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신문이 지적한 한국의 야만성
  • 마닐라·김 당 기자 ()
  • 승인 1995.09.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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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신문들, 억압적 노동정책·자본가의 탐욕 강력 비판
필리핀은 세계에서 해외 이주 노동자(이미그란트)가 가장 많은 나라에 속한다. 달리 말하면 세계 제1의 노동 수출국인 셈이다. 한때 아시아 2위의 부자 나라였지만 70~80년대 경제 정책이 실패해 아시아 빈국 가운데 하나로 전락한 필리핀이 인력 수출을 시작한 것은 70년대 중반부터이다. 당시 마르코스 대통령은 실업률 감소와 외화벌이를 위해 자국민의 해외 취업을 적극 권장했다.

현재 필리핀 정부의 공식 발표만으로도 해외 취업 노동자 수는 3백50만명에 이른다. 이는 전체 인구의 5%에 해당한다. 그러나 민간단체에서는 세계 1백20개국에 4백50만~6백만명 가량이 나가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이 해외 이주 노동자들이 송금하는 외화는 국부의 20%를 차지하리만큼 막중하다. 따라서 이들의 목소리도 클 수밖에 없다. 정부 노동부 산하에는 해외 이주 노동 문제만 전담하는 이주고용국(POEA)과 이주노동복지국(OWWA)이 따로 있고 전문 라디오 방송국도 있을 정도이다.

이처럼 이주 노동자가 많은 배경에는 아시아에서는 드물게 국민 대다수가 카톨릭인 필리핀의 높은 인구 증가율과 20%에 이르는 실업률 그리고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이점과 해외 경험이 많은 데 따른 비교적 높은 임금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한국의 경우에도 필리핀 노동자들은 인기가 좋고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고 있다. 92년까지만 해도 국적별 외국인 노동자 수에서 필리핀인은 1위였다(92년 10월 국정감사자료). 그러다 중국 조선족 교포가 대거 몰려온 93년부터는 계속 중국이 압도적 1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3만여 명으로 추산되는 필리핀인은 조선족 교포를 제외하면 외국인 노동자 중 가장 많다.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8월 말 현재 외국인 수는 10만2천여 명(불법 체류자 6만7천4백여 명과 산업기술연수생 3만5천여 명)에 이르고 있다.

필리핀 노동자들은 영어를 사용하는 이점 때문에 그나마 말이 통해 한국에서 일하는 네팔이나 방글라데시 노동자에 비해 산재율이 낮은 편이다. 그렇지만 필리핀의 처지에서 보면 사정은 다르다. 홍콩·싱가포르·대만·일본 등 필리핀 해외 이주 노동자가 많이 나가 있는 다른 나라에 견주어 한국에서 일한 노동자의 산재율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물론 이처럼 상대적으로 높은 산재율은 세계 최악의 산재 국가인 한국의 산재율(94년 1.25%)과 일본(92년 0.39%), 대만(92년 0.45%)의 산재율을 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필리핀 해외 노동자를 돕는 ‘미그란테’의 포 그라텔라 회장(오른쪽 인터뷰 참조)의 표현을 빌리면 ‘기계가 국적을 가려서 손가락을 자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 국민은 이해를 못한다. 왜 한국에서 일한 필리핀 노동자 가운데는 산재자가 많은지, 왜 ‘리갈’(합법적 산업기술연수생)이 ‘일리갈’(불법체류 노동자)보다 임금이 적고 산재를 입어도 보상을 받을 수 없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필리핀 유력 일간지 <인콰이어러>는 ‘필리핀 노동자들의 아버지 세대는 유엔군의 이름으로 한국전에 참전해 사망했는데 이제 젊은 노동자들은 돈 벌러 한국에 가서 산재로 사망하고 있다’고 보도하는 것이다.

또 진보적 일간지인 <투데이>는 최근 ‘한국에서 고생하는 필리핀 노동자 약 3만2천명의 수효는 여전히 이 아시아의 용에서 일하는 필리핀 노동자의 10%가 상처를 입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같은 산재 비율은 개인적인 사고나 우연으로 돌리기에는 통계적으로 너무 높은 수치이다’라고 비판했다. 이 신문은 한국에서 손가락을 잘린 산재자들의 사진을 싣고 ‘한때 생산의 도구였던 이 손들은 전쟁으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탐욕스런 외국 사업가들과 불법 송출업자의 희생양’이라는 설명을 달았다.

“연수생이 살 길은 한국서 도망치는 것”

필리핀 노동단체들과 언론이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산업기술연수제이다. 일반 노동자와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연수비 명목의 낮은 임금에 묶이고 산재 보상에서 제외되는 한국의 기이한 제도는 해외 이주 노동 경험이 많은 필리핀 노동자들이나 정치 의식이 높은 노조의 눈에 ‘부자 나라의 야만성’으로 비치는 것이다.

이같은 한국의 연수제는 비슷한 형태인 일본의 좌학제(6개월 연수 후 근로자 대우)나 대만의 취업연수제(월 약 43만원)와 비교해도 그렇고, 오히려 산업연수생의 임금이 불법 체류 노동자의 절반도 안되고 근로기준법상 의료보험과 최저임금밖에는 보장이 안되는 한국내 연수생 지위에 비추어도 매우 불합리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포 그라텔라 회장은 “한국의 열악한 노동 조건에서 연수생들이 사는 길은 도망가는 것이다. 연수제가 존속되는 한 한국 정부는 합법 노동자(연수생)들의 불법을 조장하는 셈이다”라고 지적했다.

필리핀에서의 산재자 모집 활동에서도 확인되듯 최근 미그란테 사무실을 찾는 한국 관련 노동자들은 대개 산재를 입고 보상에서 제외된 채 최근 몇달 사이에 귀국한 산업연수생들이다. 불합리한 제도는 문제의 지속성을 확인시켜줄 뿐이다. 한국대사관 앞에서 벌인 피케팅에서 등장한 한국 제품에 대한 불매 운동 위협은 아직 엄포에 불과하다. 그러나 필리핀 정국을 긴장시켰던, 싱가포르에서 살인 혐의로 교수형에 처해진 필리핀 가정부 플로르 콘탐플라시온 사건에서 보듯 들불처럼 번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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