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권 도전 일장춘몽 위기
  • 文正宇 기자 ()
  • 승인 1995.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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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법 강펀치에 비틀…YS의 허점 찾아 반격 시도
김영삼 대통령이 인파이터라면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는 아웃복서이다. 김대통령은 무조건 부수고 들어가며 한방을 노리고, 김총재는 탐색전을 벌인 뒤 상대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두 사람은 나름의 장기를 살려 정치권을 양분하며 힘의 균형을 유지해 왔다. 상대의 작전에 말려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을 때는 언제나 위기에 몰렸다.

김대통령은 군사 독재 세력과의 야합이라는 비난에 아랑곳없이 3당 합당이라는 한방을 날려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고 김총재를 정계에서 은퇴시켰다. 그러나 김총재는 김대통령의 정책 실패와 여권의 불안정한 동거 구도를 끈질기게 공략해 정계로 다시 돌아왔고, 결국 김대통령을 궁지로 몰았다.

‘DJ 대통령 불가론’ 고개 들어

지금은 다시 김대통령의 ‘큰 것 한방’ 작전에 김총재가 몰리는 양상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에 이은 5·18 특별법 제정이라는 김대통령의 초강수에 밀려 김총재는 연신 뒷걸음질치고 있다. 앞뒤 재지 않고 휘둘러대는 상대의 주먹에 뜻하지 않은 타격도 입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20억원을 받았다고 실토한 것이다. 그뒤 김총재는 대선 자금이라는 김대통령의 급소를 계속 두들겨 실점을 만회했으나, 이번에는 김대통령으로부터 5·18 특별법 제정이라는 큰 주먹을 다시 한번 맞게 된 것이다.

여권의 5·18 특별법 제정 결정은 그동안 김총재의 행보를 다시 상기시켜 주는 면이 있다. DJ는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구여권 세력과 연합한 김대통령에게 패한 뒤 구여권 세력과 연대를 모색하는 방향의 길을 걸어 왔다. 아니, 그런 시도는 92년 대통령 선거가 끝나기 전부터 있었다.

대선 막바지에 김총재 진영에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극적으로 화해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 당시 양측 밀사가 동교동 김총재 집과 연희동 전두환씨 집 사이를 분주하게 오갔다. 양측은 그 때 전씨가 ‘동서 화합’을 선언하는 수준까지 합의했으나, 김총재가 전제 조건으로 내건 전씨의 광주 망월동 묘지 참배를 전씨가 거절하는 바람에 협상이 깨지고 말았다.

대통령 선거에서 패한 뒤에도 구여권을 포용하려는 DJ의 노력은 계속됐다. 김총재가 만든 아태재단에 구여권 인사들이 속속 합류했다. 김총재는 김대통령에게 토사구팽 당한 인사들과 끊임없이 접촉했다. 그리고 지난해 민주당 이기택 총재가 12·12 사태 진상 규명과 관련자 처벌을 위한 강력한 투쟁을 주장하자 김총재는 제동을 걸었다. 6·27 지방 선거 때는 구여권 관료 출신들을 대거 영입해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동안 김총재는 ‘흉보면서 배운다’는 식으로 과거 김대통령이 구여권 세력과 손잡은 방식 그대로 구여권 세력을 끌어안는 모습을 보여 왔다.

여권의 5·18 특별법 제정은 김총재의 이런 기도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여권이 과거 청산에 적극 나선 만큼 김총재의 구여권 세력 끌어안기는 중단될 수밖에 없게 됐다. 그리고 김총재의 이런 행보에 불만을 갖고 있었던 호남과 수도권의 진보 성향 인사들을 뒤흔들어 놓는 효과도 있다. 여권이 5·18 특별법을 제정한다고 해서 이들이 김대통령이나 민자당 지지로 돌아설 리야 없겠지만, 적어도 김총재를 계속 밀어줘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5·18의 최대 피해자라는 도덕성을 담보로 구여권 세력을 세탁해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고 있던 김총재는, 여권의 5·18 특별법 제정 결정으로 매우 어정쩡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 김총재는 5·18 특별법 제정 발표 직후에는 관련자들을 사법 처리한 뒤 즉각 사면하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엄정한 처단을 주장하는 등 다소 혼란스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국민회의로서는 다시 ‘DJ 대통령 불가론’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는 것도 크게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현재 ‘김대중 불가론’을 전파하는 데 앞장서고 있는 것은 민주당 인사들이다. 그들은 이번에 김총재가 노씨로부터 20억원을 받았다고 인정함으로써 그나마 김총재를 지탱하고 있던 최소한의 도덕성마저 무너져 버렸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대통령 선거를 지나치게 의식해 과거 청산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다가 여권에 뒤통수를 맞아 호남의 지지 기반도 크게 흔들리게 됐다고 공격한다.

