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서 지탄받는 한국의 노동정책
  • 마닐라/글·사진 김 당 기자 ()
  • 승인 1995.09.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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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재·변사 후 귀국한 필리핀 노동자 현지 취재/큰 대가 치를 ‘착취’ 근절해야
필리핀의 수도 메트로 마닐라는 시 4개와 빌리지 13개로 구성돼 있다. 그중에서 억만장자들의 주택가와 은행, 고급 호텔, 쇼팅센터 같은 상업시설들이 즐비한 마카티(Makati)는 마닐라뿐만 아니라 필리핀 전역에서 가장 고급스런 지역이다. ‘부자 나라’인 한국의 필리핀 주재 대사관이 마카티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별로 낯설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난 9월6일 한국대사관 앞에서는 행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매우 기괴한 광경이 벌어졌다. 손가락과 팔이 잘려나갔거나 목발을 짚은 불구자들이 한국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인 것이다. 필리핀인들이 한국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물론 한국대사관으로서도 이같은 반한 시위는 처음 겪는 일이다.

필리핀의 해외 이주 노동자를 지원하는 ‘미그란테(Migrante International)’라는 비정부 단체(NGO)가 주도한 이 시위에는 40명쯤이 참여했다. 그중 대부분은 한국에서 일하다 임금을 받지 못하거나 산재를 입고서도 보상을 받지 못한 채 쫓겨난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이었다. 이들이 불구가 된 손과 팔로 치켜든 피켓에는 ‘산업연수생 제도를 철폐하라’ ‘필리핀 노동자는 한국인의 노예가 아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한국 경제의 도구가 아니다’ 같은 문구가 영문과 더러는 한글로 적혀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요구와 주장 속에 담긴 본질은 한국에서 잃은 팔·다리 값이나 목숨값의 보상보다는 정의를 구하는 것이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허울뿐인 ‘불법 취업 외국인 보호대책’

꼭 1년 전이다. 지난해 9월16일 노동부는 외국인 산재 노동자에 대한 산재보상금 지급 등을 내용으로 한 ‘불법 취업 외국인 보호 종합대책’(종합대책)을 발표했다. 당시 노동부는 이 종합대책을 마련한 배경을 “그동안 외국인 근로자에 대해서는 인도적인 차원에서 94년 2월부터 최소한의 보호를 제공하고 있으나, 외국인에 대한 임금 체불과 재해보상에 관한 문제가 계속 제기되고 해당 외국에서도 보호가 미흡하다는 지적이 있어 이와 같은 종합대책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노동부는 “외국인을 부당하게 대우한 사례가 누적되고, 이들의 피해 상황이 알려지면서 해당국에서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크게 손상되고 있다”는 지적도 잊지 않았다.

당시 발표한 종합대책의 주요 내용을 보면, 산재보상의 경우 △‘외국인 재해보상 신고센터’를 설치해 과거 취업중 재해를 입고 보상 없이 귀국한 사람들을 신고하도록 촉구하고 △재외공관을 통해 보상금 청구서가 송부되면 노동부가 재해 사실을 확인해 요양비·휴업급여·장해급여·유족급여 등 필요한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또한 5인 이상 사업체로서 산재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사업주가 산재보상 확인을 기피할 경우에는 지방 노동관서가 직권으로 조사하여 보상을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종합대책은 점점 거세진 국내외의 비난을 모면하기 위한 겉치레용이었음이 드러났다. 한국대사관 앞에서 치켜든 필리핀 노동자들의 잘린 손과 팔은 바로 이행되지 않은 약속에 대한 저항의 표시인 것이다.

‘갈락’은 타갈로그어로 기쁨을 뜻한다. 그러나 아르넬 시 갈락씨(34)한테서는 기쁨을 찾을 수가 없다. 그는 돈 벌러 간 한국에서 불법 체류 노동자로 일하다 오른팔과 함께 자신의 직장과 기쁨도 잃어버렸다. 6남매의 가장인 그는 필리핀에서 교통부 산하 지방관서의 공무원으로 일하다 자식들 학비를 벌려고 91년 12월 한국에 왔다. 그는 경기도 광주군에 있는 ㅎ카펫 공장에서 다른 필리핀 노동자 5명과 함께 일했다. 그러다 93년 5월에 사단이 났다.

