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년 올해의 인물' 사법부. 구습 깨고 우뚝 선 ‘인권의 보루’
  • 朴晟濬 기자 ()
  • 승인 1996.12.2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법부는 더 이상 ‘권력의 시녀’가 아니다.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입각해 때로는 행정부의 무리한 법 집행 관행에 제동을 걸고, 때로는 국가 권력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람들의 손을 과감하게 들어주기 시
<시사저널>은 89년 창간 이래 매년 말 ‘올해의 인물’을 선정해 왔다. 개인(혹은 단체)의 정의롭고 가치 있는 행동의 결과가 우리 사회의 흐름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틀지어 나가게 하는 동력이 된다는 점에서 ‘올해의 인물’ 선정은 단순히 해당자에 대한 상찬이 아니라 더 나은 사회를 갈구하는 희망의 작업이다. 그동안 이회창 선관위원장(89년). 이문옥 감사관(90년), 최 열 공추련 대표(91년), 방희선 광주지법 판사(92년), 임권택 영화 감독(93년), 서울 남산(94년), 조 순 서울시장(95년)에 이어 올해는 사법부를 뽑았다. <시사저널>은 인권 신장과 인본주의적 법치 가능성을 보여준 사법부의 변화를 의미있게 받아들였다. <편집자>

 
바쁘고도 힘든 한 해였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 기반을 확대·심화하고, 법의 지배를 관철하여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든다는 면에서 볼 때 올 한 해는 매우 희망적이고 보람찬 해였다. 특히 인권 수호의 최후 보루라 할 사법부의 놀라운 변신은 주목할 만하다.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 인권 보장을 천명한 대한민국 헌법 제2장 제10조 바로 다음에는 간명하지만 엄숙한 민주주의 명제가 등장한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헌법 제11조).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진다. 누구든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체포·구속·압수·수색 또는 심문을 받지 아니하며, 법률과 적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처벌·보안처분 또는 강제 노역을 받지 아니한다’(헌법 제12조).

48년 정부가 수립되면서 민주주의의 금과옥조인 이같은 문구가 헌법 조항에 들어갔을 때, 그것이 의도하는 바는 분명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치(法治)를 통해 항구적으로 민주주의를 실천하겠다는 것이었다. 헌법은 이를 위해‘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 속한다’(헌법 제101조)고 함으로써 사법권의 최종 귀속처를 못박았으며,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헌법 제103조)고 규정함으로써 그 독립성을 보장했다.

시국·공안 사건에 영장 기각·무죄 판결 잇달아

 
 
 
 
그렇다면 국가로부터 권력의 독립성을 부여받은 사법부는 그동안 얼마나 제구실을 했던가. 극히 최근까지도 이에 대한 대답은 긍정적이지 못했다. 93년 서울지법 소장 판사들이 대법원에 개혁 건의서를 냈을 때 상황은 분명히 드러났다. 소장 판사들은 건의서에서 ‘국가의 정치 권력이 법의 이름을 빌려 민주적 기본 질서와 국민의 기본권을 유린할 때에 그것의 수호를 제1차적 사명으로 하는 사법부는 마땅히 그것은 법이 아니라고 선언했어야 한다. 그러나 지난 시절 우리 사법부는 그와 같은 선언을 침묵으로 대신하였고 나아가 그것이 정의임을 선언할 것을 강요하는 현실의 권력 앞에 무력하기도 하였다’라고 고백했던 것이다.

그런 법원이 올해 특히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다. 치과의사 모녀 살인 사건, 인기 가수 김성재씨 피살 사건 등 세인의 눈길을 끈 몇몇 사건 재판에서 판사들은 증거주의 원칙에 입각해 심리한 끝에 무죄 판결을 내렸다. 각종 시국·공안 사건의 재판 관행도 크게 수정될 조짐을 보였다. 간첩 김동식을 만난 사실을 고지하지 않았다는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가 재판정에서 무죄 판결이 난 허인회씨 사건을 필두로 하여, 숱한 시국·공안 사건에 대해 법원이 잇달아 영장 기각·무죄·집행유예 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법원은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을 법정에 세워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했을 뿐만 아니라 지난 11월4일에는 이 재판과 관련해 법정 출두 요구가 빗발쳤던 최규하 전 대통령을 구인하여 법정에 세우는 드라마를 연출했다.

