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정착지 우쉬토베에 서린 한민족의 혼
  • 우쉬토베/글·사진 南文熙 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1999.09.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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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강제 이주 62년 맞은 카자흐스탄 현지 르포/최초 정착지 우쉬토베에 통한의 자취 선연
천미하일(75) 노인이 연해주를 떠난 것은 그의 나이 열두 살 나던 어느 가을 날이었다. 그 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고려인학교에 등교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교단에 올라선 선생님은 굳은 표정으로 충격적인 얘기를 전했다. 연해주의 고려인은 모두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말이었다. 어린 그로서는 당시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가족과 동포의 가슴에 두고두고 한을 남긴 강제 이주의 첫 신호탄이었다. 그때가 바로 1937년 9월15일이다. 스탈린이 고려인 강제 이주를 결정한 극비 문서에 서명한 지 한 달여 만에 그의 운명은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다.

식구들과 함께 천여명의 한인이 화물 열차에 몸을 실었다. 마치 우리에 갇힌 가축처럼 취급되며 한 달여를 달리는 동안 많은 사람이 죽어 갔다. 특히 노약자와 어린이의 희생이 컸다. “기차가 정거장에 도착할 때마다 소련 병사가 죽은 이들의 시신을 어디론가 싣고 갔다.” 천 미하일 씨는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임산부의 고통도 심했다. 의사나 간호원의 도움 없이 아이를 낳다가 또 많은 사람이 죽어 갔다.

37년 9월, 가축처럼 실려 중앙아시아로

‘지옥 여행’끝에 그들이 버려진 곳은 바로 우쉬토베였다. 당시 우쉬토베는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한인들의 첫 기착지이자 일종의 관문이었다. 이곳에서 많은 한인들이 짐 부리듯 내려졌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우즈베키스탄이나 키르기스스탄 등 다른 지역으로 보내졌다.

우쉬토베의 ‘우쉬’는 카자흐 말로 3이라는 뜻이다. 토베는 산이다. 즉 3개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라는 뜻이다. 그러나 말이 좋아 분지이지 이곳의 땅은 벼농사를 짓기에는 너무 척박했다. 여름은 고온 건조하고 비가 거의 오지 않아 가물기 일쑤다. 옛 소련에서도 벼 재배 북방 한계선이라고 할 정도로 겨울이 빨리 온다. 우쉬토베 중심부에는 그나마 수목이 있어 사람이 살 만하지만 그 주변은 황량한 초원이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이곳의 카자흐인도 유목 생활로 생계를 이어왔다.

고려인이 처음 도착한 그해 10월 초순은 대륙의 찬 기운이 엄습하는 시기였다. 우선 추위를 피할 곳을 찾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낮에는 인근을 돌아다니며 거처할 곳을 알아보고, 밤에는 다시 우쉬토베 역으로 돌아와 새우잠을 자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약 1주일간 이런 생활을 하다가 더러는 카자흐 마을로 들어가 헛간이나 축사를 임시 거처로 삼기도 했다. 우쉬토베에서 만난 고려인 1세들은 그 때 카자흐인들이 보인 친절과 호의에 대해 아직도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있다. 지난 8월21일 강제 이주 기념비 제막식에서 연설한 카자흐스탄 종합법률대학 한 구리 교수(전 고려인협회 회장)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이다. 카자흐인들에 벼농사·채소 재배법 전파

한 교수가 우쉬토베 역에 도착한 것은 그의 나이 여섯 살 때였다. 당시 역 주변에는 참외를 파는 카자흐인들이 많았다. 한교수는 “돈이 없는 고려인의 처지를 동정해 카자흐인이 참외를 공짜로 나누어 주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자신이 살던 유로타(유목민들의 집)를 선뜻 내주는 카자흐인도 있었다. 카자흐인이 그때 보여준 호의는 지난 60여 년간 두 민족이 평화롭게 어깨를 맞대며 공존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물론 고려인이 일방적으로 도움만 받은 것은 아니다. 연해주에서 그랬던 것처럼 고려인들은 이곳에서도 벼농사뿐 아니라 무·배추 등 채소 키우는 법을 전파했다. 옛 소련 시절 카자흐스탄이 농업 국가로 입지를 다지는 데는 고려인의 힘이 매우 컸다. 그래서 카자흐인은 지난 90년 카자흐스탄이 옛 소련에서 독립할 때도 ‘다른 민족은 다 떠나도 고려인은 떠나면 안된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카자흐인 마을에 임시 거처를 정한 사람들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러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한겨울의 추위를 피하기 위해 찾은 곳이 바로 바쉬토베라는 산이다. ‘바쉬’는 카자흐 말로 큰, 또는 머리라는 뜻이다. 즉 바쉬토베는 ‘큰 산’이다.