사고가 난 그날 아침에도 여느 때처럼 작업 준비를 위한 기계(롤링 머신) 청소는 갈락 몫이었다(작업 준비나 마무리 일은 사실상 잔업에 해당하지만 대개의 외국인 노동자들한테는 덤으로 하는 ‘공짜 일’이다). 그러나 그날 롤링 머신은 갈락의 장갑을 말아먹더니 순식간에 손과 팔까지 먹어버렸다. 한달간 병원에서 치료받는 동안 단 한번 병원을 찾은 사장이 그에게 한 말은 “퇴원하는 대로 곧장 김포공항으로 가 귀국하라”는 것이었다. 보상 얘기는 아예 꺼내지도 못하게 했다.

다행히 그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돕는 한 목사를 통해 민사배상을 청구해 사장으로부터 천만원을 받아냈다. 그에게는 큰 돈이었지만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갈락은 팔값의 절반을 떼어 이 목사한테 헌금했다. 그는 큰 돈을 헌금한 까닭을 “당시 나한테는 아무런 권리가 없었다. 그래서 돈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남은 돈마저 치료비로 써버리고 난 지금 그한테는 한탄과 슬픔밖에 남은 것이 없다. 몇차례 취직을 시도해 보았지만 불구자인 그를 반기는 직장은 아무데도 없었다. 가족을 부양하려다 피부양자 신세가 된 갈락한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머리가 가려워 자기도 모르게 팔을 치켜들었다가 손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서는 무력감에 빠지는 자신을 발견할 때이다.

이제 그에게 남은 길은 한국 정부에 산재보상을 청구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산재보상을 받더라도 그는 이미 사업주와 민사배상에 합의했기 때문에 사업주 공제액을 빼고 난 보상액은 백만~2백만원 정도일 것으로 예상된다. 그는 “그것을 알지만 돈이 문제가 아니라 필리핀 산재 노동자들의 실태를 알리고 그들의 인간적 권리를 찾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산재보상을 청구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마닐라의 대표적 슬럼가인 스모킹 마운틴에 사는 로렌조 로케씨(30)는 늘 수건으로 오른손을 덮고 다닌다. 부인과 네 달 된 아들의 가장인 그는 전북 익산군의 한 플라스틱 공장에서 일하다 92년 4월 컨베이어 벨트에 오른손이 뭉개진 사고를 당했다. 그는 여섯 달 병원 신세를 지는 동안의 휴업급여는 물론 퇴원 후 일한 세 달치 급여도 한푼 못받은 채 회사에서 쫓겨났다.

그후 로케는 친구집에서 기거하면서 다른 직장을 찾다가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한테 잡혀 93년 11월 강제 출국 당했다. 그는 자기가 잡힌 것을, 자기를 공장에서 쫓아낸 것만으로는 못미더워한 사장이 후환(산재보상 요구)을 없애려고 신고한 탓으로 믿고 있다. 그는 한국에서 처음 일했던 서울 장위동의 한 공장에서도 월급(32만원)을 일곱 달치나 받지 못했다. 불법 체류자 신분인 그는 처음 석 달분 월급(96만원)을 사장한테 집으로 부쳐 달라고 맡겼으나 송금되지 않았고, 나머지 네 달치는 회사가 망해 버리는 통에 손에 쥐어보지도 못했다.

벨트와 마찰돼 살이 녹아 엉겨붙은 그의 손은 겉보기에는 흉하게 뭉개졌지만 X선 사진에는 손가락뼈가 다 나타난다. 사고 당시 의사도 수술을 받으면 손가락 분리가 가능하다고 말했지만 사장이 수술비는 댈 수 없다고 해 손가락이 엉겨붙은 채로 봉합했기 때문이다. 로케의 소망은 산재보상금으로 손가락 분리 수술을 받는 것이다.

