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만장자 노태우의 ‘이등공신’ 엄삼탁
  • 李政勳 기자 ()
  • 승인 1995.1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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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조와 쌍두마차…유흥·유기장 업계서 긁어모아
꺼지지 않는 전직 대통령 거액 비자금설의 실체는 무엇인가. 전직 대통령과 가신 가운데 어느 누구도 솔직히 털어놓지 않을 것이 분명한 이상 완전한 모습을 그리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동화은행 사건을 수사했던 함승희 변호사와 슬롯 머신 사건을 수사했던 홍준표 변호사, 그리고 93년 사정 수사 등에 참여했던 몇몇 검사들은 어렴풋이 짐작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대중 정치인이 갖춰야 하는 첫 번째 조건은 능수능란한 자금 동원력이다. 이들이 끌어모으는 거액은 대개 단체(주로 기업)와 개인이 뭔가를 얻어내기 위한 목적으로 은밀히 마련해둔 비자금이다. 비자금은 조성 과정에서부터 수십 차례 반복·분산 입·출금이라는 ‘돈세탁’ 과정을 거친다. 정계 실력자 역시 이를 친인척과 비서진이 아닌 엉뚱한 사람의 차명 계좌로 받기 때문에, 비자금과 정치 자금 간의 연결 고리를 찾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하늘 아래 완벽한 것은 없는 법이다. 비자금을 조성한 쪽에서 분란이 일어나 내부 투서가 날아들거나, 예측하지 못한 사건·사고가 일어나면 비자금에 관한 첩보가 검찰에 떨어질 수가 있다.

이현우 전 경호실장의 비계좌 수사에 참여하고 있는 김진태 대검연구관은 손꼽히는 특수 수사통이다.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93년 초 서울지검 특수1부 소속이던 그는 엄삼탁 병무청장이 공개한 재산 내역 중에 서울 강남의 고급 음식점인 ‘동경가든’이 포함돼 있는 것에 주목했다. 예비역 육군 소장과 안기부 기조실장을 지낸 엄청장의 재력으로는 동경가든을 소유할 수 없다고 본 김검사는 내사에 착수했다.

노태우의 ‘의동생’ 엄삼탁

엄청장은 과거부터 노태우 대통령과 매우 가까워 의동생으로까지 불렸다. 그러나 엄청장은, 5공 시절 전경환씨가 청와대에 드나들며 영향력을 발휘했듯, 6공 시절 노대통령과 통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라인으로 꼽히면서 적지 않은 잡음을 일으켰다. 그런데도 김영삼 정부의 첫 번째 병무청장에 취임했다. 정치 격변기에 주군(主君)을 바꿔 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능력이 출중하지 않으면 천부적인 정치력을 갖춘 사람일 것이다.

김검사는 철저하면서도 신중한 사람이다. 내사 끝에 부정한 돈을 받은 증거를 확보했으나 엄청장을 소환하지도 않았고 언론에 흘리지도 않았다. 이 무렵 그의 사법시험 동기인 서울지검 강력부 홍준표 검사는 슬롯 머신 업계 대부인 정덕진씨를 조사하고 있었다. 홍검사의 관심사는 89년 11월 정씨가 안기부로부터 내사를 받고도 무사히 빠져 나간 배경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그는 끝내 정씨로부터 “안기부 기조실장이던 엄삼탁씨에게 돈을 주고 청탁해서 빠져나왔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정씨의 자백과 김검사가 확보한 물증을 대조하자 일치했다. 이 때서야 김검사는 엄청장을 구속 기소했다.

당시 정덕진씨는 돈세탁을 하지 않고 수표를 엄청장에게 주었다. 검은 돈을 추적하는 검사에게 수표가 걸려든 것은 허허벌판에서 이정표를 찾은 것만큼 반가운 일이다. 이 수표를 따라가면 엄청장의 비자금이 들어 있는 계좌가 발견된다. 엄청장의 비계좌에는 정씨 외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비자금도 들어와 있을 것이다. 그 비자금을 따라가면 또 다른 사람의 비계좌가 발견된다. 이런 식으로 끝까지 따라가면 음습한 비자금의 세계, 정치 자금의 세계가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서울 강남의 유명 음식점은 대부분 ‘유흥 음식점’이 아닌 ‘대중 음식점’으로 허가 받았다. 유흥 음식점 수준의 장사를 하면서 대중 음식점 수준의 세금을 내는 것부터가 엄청난 탈세고 특혜이다. 또 현금과 10만원권 수표 거래가 많기 때문에 자금 동원력도 대단하다. 슬롯 머신 등 유기장 업계 역시 현금 장사이고 갖가지 방법으로 ‘절세’를 하기 때문에 자금 동원력이 막강하다.

