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박경리 작 (전 16권)
  • 최유찬 (연세대 국문과 교수) ()
  • 승인 1997.02.1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작품 전체를 돌이켜 한 형상으로 압축하길
세계 문학사에 유구한 전통을 지닌 ‘저주받은 가문 이야기’. 이 비극적인 소재를 기본 모티프로 한 박경리의 대하 소설 <토지>는 그러나 개인적인 영웅 이야기가 아니다. 외면적으로는 경남 하동 평사리라는 한 마을 사람들이 집단적 주인공이지만, 실제로는 한민족 전체가 주인공인 일대 민족 서사시인 것이다.

봉건 사회의 신분 질서가 동학혁명의 후폭풍 속에 들어 크게 동요하던 한말. 평사리의 참주인 최참판가와 그 가문의 그늘 속에서 살아가는 농민들은 누대에 걸쳐 맺어온 관계를 재정립해야 할 위기에 부닥친다. 동학 장수 김개주가 윤씨 부인을 겁탈하면서 시작된 인연의 고리들로 인해 최참판가가 내부로부터 붕괴되어 갈 뿐만 아니라, 바깥에서 불어오는 외세의 바람에 의해 서로 등을 맞대며 살아온 농민들까지 오랫동안 정 붙이고 살아온 마을과 농토에서 내쫓긴 것이다.

그들이 최참판가의 마지막 영주 서희와 함께 쫓겨간 곳은 망국의 백성들이 새롭게 정착하기 시작한 북간도. 평사리 사람들은 또다시 살길을 찾아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로 흩어져 가지만, 마음 속에서는 한결같이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소망뿐이다. 이같이 바깥으로 뻗어 나가고자 하는 원심력과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구심력이 맞물려 일으키는 선풍 속에 평사리 사람들이 빼앗긴 토지를 되찾은 서희를 따라 애써서 돌아온 곳은 고향 근처의 진주라는 도시.사건 전개 따라 판소리 즐기듯 읽어야

진주는 평사리 사람들에게 옛 고향이 아닐 뿐더러 제국주의의 서슬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도시 공간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각자의 형편에 따라 이곳저곳으로 흘러가서 몸을 붙이고 날로 엄혹해지는 식민 통치의 질곡을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소설 속의 이야기는 세대가 바뀌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동북아 전체를 무대로 하여 펼쳐지는 한민족의 시련과 고난을 그리는 데 치중한다. 그것은 작품의 진행 가운데 소설 속의 시공간이 확대된 데에도 한 원인이 있지만, 좀더 내밀한 의미는 그 고난과 시련 속에서 한민족 전체가 벌이는 민족 해방 투쟁을 형상화하려는 데서 찾아야 한다.

<토지>를 읽는 방법은 기왕의 독서 관행을 따를 때 대체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사건 전개를 중심으로 읽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주로 극적인 사건들의 전개 속에서 얻어지는 긴장감을 즐기려는 것으로서 <토지>에서는 남녀 주인공들의 열정과 그로 인한 고통 및 앙금처럼 차곡차곡 쌓이는 비애를 주시하면 좋을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작품의 각 부분을 그 자체로 즐기는 방법이다. <토지>는 내면적으로 극적 형식이어서 각 부분이나 장면의 독립성이 두드러진다. 따라서 전체 줄거리에 구애될 필요 없이 판소리의 부분창을 즐기듯이, 장면 장면의 전개와 거기에 나타나는 인물들의 심리나 성격, 대화의 다채로운 전개, 질감스런 사투리나 전통적인 속담과 격언, 대화 속에 나타나는 각종 사물에 대한 색다른 관점들을 찾아 내면서 독서 과정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세 번째 방법은, 필자가 이 작품의 평론서인 <<토지>를 읽는다>를 쓰는 데 사용한 방법으로서, 기본적으로 전체 구조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앞의 두 방법과 약간의 차이를 갖는 방법이다. 즉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작품 전체를 회상하면서 그 구조를 단번에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필수인 방법이다. 원고지 4만장 분량의 작품을 단번에 파악한다는 것이 실제로 가능할까 하는 회의가 생길 수도 있으나, 필자의 경험으로는 그다지 어려울 것이 없다.

하나의 작품은 하나의 대상을 표현한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토지>라는 작품에서 표현된 한 가지 사물의 모습은 무엇일까 하고 그 전체 형상을 포착하려고 노력하는 순간 그 광대무변한 것 같던 작품이 일목요연하게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렇게 전체가 파악되면 작품 각 부분들의 의미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하고 독서 과정 자체가 즐거워지는 것이다.

이 점에서 <토지>는 다른 어느 소설보다도 주제의 형상화에 성공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토지>의 형상(태초의 우주 대폭발(빅뱅)에서 오늘날 별이 빛나는 밤하늘의 모습으로 전개된 전체 우주 역사)을 한 번 파악한 뒤 그 아름다움과 깊고 넓은 사상을 생각하느라 몇날 며칠 동안 밤잠을 설쳤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