사적으로는 러시아군이 기갑부대나 자동차화부대 등 기동부대 중심으로 구성돼 참호전·시가전을 펼치며 방어하는 상대를 제압할 보병의 역할이 제한되는 상황을 꼽을 수 있다. 반면 보병 중심인 용병은 이런 근접전에서 의외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러시아군의 공중 전력과 포병의 지원을 받을 경우 시너지를 극대화할 수 있다. 

게다가 러시아군은 국내법상 징병 병력을 전투에 투입할 수 없어 병력 운용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결국 위험한 전투는 용병을 앞세워 치르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바그너그룹의 가치와 프리고진의 발언권은 갈수록 강해진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 바그너그룹 용병의 참전이 처음 확인된 것은 러시아군이 전선에서 고전할 때였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 준다. 개전 2개월이 지난 지난해 4월 루한스크주의 포파스나에서였다. 지난해 3~5월 2개월에 걸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인구 2만의 이 작은 도시에서 4월말 시리아·리비아 신분증을 지닌 외국인 전투요원 시신이 발견되면서다. 

ⓒAP 연합 뉴시스
바그너그룹 수장 프리고진(가운데)이 1월10일 우크라 동부 요충지 바흐무트에서 용병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뉴시스

러군 당국자 거세게 비판하는 바그너 수장

바그너그룹은 러시아 정규군이 우크라이나에 밀렸던 포파스나 전투에서 자신의 가치를 확인시켰다. 우크라이나의 정예 제24 기계화여단과 제128 산악강습여단이 투입된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의 제150 자동차화소총사단과 친러 지역 정권인 루한스크인민공화국(LPR)의 민병대는 4월까지 상당히 고전했다. LPR이 4월22일 포파스나에서 실패했다고 선언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바그너 용병들은 전세를 역전시켜 5월7일 이 도시를 점령했으며, 우크라이나군은 퇴각했다. 러시아 대통령 직할부대인 로스그바르디야(국가근위대) 소속 체첸인 부대인 카디로브치도 전투 막바지에 참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그너그룹은 카디로브치와 더불어 무모한 공격과 잔학행위로 악명이 높다. 그런 바그너그룹이 갈수록 역할을 확대해 지금 러시아의 2023년 춘계 대공세에 앞장선 셈이다. 

기세가 오른 프리고진은 최근 들어 탄약과 무기 공급이 지연되고 있다며 군 당국자를 반역자로 불렀다. 이 때문에 프리고진이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부 장관이나 세르게이 게라시모프 러시아군 총참모장 겸 우크라이나전 통합사령관과 보급과 작전을 둘러싸고 ‘집안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관측도 제기됐다. 그만큼 그의 발언권이 강해졌다는 의미다.

눈여겨볼 점은 미국 재무부가 1월26일 러시아에 대한 새로운 제재를 발표하면서 바그너그룹을 ‘성적 폭력, 다량 학살을 포함한 심각한 인권 침해를 자행해온 초국가적인 범죄조직’아라고 명시하며 압박을 한층 강화했다는 사실이다. 미국 해군대학의 국가안보 담당 크리스토퍼 포크너 교수는 2월13일 ‘포린폴리시’ 기고문에서 “이번 조치는 다른 국가들이 바그너그룹에 대한 제재에 동참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만큼 바그너그룹이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미국 공영라디오 NPR은 3월초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바그너그룹 본사인 바그너센터를 방문한 기자들에게 이 그룹의 홍보 관계자가 “우리는 모든 애국적인 것에 관심이 있다”고 강조했다고 보도했다. 바그너그룹 측은 “애국적인 블로거들이 인터넷 방송을 할 수 있도록 24시간 미디어랩을 제공하고 군사 애플리케이션 개발을 위한 기술 스타트업에 자금을 제공하고 있다”고 공개했다. NPR은 바그너그룹이 애국주의를 앞세워 전쟁으로 이익을 보는 거대 비즈니스 제국으로 성장하고 있음은 물론, 한때 비밀스러운 인물이던 프리고진이 러시아에서 정치적으로 부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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