오른팔이 흉칙하게 문드러진 알버트 아마미오씨(29)의 재수술에 대한 기대는 더 간절하다. 그는 경기도의 한 주방기구 생산업체에서 절단공으로 일하다 스테인리스 스틸과 함께 손이 프레스 기계에 미끌어져 들어가면서 사고를 당했다. 그 또한 두 달 동안 치료를 받고 퇴원하자마자 사장에게 이끌려 93년 7월에 김포공항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보상은 한푼도 못받았다.

그는 당시 외국인 노동자들은 산재보상을 못받는 것으로 알고 있었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이국땅에서 ‘마음까지 아파’(향수병) 집에 가는 것이 좋겠다는 사장의 말에 쉽게 동의했다. 그후 그는 한국 정부가 산재보상을 해준다는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지만 우연히 텔레비전 프로(<호이 기싱!>)에서 한국의 민간단체가 한국에서 일하다 산재를 입은 피해자를 찾는다는 것을 보고서 미그란테를 찾게 되었다고 말했다.
부상 후유증으로 정신병… 보상금은 80만원

프레스공이던 호세 발타자르씨(41)는 오일 필터를 만드는 충청북도의 한 공장에서 한달에 무려 3백66시간씩 일해야 했다. 한달에 한번의 일요일 휴식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일요일에도 그는 다음날 작업 준비를 위한 일을 해야 했다. 그의 계약서에는 한달에 무려 3백99시간 일해야 40만원을 받는 것으로 돼 있었다. 그의 사례를 접수한 미그란테의 한 관계자는 “사람은 물론 기계도 이처럼 장시간의 과도한 노동에서 사고가 나지 않는다면 비정상”이라고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고장난 프레스 기계에 손가락을 잘리는 사고를 당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는 사고 후유증으로 정신 이상 증세까지 나타났다. 한달 보름 간의 병원 치료 뒤에 다섯 달을 더 일했으나 회사는 그가 예전처럼 정상 근무(한달 3백60시간)를 못하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을 이용해 한달에 10만~20만원씩밖에 주지 않았다. 귀국할 때 그가 보상비조로 받은 돈은 천달러(약 80만원)가 전부였다. 3남매의 가장인 그는 “가난했기 때문에 한국에 갔는데 한국에서 사고를 당한 뒤 내 생활은 더 곤궁해졌다”고 말했다.

마닐라에서 차로 6시간쯤 걸리는 루손 섬 남부 바탕가스 지방의 바날로 마을에 사는 레스토 라미레즈씨(44)에게 한국은 소문으로 듣던 ‘약속의 땅’이 아니라 ‘비극의 땅’이었다. 처와 4남매의 가장인 그는 케손시티의 신발공장에서 관리직 사원으로 일하다 92년 10월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한국에서 처음 다섯 달 동안 일한 봉제공장은 그가 유일하게 온전한 월급(35만원)을 받은 곳이었다. 그는 중풍으로 쓰러질 때까지 한국에서 2년간 다섯 직장을 전전하는 동안 절반 이상 기간의 월급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 다섯 번째 직장인 서울 봉천동의 한 봉제공장에서 과로로 쓰러졌다. 한국대사관 앞에서 벌어진 항의 시위에 참석하려고 부축을 받아야 하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마닐라에 온 그는 “작업시간이 너무 길고 일이 너무 힘들어 병이 났다. 근로기준법상의 하루 8시간 노동을 외국인들한테도 동등하게 적용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들에게는 그래도 엄격한 제한이 따르긴 하지만 보상 받을 길이 열려 있다. 이들은 산재보상 신청에 대한 심사 절차를 거쳐 한국에서의 산재가 입증되면 물적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외국 인력 도입의 편법으로 이용되는 이른바 산업기술연수생들은 불법 체류 외국인 노동자들에 비해 임금은 물론 재해 보상 등에서 훨씬 더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다. 이들은 노동자가 아닌 연수생이라는 명목으로 급여가 최저임금 기준(26만4천원)으로 묶여 있는 데다가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연수생들의 경우(94년 12월 현재 월 평균 임금 30만원에 위험등급 3급 기준) 이들을 데려온 중소기업중앙회가 단체로 가입한 개인상해보험에 의해 보상을 받기는 하지만 △치료비 보상액이 최고 2백만원(산재보험은 전액)에 불과하고 △업무상 질병에 대한 보상이 전무할 뿐더러 △휴업보상금도 하루 일당 7천원 기준(산재보험은 평균 임금의 70%)으로 책정하고 있다. 또 이들은 죽어도 최고 한도인 1천5백만원밖에 받지 못한다.