선거법 위반 사건을 다루는 태도도 달라졌다. 옛날 같으면 권력의 눈치를 보았을 법원과 법관들이 지난 4·11 총선 과정에서 발생한 선거법 위반 사건 재판에서는 야당 후보만 사법 처리했다는 의심을 받지 않으리만큼 이례적 판결을 잇달아 내렸다. 사법부는 더 이상 ‘권력의 시녀’가 아니었다.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입각해 때로는 행정부의 무리한 법 집행 관행에 제동을 걸고, 때로는 국가 권력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람들의 손을 과감하게 들어줌으로써 인권의 최후 보루라는 사법부의 참모습을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올해는 사법부가 재판의 기본 원칙인 증거주의와 무죄 추정 원칙을 재판을 통해 확립하려고 노력한 해였다. 특히 지난 6월, 피고인에 대해 사형을 선고한 1심 판결을 깨고 무죄를 선고한 치과의사 모녀 살인 사건의 항소심 판결은, 증거주의 원칙을 확립했다는 점에서 이정표가 될 만한 사건이라고 인권운동가들은 입을 모은다.
“범인 10명 놓치더라도 무고한 희생자 1명 막는다”

이 사건은 사건 발생 당시부터 사회적으로 부족할 것이 없는 치과 의사 가정에서 불륜과 치정이 얽힌 존속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는 점에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검찰은 사건 당사자 이도행씨를, 95년 6월 서울 불광동 집에서 역시 치과 의사인 부인 최수희씨의 불륜 사실을 알고 최씨와 딸 화영양을 목졸라 숨지게 한 뒤 욕조에 유기하고 불을 지른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이씨는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2심 공판이 열린 날은 96년 6월26일. 이 날 공판에서 재판부(서울고법 형사4부)는‘형사 재판에서 유죄 인정은 법관으로 하여금 의심할 여지가 없을 정도의 확신을 생기게 하는 증명력을 가진 엄격한 증거에 의하여야 하고, 위와 같은 증거가 없다면 설령 피고인이 유죄라는 의심이 간다 하더라도 피고인의 이익에 따라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형사법의 대원칙’이라며 이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에 대해 이씨를 변론한 김형태 변호사는 이렇게 평가했다. “형사소송법의 정신은 ‘범인 10명을 놓치더라도 무고한 희생자 1명을 막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었다. 법원은 심지어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재판에서도 사법적 정의의 핵심인 절차를 무시하기 일쑤였고, 진실을 규명하기보다는 법원의 편의에 관심을 집중해 왔다. 이런 면에서 치과 의사 모녀 살인 재판의 의의는 크다. 담당 재판부는 이번 재판을 통해 진정한 형사 재판이 무엇인가를 보여줬으며, 이를 통해 증거력 위주 소신 판결의 물꼬를 텄다.”

그의 평가는 현실에 그대로 들어맞는다. 지난 11월 인기 가수 김성재씨를 죽였다는 혐의로 1심에서 무기 징역을 선고 받았던 김 아무개씨가 2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사건을 비롯해,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피고에 대해 무죄 선고를 내린 형사 사건 재판이 잇따랐다.

모든 재판의 기본인 증거주의를 강조한 것은 사법부의 ‘행정부 예속’을 입증할 때 종종 거론되는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등 이른바 시국·공안 사건 재판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예전 같았으면 실형을 선고했을 사건들에 대해 사법부가 영장을 기각하거나 집행유예·무죄를 선고하는 비율이 부쩍 높아진 것이다. 지난 국정감사 때 국회에 제출된 자료에 따르면, 공안 사범에 대한 실형률은 한때 39.9%에 이르던 것이 올해 16.8%로 뚝 떨어졌다. 공안 사범에 대한 구속영장 기각률은 92년 0.8%에 그쳤다가 올해 5.9%로 증가했다(이하 아래 도표 참조). 특히 각종 시국 사건에 대한 영장 기각·무죄 판결은 하급심에서 두드러져, 일부 인권운동가들은 이를 ‘하급심의 반란’이라고 이름 붙이기까지 했다.