지난 8월21일 우쉬토베 시민공원에서 강제 이주 기념비 제막식을 마친 일행은 시내에서 자동차로 약 20분 거리에 있는 바쉬토베로 향했다. 말 그대로 큰 산을 생각하고 그곳을 찾은 사람들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곳은 산이라기보다는 대평원 한복판에 서 있는 야트막한 언덕이었다.

일행과 함께 이곳에 오른 윤 세르게이 노인(76)의 눈가가 붉어지며 이슬이 맺혔다. 눈앞에 펼쳐진 대평원을 가리키며 당시 고려인의 처참했던 삶을 얘기하는 그의 목소리는 가볍게 떨렸다. 윤 세르게이 씨는 알마티 주에서는 이름만 대면 알 정도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옛 소련 시절 많은 훈장을 받았고 ‘노력 영웅’ 칭호를 듣기도 했다. 지금도 우쉬토베 지역에서 한국식 배추를 재배할 수 있는 사람은 그밖에 없어, 알마티의 한국 교민 대부분이 그가 공급하는 한국 배추로 김치를 담글 정도이다.

옛 소련 시절 성공한 고려인이라 할 수 있는 그도 옛 소련의 민족 차별에 대한 울분을 가슴에 담고 살아 왔다. 그는 거기에 항의하는 표시로 옛 소련 정권이 수여한 훈장을 한번도 패용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런 그가 21일의 기념비 제막식에는 훈장을 가슴에 주렁주렁 달고 나타났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참으로 망설였다. 그러나 오늘은 우리 고려인의 자긍심을 널리 보여주기 위해 처음으로 훈장을 달고 나왔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이 날 기념식 연설에서도 유일하게 우리말과 러시아 말을 섞어가며 연설했다.

윤 세르게이 씨가 우쉬토베에 실려온 것은 그의 나이 열네 살이던 37년 10월9일이었다.우쉬토베 역에서 1주일을 보낸 그의 가족은 그곳에서 4㎞ 떨어진 프룬제의 카자흐인 마을에 거처를 정했다. 그러나 그에게도 이 바쉬토베 지역은 깊은 인연을 지닌 곳이다. 바로 젊은 시절 19년 간을 바쉬토베를 둘러싼 고려인 집단농장(프라우다 소호즈)에서 지배인으로 일했기 때문이다. “된장 덕분에 살아 남았다”

21일 그가 오른 바쉬토베 정상은 농장 지배인이던 그가 아침마다 말을 타고 올라와 농사를 독려하던 바로 그 현장이었다.

지난 37년 추위를 피해 이 산기슭으로 온 고려인은 약 백여호, 5백∼6백 명에 이른다고 했다. 그들은 이곳 기슭의 땅을 파고 그속에 움막을 지었다. 지금도 그곳 현장에는 당시의 움막터가 두 군데 남아 있다. 입구가 풀에 뒤덮여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기는 했지만 누군가 파내려갔던 자욱은 선연히 남아 있다. 땅속 움막집의 원형은 21일 문을 연 고려인 이주 기념관에 재현되어 있다. 초원에 무성했던 갈대를 엮어 지붕을 이었고, 내부는 전통 초가 모습 그대로였다. 물건을 올려놓는 시렁이 있었고, 부뚜막에는 가마솥이 걸려 있었다.

땅굴막 위에 이곳을 찾는 이들의 마음을 숙연케 하는 장소가 한 군데 있다. 바로 집단 묘역이다. 이 집단 묘역은 윤 세르게이 씨가 농장 지배인이던 67년께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고려인이 땅굴막 생활을 청산하고 땅집(지상 주택)으로 이주한 뒤 이곳저곳에 흩어졌던 무덤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것이라고 했다. 어림잡아 백여 기 정도는 되어 보이는 이 묘역의 주인은 바로 37년부터 이곳에 끌려와 황량한 초원을 개간하다 쓰러진 고려인 1세이다. 봉분을 쓰지 않고 커다란 비석을 세워놓아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이곳은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통한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우쉬토베에 도착한 이후에도 죽어간 사람이 많았다. 특히 37년 겨울부터 그 이듬해인 38년 한 해를 보내기가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먹을 것이라고는 원동에서 떠나올 때 가져온 약간의 곡식과 현지에서 자라는 풀뿐이었다. 윤 세르게이 씨는 “고려인이 그나마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된장 덕분이었다”라고 회고했다. 된장이 있었기에 쑥이나 풀을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 구리 교수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8년에 걸쳐 약 9만5천여명이 이주했는데, 죽은 사람 가운데 절반 가량이 겨울에 사망했다고 한다.