그렇다고 이들에게 산재보험이 적용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임금(연수비) 자체가 낮아 산재보험이 적용된다고 해도 휴업급여·유족급여 등이 임금을 기준으로 산정되므로 실질적인 보상은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들의 임금 수준은 실질적인 기술연수를 꾀하는 일본의 연수생 제도나, 월 5백40달러(약 43만원) 기준의 대만 취업연수에 견주어도 매우 낮은 수준이다.

지난 4월부터 필리핀에서 산재자 등록 활동을 펴온 ‘외국인노동자 피난처’의 조명숙씨(26·59쪽 상자 기사 참조)는 “연수는 미숙련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런데 말만 산업기술연수생이지 미숙련자에게 기술은 가르치지 않고 일만 시키되 막상 사고가 나면 노동자가 아닌 연수생이기에 산재보상에서 제외하는 제도의 모순이 문제이다”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사실상 노동자인 연수생의 근로자 지위를 인정하고 급여를 현실화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한국대사관 앞에서 벌어진 시위가 ‘노예제도인 산업기술연수제 폐지’ 쪽에 초점이 맞춰진 것도 그 때문이다.

대학을 3년 마치고 산업기술사로 일하던 폼 피오씨(27)가 산업기술연수생으로 한국에 온 것은 94년 11월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기술을 습득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송출 회사인 ‘필리핀 인력회사’에 한 달치 월급에 해당하는 5천페소(약 16만원)를 지불하고 계약을 맺었다. 그가 추가로 2천페소(약 6만4천원)를 내고 마닐라에서 1주일간 받은 오리엔테이션은 한국 문화에 관한 것이 전부였다. 그는 금요일에 김포공항에 도착해 서울 여의도의 중소기업중앙회에서 토·일요일을 쉬고 월요일에 충남 천안에 있는 ㅇ산업에 도착하자마자 작업에 배치되었다.

그가 기술을 배우러 온 연수생 신분이라는 사실은, 사장은 물론 같이 일하는 한국인 직원 누구에게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에게 기술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배운 것은 단지 하루 종일 콘크리트를 배합하는 기계의 단추를 몇개 누르는 것뿐이었다. 그가 하루 10시간씩 일하고 받은 급여(해외연수자 1호봉)는 기본급(21만3천원)과 연장·야간 근로수당을 합쳐 30만원 정도였다. 그러다 올해 1월 작업중 오른쪽 다리가 기계 체인에 끼여 바스러진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

그는 한국에서 일한 기간보다 더 긴 두달 보름 간의 병원 신세를 면하자마자 곧장 김포공항으로 보내졌다. 연수생이기에 보상은 한푼도 없었다. 그가 한국에 가려고 들인 돈은 총 80만원쯤이었으나 지금 그의 수중에 남은 것은 치료비로 형수한테 꾼 빚뿐이다. 그의 다리와 대퇴부 속에는 아직 한국에서 박은 철심(지지대)이 남아 있다. 그 철심을 빼내기 위해서는 수술비가 필요한데, 실업률이 20%나 되는 필리핀에서 목발 신세인 그를 받아들일 만한 직장은 거의 없다.