남파 간첩 김동식을 두 차례 만나고도 이를 당국에 신고하지 않은(국가보안법상 불고지) 혐의로 긴급 구속되었다가 지난 11월 1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허인회씨(전 고려대 총학생회장) 사건은 올해 벌어진‘하급심 반란’의 본보기이다. 허씨를 기소할 때 검찰이 법원에 제출한 공소 요지는 허씨가‘김동식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남파되어 대남 적화 통일 사업을 벌이는 간첩으로서 피고인을 포섭하려 한다는 정(情)을 알면서도 이를 수사기관에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재판부는 검찰의 공소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간첩 김동식의 진술은 믿을 수 없는 반면, 피고측 알리바이는 확실하다고 판단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구속영장 실질 심사제도 획기적인 시도

 
시국·공안 사건에 대해 사법부가 무죄 판결을 내리거나 구속 단계에서 영장을 기각한 사건은 허씨 사건 외에도 많다. 7월에는 지난해 11월 간첩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안기부에 구속되었다가, 올해 1월 간첩 혐의와는 상관 없이 반국가단체 찬양·고무·동조(국가보안법 제7조 1항)와 이적 표현물 제작·배포 위반(동 5항)으로 기소된 박충렬씨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지난 8월 연세대 사태 이후에는 한총련 관련자에 대한 엄중한 사법 처리 분위기에서도 구속 영장이 기각되는 사례가 발생하기도 했다. 인권운동사랑방 박래군 사무국장은 이에 대해 “아직도 상급심으로 올라갈수록 공안 사건, 특히 노동 관련 사건 판결은 여전히 보수적이지만, 법원이 과거 공소장 베끼기식 판결 관행에서 탈피하려고 애쓰는 모습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평한다.

사법부의 변화가 판결을 통해서만 감지되는 것은 아니다. 대법원은 올해 초 국민을 위한 사법부 상(像)을 정립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역점 사업 20여 항목을 설정하여 정력적으로 추진해 왔다. 그동안 사법 개혁 과제로서 논란이 되어왔던 법조인 양성 방안을 확정하고 사법연수원 운영 방안을 새롭게 짰으며, 재판 업무의 효율화를 위해 종합법률정보제공센터 구축 방안을 확정하고 시·군 법원을 확대한 것 등은 그간 추진해온 성과의 일부다. 특히 5년여 연구 끝에 지난 12월 초 대법원이 확정 발표한 구속영장 실질 심사제 운용 방안은, 재판에서 증거주의 및 무죄 추정 원칙 확립 노력과 아울러 국민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내년부터 시행될 구속영장 실질 심사제의 기본 취지는, 구속 영장을 ‘증거 인멸·도주 우려’의 잣대로만 심사함으로써 인신 구속에 신중을 기한다는내용으로(<시사저널> 제373호 인터뷰 참조), 신체의 자유 등 헌법에 명시된 인권을 보장하는 데 획기적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사법부의 이같은 변화가 최근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른‘사법 개혁’ 요구 내용을 완전히 만족시킨다고 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법조 일선에서도 “최근 눈에 띄는 변화는 극히 예외적인 것일 뿐,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법원 또는 법관의 태도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라는 평가가 들린다.

그러나 속성상 잘한 일보다는 잘못한 일을 들춰내기 마련인 인권운동 단체들에게서조차 사법부를 향한 비판의 어조는 한결 누그러져 있다. 참여연대 산하 사법감시센터 문혜진 간사는 “법원도 법원이지만 이제는 수사기관이 달라져야 할 때가 아닙니까”라고 되묻는다. ‘사법 감시’ 화살은 사법부에서 행정부 쪽으로 향하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