유흥업소와 유기장 업계의 신나는 현금 장사는 무서운 적을 불러들이는 약점이 된다. 돈 냄새를 맡은 폭력배와 권력자의 하수인이 달려드는 것이다. 살아 남기 위해서는 이 실력자들에게 상당한 비자금을 바쳐야 한다. 정덕진씨 조서에는 ‘당시 엄삼탁 안기부장 특보가 이승완 호청련 회장을 시켜 전국의 폭력배를 우익 세력으로 묶어 좌경 학생운동 세력에 대항하려 했다’는 진술이 있다. 엄씨가 폭력배를 동원해 전국의 ‘물 좋은’ 유흥업소와 유기장 업계로부터 ‘검은 돈’을 빨아당기려 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김검사에게 외압이 있었는지, 그는 엄청장이 정덕진씨를 협박해 돈을 받았다는 것만으로 기소하고 말았다. 엄삼탁씨가 유흥업소와 유기장 업계의 비자금을 모아 정치권에 전달한 연결 고리일 가능성이 많은데도 확대 수사를 하지 않은 것이다. 이를 놓고 서울지검에서는 아직도 ‘진짜 살아 있는 지뢰밭은 엄삼탁’이라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다.

현금 거래가 많은 유기장 업계와 대형 음식점은 훌륭한 돈세탁 장소로도 이용된다. 정덕진씨 사건을 조사했던 홍준표 변호사는 “거액 수표를 들고 슬롯머신장에 와서 적당히 잃어주면서 게임을 하다 10만원권 수표나 현금으로 바꿔가는 것은 검은 돈을 세탁하는 전형적인 방법이다”라고 말했다. 꽃등심 판매로 유명한 서울 강남구의 음식점 ‘오○○’의 여주인 정 아무개씨(40)는 정계 인사와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유명하다.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뒤 서울지검의 한 검사는 한 실력자의 비계좌에서 나온 돈이 정여인의 증권 계좌에 들어 있는 사실을 발견하고 소환해서 조사한 적이 있다. 이 실력자가 정여인과 돈을 맞바꾸는 방법으로 돈세탁을 한 것으로 의심돼 참고인으로 부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내 조사를 중단했다. 자칫 현 정부에 부담을 주는 사건으로 비화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부투자기관의 장도 자금줄”

93년 3월 함승희 검사가 동화은행 안영모 행장의 비자금을 추적하게 된 것은 ‘동화은행이 직원을 시켜 백화점과 호텔 등지에서 영수증을 사 모으고 있다’는 92년 2월에 작성된 동향보고서가 단서가 되었다. 영수증을 사 모으고 있다면 영수증에 적힌 금액 만큼의 동화은행 내부 자금을 횡령할 수 있다. 이렇게 횡령한 비자금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가.

함검사는 안행장이 시중 은행장으로서는 극히 이례적으로 세 번 연임한 것에 주목했다. 그렇다면 은행장 인사를 결정하는 동화은행 주주와 정계 고위 인사들에 대한 로비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영수증을 사 모았을 것이다. 이렇게 추론하고 수사를 개시하자 ‘안동화’ 등의 가명으로 만들어진 비계좌가 발견되었다. 이 계좌에서 나온 돈을 따라가자 김종인 전 경제수석비서관과 이용만 전 재무부장관이 연결됐다. 동화은행 주주들에게도 적지 않은 돈이 간 것이 확인됐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함검사가 흥분한 것은, 안행장 비계좌에서 나온 2억원이 이원조씨 비계좌에 들어간 것을 확인했을 때였다(20~21쪽 기사 참조).