한겨울 추위가 가시면서 고려인들은 점차 활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윤 세르게이 씨가 ‘고려인의 민족적 특성’이라고 말한 대로 특유의 근면함과 부지런함을 유감 없이 발휘했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이 황량한 초원을 벼농사가 가능한 땅으로 바꾸는 일이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물이 필요했다. 대역사가 시작되었다. 이곳에서 약 20㎞ 떨어진 카르타르(카자흐 말로 검은 풀이라는 뜻) 강을 막고 이곳까지 물길을 내는 일이었다. 그 일을 고려인들은 거의 맨몸뚱아리로 해냈다. 천 미하일 씨는 “그때 우리 부모 세대는 무척 고생했다”라고 말했다. 원래 이 일은 카자흐인과 러시아인에 의해 35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고려인이 이곳으로 이주해 온 이후 박차가 가해져 39년에 끝났다.근면·성실로 소수 민족 중 가장 두각

이주 초기의 온갖 역경을 이겨낸 고려인은 벼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점차 기반을 잡아갔다. 그 뒤의 여러 가지 통계에 따르면 고려인이 현지 소수 민족 사이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냈음을 보여준다. 즉 옛 소련 시절 이곳 카르타르 구역에서 36명의 노력 영웅이 배출되었는데 그 중 27명이 고려인이었다. 옛 소련 당국이 고려인에게 가했던 민족 차별을 감안하면 이는 대단한 숫자이다. 또 많은 고려인이 의사나 교사 같은 전문직에 진출해 한때는 카르타르 구역 대부분 학교의 교장을 고려인이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시련이 여기에서 끝난 것은 아니다. 특히 이곳 고려인 사회를 끊임없이 불안정하게 한 것은 바로 언어 문제였다. 카르타르 구역 인 발렌티나 부시장 (우쉬토베 고려인협회 회장)에 따르면 37년 이주 때부터 54년까지는 우리말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당시는 거주 이전의 자유가 제한되었다. 스탈린 사망 이후에는 거주 이전의 자유가 어느 정도 허용되는 대신 이번에는 우리말 사용이 금지되었다. 그래서 당시 우쉬토베의 많은 고려인들이 자식들에게 러시아 이름을 지어주고 모스크바 등의 대도시나 우즈베키스탄 등 다른 공화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옛 소련 당시 많은 고려인 학자가 이때 배출되었다.

한때 언어 문제로 혼란… 요즘은 이농으로 고민

90년 카자흐스탄이 옛 소련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또 다른 어려움이 닥쳐왔다. 즉 각급 기관에서 카자흐 언어만을 사용토록 하는 법이 92년에 제정되어 고위직에 진출했던 고려인이 또 한 차례 커다란 타격을 받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고려인은 집에서는 우리말을 쓰고 학교에서는 러시아 말을 배웠기 때문에 카자흐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인 발렌티나 부시장의 설명에 의하면 그 이전에 2만7천여명에 이르던 카르타르 구역 고려인 수가 그 이후 7천명으로 줄어들었다고 하니 그 충격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특히 고위직에 종사하던 고려인이 원동이나 모스크바 등으로 떠나버렸다. 언어 문제로 인한 고려인 사회의 방황은 95년 카자흐어와 함께 러시아어도 공용어로 사용할 수 있도록 법률이 개정되면서 일단 진정 추세이다.

언어 문제 외에도 옛 소련 해체와 함께 몰아친 경제적 어려움 역시 고려인 사회를 짓누르는 근본 문제 중의 하나이다. 카자흐스탄 공화국은 원래 농업과 목축업이 주산업 기반이었다. 제조업은 러시아나 인근의 아르메니아 공화국에 의존해 왔는데 분리 독립 이후 이같은 연결 고리가 모두 차단되어 버린 것이다. 농축산물 판로가 차단되었고, 만성적인 공산품 부족 및 식수난과 전력난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같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많은 젊은이가 우쉬토베를 떠나 알마티나 주변 도시로 계속 빠져나가는 것도 우쉬토베 고려인 사회가 안고 있는 커다란 고민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이유로 이곳을 떠나간 사람에게도 우쉬토베는 그들 마음 속의 성지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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