노태우 비자금 사건을 처음 폭로한 민주당 박계동 의원은 11월23일 광주에서 ‘김대중 대통령 불가론’을 주장하고 나섰다. 박의원은 광주 지역 진보 인사 초청 강연에서 “김총재가 다시 대통령에 나오면 수평적 정권 교체를 열망하는 모든 야권 인사들과 호남 유권자들에게 또 한번 절망만을 안겨줄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그가 ‘DJ 불가론’을 주장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김총재가 정통 야당을 분당시켰으며, 5·18과 12·12 관련자들에게 유화 제스처를 보임으로써 선명성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김총재가 소수의 보수 인사를 끌어안는 데는 성공했지만 결과적으로 다수 진보 인사들의 지지를 잃게 되었다는 얘기이다. 김총재의 현재 상황은 과거 세 차례 대통령 선거에 도전할 때보다 못하면 못했지 결코 낫지 않다는 주장인 것이다.

민주당 인사들은 김총재의 2선 후퇴를 요구하고 있기도 하다. 만약 김총재가 2선으로 물러나 참신한 인사를 대통령 후보감으로 내세워 지원하면 적극적으로 야당 통합에 나설 수도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면 호남 유권자뿐만 아니라 수평적 정권 교체를 열망하는 모든 민주 인사들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민주당이 이런 주장을 펴는 까닭은 분명하다. 한편으로는 계속 김총재를 흠집내자는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중·대 선거구제나 앞으로 있을 정계 재편에 대비해 명분을 축적하자는 것이다. 명분을 축적하지 않고 여권과 합작해 선거구제 개편을 시도하면 민주당은 ‘여당의 2중대’라는 국민회의의 역공에 휘말릴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김총재가 2선으로 후퇴하면 좋고, 그러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계산이 깔려 있는 것이다. 민주당은 ‘DJ 대통령 불가론’과 ‘2선 후퇴’라는 카드를 거세게 흔들면서 선거구제 개편과 정계 재편을 향해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국민회의 “시간 지나면 역전할 수 있다”

현재 국민회의는 정국 돌파를 위한 특별한 처방을 내놓지는 않고 있다. 5·18 특별법 제정 결정은 환영하면서도 김대통령의 정치 행태를 맹렬히 비난하는 수준이다. 깜짝쇼로 대선 자금에 쏠린 시선을 돌리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김대통령의 5·18 관련자 사법 처리 의지 표명은 ‘정의가 악을 심판하는 신나는 일이 아니라 신악이 구악을 짓밟는 추악한 난투극일 뿐’이라고 깎아내린다. 현재로서는 김대통령의 대선 자금 의혹 규명을 변함없이 요구하고 특별검사제 도입을 주장한다는 것이 공식으로 결정된 대응 방안의 전부이다.

그러나 비공식으로는 상당히 심각한 얘기들이 오가고 있다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대표적인 것은, 김총재의 대선 재도전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다소 수정할 필요가 있지 않는가 하는 조심스런 문제 제기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김총재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자는 얘기이다.

현재 민주당은 선거구제 개편, 자민련은 내각제 개헌을 주장하며 이런 요구가 관철된다면 얼마든지 여권과 손잡을 수 있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국민회의 쪽에서도 이들과 협상할 준비가 돼 있다는 자세를 보여야만 고립을 피할 수 있지 않느냐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실제로 김총재 진영에서도 최근 김총재가 당분간 2선으로 후퇴하는 방안이 논의됐었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과거 여권이 김총재를 상대로 쓴 전형적인 방식이 호남 고립화였다. 그 때문에 김총재는 지난 세 차례 대통령 선거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국민회의 내부에는 이번에 또 그런 전철을 밟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국민회의 자체도 ‘김대중 불가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은 것이다. 김총재 자신도 지방 선거에서 승리하기 전에는 내각제에 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 적도 있다. 이번 일을 계기로 김총재가 대선 출마 외의 또 다른 방안에 대해 검토해볼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논의가 당 내에서 공론화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아예 공론화하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 모든 일은 노련한 아웃복서인 김총재가 결정할 것이다. 국민회의의 한 관계자는 “우리에겐 시간이 가장 큰 무기다”라고 말한다. 대통령 선거까지는 아직 2년 넘게 남았고, 그 정도면 논리적이고 치밀한 김총재가 상대의 약점을 찾아 반격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라는 말이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큰 것만 노리는 김대통령은 힘이 빠지게 돼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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