5, 6공 시절 두 대통령의 친구인 이원조씨는 은행장 인사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이씨 덕으로 은행장이 된 사람은 이원조씨가 특정 기업에 대출해 주라고 하면 무조건 대출해 주어야 했다. 이러한 ‘검은 대출’의 대가로 특정 기업은 이원조씨에게 사례하고, 이씨는 이렇게 마련한 자금을 최고위층의 신임을 받으며 관리 해왔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는 또 다른 통로에서 들어온 자금도 위탁 관리했을 가능성이 높다. 엄삼탁씨가 유흥업소와 유기장 업계의 관리자라면 이원조씨는 금융권의 관리자였다.

문제는 이원조씨가 문민 정부 들어서도 국회의원을 하면서 살아 남았다는 데 있었다. 만약 이씨 비계좌에서 나온 돈이 현 정부의 실세와 연결된 것이 확인되면 그 파장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야 할 것인가. 함검사와 검찰 상층부 간에 구두 보고가 잦아지면서 이원조 의원은 구속하지 않는 쪽으로 방향이 잡혀 갔다. 엄씨보다는 이씨가 더 거물이라는 점이 입증된 셈이다.
대통령이 바뀌는 등 정치 격변기에 굵직한 사건을 수사한 검사들 중에는 사석에서 “한전·주택공사·도로공사 등 대형 공사 발주가 많은 정부투자 기관의 장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이가 적지 않다. 또 건설업계의 돈 흐름에 정통한 사람들은 “건설업이야말로 가장 쉽게 비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 제조업계의 비자금은 건설업계의 비자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93년 (주)한양 배종열 회장이 구속되었을 때 한양 노조는 배회장의 비자금 마련법을 낱낱이 공개한 바 있다. 이 때 공개된 방법에는 △실제 근무하지도 않는 사람을 현장 인부로 꾸며 노임을 착복하는 것 △건설 자재를 살 때 이중 거래 계약서를 만들고 그 계약서 간의 차액을 횡령하는 것 △하도급을 줄 때 역시 이중 거래 계약서를 만들어 차액을 횡령하는 것 등이었다. 이렇게 마련한 비자금은 관급 공사에 응찰할 때 건설회사가 담합해서 예정가의 99% 정도로 공사를 따내는 데 필요한 로비 자금으로 사용된다.

대형 비리 사건 수사에 참여했던 한 검사는 “수백억원, 수천억원 대의 공사를 매년 수십 개씩 발주하는 정부투자기관의 장이 얼마나 좋은 자리인지는 그 자리에 앉아본 사람만이 안다. 사람인 이상 그도 연임하고 싶어할 것이다. 연임하려면 임명권자인 권력 최상부 사람들에게 잘 보여야 하므로, 알아서 정치 자금을 만들어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채업자가 비자금 관리하기도

94년 8월 검찰이 안병화 전 한전 사장이 (주)삼창 회장으로부터 2억원을 받은 혐의를 잡아 구속 기소할 수 있었던 것도 아주 작은 사건이 단서가 되었다. 박병찬 (주)삼창 회장이 2백만달러를 외국으로 빼돌린 혐의를 잡고 비계좌를 찾아 조사했는데, 엉뚱하게도 이 비계좌에서 나온 돈이 안병화씨 비계좌로 흘러간 것을 확인했던 것이다. 문제는 이 때부터였다. 안씨의 비계좌를 추적하자 안씨에게 돈을 준 다른 대기업주의 비계좌와 안씨로부터 돈을 받은 유력 정치인의 비계좌가 줄줄이 드러났다. 그러나 대검 중수부는 이 ‘컴컴한 먹이 사슬’을 덮어버리고, 안병화씨가 (주)삼창으로부터 받은 2억원만 문제 삼아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했다.

거액 현금 동원력을 자랑하는 사채업자 역시 중요한 중간 관리자로 이용될 수 있다. 이들은 정·관계의 거물이 받은 현금이나 수표를 시중에서 여러 번 거래된 10만원권 헌 수표와 바꿔주는 역할을 한다. 자칫 금융기관에 돈을 맡겼다가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사채업자에게 돈을 맡기는 것이 안전할 수 있다.

