봇물 터진 국가보안법 개폐 논의
  • 高在烈 기자 ()
  • 승인 2000.06.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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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 바르고 총명하며 유머 감각을 지녔다’(김대중 대통령) ‘소탈했다’(이헌재 재경부장관) ‘화통했다’(한광옥 대통령비서실장) ‘위트와 유머가 대단하고 예절도 밝았다’(손병두 전경련부회장) ‘확실한 지도자의 모습이었다’(황정미 <중앙일보> 기자)

남북 정상회담 기간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본 사람들이 김위원장을 평가한 말은 칭찬일색이었다. 김위원장의 인기는 인터넷에서도 이어져서, 다음넷에는 최근 ‘김정일 팬클럽’ ‘김대중 대통령, 김정일 위원장 사랑해요’ ‘북한 정상 김정일 동무 I LOVE YOU’ 등 김위원장을 지지하는 사이트들이 생겨났다. 또 대북 사업 지원 인터넷 사이트인 조선인터넷 홈페이지에서는, 네티즌들이 김정일 위원장을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노벨상 후보로 추천하자는 서명운동까지 벌이고 있다.

노벨상 추천 운동도 활발

이런 일들은 얼마 전까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모두 국가보안법 제7조(찬양·고무죄)를 위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아무도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국가보안법의 체면이 이렇게 구겨진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4·13 총선 기간에도 국가보안법은 법으로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선관위가 후보자의 전과 기록을 공개하자, 국가보안법 위반자들은 자신의 범법 사실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훈장이나 다름없다며 자랑스러워했다.

서슬 퍼렇던 군부 독재 시절에 공포의 대상이던 국가보안법은 이제 세간의 비웃음거리가 되어 버린 것일까? 누구도 지키려 하지 않고, 어겨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법. 이것이 지금 국가보안법이 처한 딜레마이다.

국가보안법이 이렇게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린 것에 대해 ‘민족 화해 협력 범국민협의회’ 김창수 정책실장은 ‘국가보안법 내용이 현실과의 괴리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북한 노래가 유행하고, 북한 음식을 먹으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고, 북한에서 온 강아지가 청와대에서 재롱을 부리며 남과 북이 화합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현실에서, 북한을 ‘반국가 단체’로만 보는 편협한 시각을 담은 국가보안법은 설 자리가 좁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선 법조계도 국가보안법을 개정할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다. 지난 6월16일 민족민주혁명당 사건과 관련해 하영옥(36) 피고인에게 징역 8년이라는 중형을 선고한 서울고등법원 형사합의 2부 오세립 부장판사는 “국가보안법이 실정법으로 존재하는 한 이를 따를 수밖에 없어 중형을 선고했다. 근본적으로 법이 개정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국가보안법 개정을 위한 국민들의 호응도 뜨겁다. ‘국가보안법 폐지 범국민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는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 최은아 간사는 “예전과 달리 40∼50대 분들도 많이 동참하고 있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 변화한 분위기 덕에 서명운동이 한결 수월해졌다”라며 변화한 분위기를 설명했다.

이처럼 사회 분위기가 ‘국가보안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쪽으로 옮겨가자, 정치권에서도 조심스럽게 국가보안법 개정 논의가 흘러나오고 있다. 국가보안법 개정에 반대 입장을 취했던 한나라당도 제한적이나마 개정 의견을 내놓고 있으며, 자민련의 태도도 유연하다. 민주당은 더욱 적극적이어서 개정은 물론 대체 입법까지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개정에 대한 반대 의견도 아직 만만치 않다. 보수적인 단체에서는 “국가보안법 문제는 상호주의에 입각해 해결해야 한다. 북한은 아무 조치도 취하고 있지 않은데 우리만 개정해서는 안된다”라며 법 개정에 반대하고 있다. 정치권이 미적거릴 경우 국가보안법 개정이 흐지부지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오랫동안 인권운동을 해 왔고, 그 자신이 국가보안법의 피해자이기도 한 인권운동사랑방 서준식 대표는 “피해 보상도 필요없고, 명예 회복도 필요없다. 하루빨리 법이 바뀌어야 한다”라며 국가보안법을 개정할 절박성을 강조했다. 남북 정상회담에서 보여준 ‘통 큰 화합’이 국가보안법의 ‘통 큰 개정’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결과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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