역시 산업기술연수생인 라울 이바이씨(27)는 한국에 오자마자 오른손 손가락 3개를 프레스 기계에 잘렸다. 그는 지난해 9월1일 1차 연수생으로 한국에 와 ㅅ공업에서 일하다 아무런 기능 습득 훈련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3주일 만에 손가락 3개를 날렸다. 불행중 다행으로 그는 올해 4월 사업주한테서 “민사배상금으로 5백40만원을 지급받아” 5월에 귀국했다.
의문의 죽음에 불법 장기이식 의혹

이들보다 더 비극적인 사례는 한국에 돈 벌러 간 남편이나 아내가 영문도 모른 채 의문사한 경우이다. 알베르토 봉독씨(40·91년 사망)는 경기도 평택의 플라스틱 사출공장(ㅎ수지)에서 일하다 교통사고로 죽었다. 그의 시체검안서에는 사망 일시와 장소가 ‘91년 11월17일 오전 00:40 추정(교통사고), 화성군 정남면 덕절리 금강밴드 앞 국도상’으로 돼 있다.

그의 아내가 남편의 죽음과 관련해서 한국 정부로부터 받은 자료는 시체검안서와 화장증명서 2개뿐이다. 그리고 어느날 필리핀 정부로부터 한국자동차보험회사가 남편의 사망과 관련해 지급한 것으로 돼 있는 5백만원을 받아가라는 연락을 받았다. 뺑소니차에 치였는데 왜 보험회사는 그에게 5백만원을 주었을까.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지만 봉독 부인에게 그것을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닐라에서 커피 행상을 하는 오펠리아 아기레씨(38)도 동갑내기 남편인 펠리시시노 아기레씨(93년 사망)가 왜 죽었는지 이유를 모른 채 갑작스런 남편의 죽음과 관련해 낯선 한국인과 ‘강요된 거래’를 해야 했다. 펠리시시노씨는 경기도 남양주군의 ㅇ전자에서 일하다 93년 11월28일 밤 회사 기숙사에 화재가 나 타 죽은 것으로 돼 있다.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시름에 잠겨 있는 그에게 마닐라에 거주하는 한 한국인이 찾아온 것은 남편이 죽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이다.

자신을 남편 회사 사장의 친구라고 밝힌 전영식씨는 “나는 불법 체류자인 남편의 사망과 관련해서 당신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라고 말하면서 남편의 화장과 보상금 합의를 위한 위임장을 써줄 것을 강요했다. 필리핀의 장례 관습은 유리관에 담아 마지막 가는 모습을 보는 스페인 식이었지만 그는 경비 절감을 이유로 화장에 동의하라고 강요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오펠리아는 전씨로부터 화장한 뼛가루가 집에 있으니 합의금 6천달러(약 4백80만원)와 함께 받아가라는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영문도 모른 채 합의금을 받고 싶지는 않았으나 남편의 뼛가루와 함께 내민 영수증에 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탐문 결과 전씨는 인력 송출업을 하는 브로커였다. 그러나 전씨는 이미 다른 송출건으로 고소를 당해 민다나오 섬에 피신중이었다. 아기레의 큰아들 조엘(17)은 “아버지를 돌려달라”고 말했다. 아빠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막내 제랄드(4)는 취재진이 집을 방문하는 날에도 여느 때처럼 동네 아이들에게 “오늘 한국 간 아빠가 돌아오신다”고 자랑을 했다. 생후 여섯 달째에 아빠를 한국에 ‘보낸’ 제랄드한테는 여전히 집에 손님이 오는 날이 아빠가 오는 날이다.