94년 상무대 비리 사건 주역으로 구속됐던 조기현 청우건설 회장은 종로의 유명한 사채업자 출신이다. 상무대 사건이 터져나오게 된 이유는 조기현씨가 동업 관계를 미끼로 이동영씨의 특허기술을 뺏은 데 원인이 있었다. 애초 약속대로 동업 관계가 이뤄지지 않자 이동영씨는 조기현씨의 비리를 낱낱이 적은 투서를 청와대와 검찰에 보냈던 것이다.

이동영씨의 투서에는 조기현씨가 여권 실세들과 가까웠고 거래 관계에 있었다는 내용이 숱하게 나온다. 상무대 사건은 이런 거래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검찰은 상무대 사건만으로 조씨를 구속 기소했다.

“떡을 만지다 보면 떡고물을 집어 먹을 수도 있다”는 말은 이후락씨의 전유어가 아니다. 권력을 쥔 사람은 절대로 자기 명의의 통장으로 돈을 받는 법이 없다. 반드시 대리인이나 중간관리인을 내세운다. 관리인은 정부기관장일 수도 있고, 금융계의 황제일 수도 있고, 엉뚱하게 그 휘하의 사채업자일 수도 있다. 이 관리인들에게도 적절히 떡고물을 떼어 먹을 권리가 주어진다. 대신 비계좌가 발각되면 모든 죄를 혼자 뒤집어쓰고 감옥에 가야 하는 책임이 있다.

비자금과 정치 자금은 결코 잡히지 않는 ‘그림자’가 아니다. 이미 검찰 내에서도 ‘부패의 먹이사슬’을 들추어본 검사들이 적지 않다. 이현우 전 경호실장의 경우에서 드러나듯 검찰 상층부 역시 대략적인 윤곽을 파악하고 있다. 문제는 검찰에 수사 의지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93년 1월 노태우 대통령의 딸·사위인 노소영·최태원 씨 부부가 19만달러를 미국 은행에 불법 예치한 혐의로 미국 검찰로부터 조사 받은 것은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것이 많다. 당시 미국 검찰은 노씨 부부에게 ‘무죄 증명’을 요구했다. 무죄 증명이란 ‘이 돈은 정당한 거래와 노동의 대가로 마련한 것이니 문제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무죄 증명을 하지 못하면 타인에게 돈을 받은 것으로 인정해 전액 몰수당하고 따로 벌금을 내야 한다.

검찰 ‘권력의 시녀’ 오명 벗을까

그러나 한국은 검사가 ‘유죄 증명’을 해야 한다. 검사가 하나하나 조사해서 증거와 진술을 확보한 부분에 대해서만 죄가 성립된다. 어설프게 수사해 증거를 확보하는 데 실패하면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한국 검찰은 면죄부를 발행해주기 위해 수사한다’는 비난은 이런 이유에서 나온다. 부정한 자금에 대한 조사 방법이 미국 식으로 바뀐다면 지하 경제는 상당 부분 줄어들 것이다.

92년 일본 열도를 뒤흔든 ‘사가와 규빈 사건’의 하이라이트는 자민당의 대부인 가네마루 신을 구속한 것이었다. 동경지검 특수부가 정치 바람에 좌우되지 않고 2년 반 동안 끈질기게 추적한 결과물이었다. 동경지검 특수부는 다나카 전 총리를 구속해 이름을 날린 적이 있다. 함승희·홍준표 변호사는 “수백만원대의 단순 절도 사건에는 엄격하게 법을 적용하면서, 수십억·수백억원 대의 정치 자금·뇌물 수수 사건에 대해서는 관대히 처벌하는 게 한국의 검찰이다. 그러나 고위 공직자가 연루된 화이트 칼라 범죄를 잡지 않으면 검찰에 대한 존엄성이 사라진다. 한국의 대검 중수부와 서울지검 특수부도 동경지검 특수부에 못지 않은 명성을 얻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검찰은 경찰과 안기부 등 모든 수사기관을 지휘하고 기소를 독점하는 최고의 사정기관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정치 권력의 시녀’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이현우씨 사건을 계기로 검찰이 ‘권력의 시녀’라는 소리를 떨쳐버릴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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