3남매의 가장인 구알베르토 디아즈씨(42·무직)는 난치병에 걸린 자신을 대신해 한국에 돈 벌러 간 아내 베르나르디타씨(35·93년 사망)를 잃었다. 베르나르디타씨는 91년 12월 한국에 가서 봉제공장과 양계장을 거쳐 경기도 고양시의 ㅅ캘린더 공장에서 일하다 93년 6월 의문사했다. 죽기 전까지 그는 매달 2백달러(약 16만원)씩 집에 송금했다. 그가 처음 받은 전화 내용은 아내가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나중에 받은 시체인도서에는 아내가 ‘변사자’로 기재돼 있고, 직접 사인과 중간 선행사인 그리고 선행사인이 모두 ‘미상(unknowned)’으로 돼 있다. 사망 장소도 ‘불상’이었다. 의혹을 더욱 증폭시킨 것은 인도된 시체의 두 눈에 박힌 플라스틱 의안이었다. 보상금은 한푼도 없었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사망 시각이 ‘9월16일 오전 10시경’이라는 점이다. 사망 일시가 평일이고 근무 시간이라는 점에서 디아즈는 아내가 산재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한편 시체의 의안은 가족 동의 없이 장기를 이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품게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추측일 뿐이다. 디아즈는 “보상보다 한국 정부의 정의를 구하고 싶다. 아내의 죽음과 관련해 한국 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밝혀달라”고 말했다.
‘나쁜 일본’ 뺨치는 한국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에 대한 해답은 간명하다. 한국 정부가 약속을 지키기 않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종합대책에 담긴, 재외공관에 ‘외국인 재해보상 신고센터’를 설치하고 정부의 산재보상 방침을 외국에 홍보하겠다는 약속은 아무것도 지켜지지 않았음이 확인되었다. 심지어 어떤 산재자는 산재보상을 해준다는 소문을 듣고 한국대사관을 찾아갔으나 대사관 관계자가 ‘금시초문’이라고 거짓말을 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실제로 한국대사관의 한 관계자는 “보상 문제로 개별적으로 찾아온 경우는 몇 건 있었으나 대개 한국에 연고가 있는 산재자들이라 개별 구제가 가능한 것으로 보여 주한 필리핀대사관을 통해 해결하라고 통보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정부의 산재보상 방침에 대한 현지 홍보 활동도 했다고 말했으나 그와 관련한 신문 기사 같은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이 관계자는 결국 “‘불법 취업 외국인 근로자 보호’ 공문은 받았으나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대사관이) 직접 처리한 것은 한건도 없다”고 인정했다.

한국대사관에는 직원 20여 명이 일하고 있다. 그러나 외국인노동자 피난처가 파견한 조명숙씨는 필리핀에서 넉달 만에 50건의 산재보상 신청을 접수했다. 이들은 모두 루손 섬 출신이다. 교통과 통신 사정이 나쁜 민다나오나 다른 섬에 흩어져 있을 산재자까지 합치면 산재자 수는 수백 명으로 추산된다.

뜻이 없는 곳에는 길도 없는 것이다. 이같은 약속 불이행이 필리핀에만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 인력이 들어오는 중국을 포함한 동남아 각국에 모두 해당하는 것이다. 조명숙씨보다 앞서 외국인 노동자 피난처가 파견한 김재금 간사 또한 네팔과 방글라데시에서 30건의 산재보상 신청서를 받아왔다. 피난처는 이들의 사례를 취합해 9월중으로 기자회견을 열고 노동부에 산재보상 신청서(80건)를 접수시킬 예정이다. 정부가 할 일을 민간단체가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연수생 관리 실적이 우수한 국가(인도네시아·베트남 등)에 대해서는 배정 인원을 늘리고, 연수생 이탈률이 높은 국가(중국·네팔·필리핀 등)에 대해서는 연수생 배정을 제한하는 등 억압적 노동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인도네시아에서 연수생을 한국에 보내기 전에 ‘특수 지옥훈련’을 시킨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필리핀 언론은 한국에서 일어나는 노동 착취 사례를 크게 보도하면서 한국이 1인당 국민소득 만달러가 되기도 전에 서툰 일본 흉내를 내고 있다고 비웃고 있다.

그러나 우습게도 한국은 여전히 일본 내에서 불법 체류자가 가장 많은 1위국(9월10일 현재 4만7천5백여 명)이다. 물론 강제 추방자 수에서도 단연 1위이다. 필리핀을 비롯한 동남아 국가들에서 번지는 반한 감정은 한국이 ‘일본 뺨치는 행동’으로 언제까지 ‘돈주고 뺨맞는 일’을 계속할 것인지를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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