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 전경련 회장 맡아 이목 집중
  • 金芳熙 ·李哲鉉 기자 ()
  • 승인 1998.03.2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차기 전경련 회장 맡아 이목 집중…전환기 맞은 ‘세계 경영’ 행보도 관심
지난 3월12일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단과 고문단이 모인 롯데호텔 38층 에메랄드룸. 이 자리에서 단연 돋보인 이는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었다. 그는 이 날, 내년 초 2년 임기를 시작할 전경련 차기 회장으로 공식 내정될 예정이었다. 복도를 가득 메운 사진기자들은 김회장에게 ‘(사진 촬영을 위해) 좀 천천히 걸으라’고 주문하기에 바빴다.

이 날 행사는 새 정부 들어서 자연스럽게 재계의 입장을 대변해 오던 김회장을 공식으로 재계 대표로 추인하는 자리였다. 현회장인 최종현 SK그룹 회장이 지난해 유임되면서 내건 공약 사항에 따른 일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재계가 그를 새 정부와의 대화 창구로 지정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비공개로 진행된 간찬회에서도 김회장은 ‘정부와 긴밀하고도 원활히 대화하도록 하는 데 주력하겠다’는 취임 소감을 밝혔다고 손병두 전경련 상근 부회장은 전했다.

굳이 이 일이 아니더라도, 김우중 회장에게는 최근 들어 뜨거운 관심이 모아져 왔다. 그 계기가 된 것은 지난 1월24일 그가 김대중 당시 대통령 당선자를 단독으로 만난 일이었다. 그는 1월13일 이루어진 당선자와 5대 재벌 총수간 면담에는 선약이 있다고 불참한 상태였다. 게다가 그는 김대중 정부 핵심 인사들과도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33쪽 아래 상자 기사 참조).

전경련 회장단과 고문단은 만장일치로 그를 차기 회장에 내정했지만, 질시나 의혹의 시선도 없지 않다. “대우나 김우중 회장에 대한 다른 그룹들의 시선이 김영삼 정부 시절 삼성이나 이건희 회장을 바라보는 시선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경쟁 관계인 다른 그룹 기획 담당 임원의 설명이다.

대우가 삼성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을 달갑게 받아들이지만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대우그룹측은 김우중 회장이 전경련 차기 회장으로 내정된 이유를 ‘단지 차례가 되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김대중 당시 당선자와 독대한 것에 대해서도 우연한 일이라는 입장이다. “당선자와 처음 만나기로 한 날 선약이 있어 참석하기 어렵다고 했더니, 당선자 진영이 그런 사정이 있다면 나중에 보자고 했던 것뿐이다. 독대한 자리에서 전달한 서류를 갖고도 말이 많지만, 외환 위기 극복을 위한 의견과 건의가 담긴 자료였을 뿐이다.”
김우중 회장의 경우는 한 발짝 더 나아가 새 정부의 재벌 정책에 반발하는 듯한 말을 두어 차례 하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모두 해외 회의 석상에서의 발언이었다. 지난 1월 다보스 포럼에서는 ‘왜 경제 위기의 책임이 대기업에만 있느냐’고 했고, 3월 제네바 모터쇼에서는 ‘새 정부의 재벌 정책을 국제 기준에 맞게 다시 짜야 한다’고도 했다.

그러나 대우와 김회장은 이같은 발언이 새 정부의 재벌 정책에 반발하는 것으로 비치는 것에 대해서도 우려한다. 발언을 거두절미하고 보도해 진의를 왜곡한 언론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다. 김우중 회장도 전경련 차기 회장으로 내정된 후 “정부와 재계가 마찰하는 모습으로 비치는 것은 좋지 않으며, 외국인 투자나 대외 신인도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재계는 이런 일련의 발언들이, 사업을 하는 데 권력과의 관계를 십분 활용하되 말썽이 생길 정도로는 하지 않는 김우중 회장 특유의 균형 감각에서 나왔다고 믿는다. 김회장은 주요 신흥 시장의 국가 원수들과 폭넓게 교류하고 있으며, 이를 세계 경영에 적절히 활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김우중의 세계 경영에 대해 경영학자들이 체계적으로 분석한 <세계가 열린다, 미래가 보인다>에서, 송 일 교수(외국어대·무역학)가 ‘(김회장은) 대통령·총리·당서기장·국왕·왕자 등 국정 최고 책임자와 그 나라 입맛에 딱 맞는 조건을 내걸고 담판을 짓는다’고 썼을 정도다. 국내에서도 이른바 ‘세계 경영 방식’을 그대로 적용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실제로 새 정부와 김우중 회장의 관계는 어떨까. 김대중 대통령이 대우나 김우중 회장에 대해 공식으로 언급한 적이 거의 없어,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김회장의 한 측근은, 김대통령이 김회장의 사업 수완을 높이 평가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평했다. 그의 말마따나 김우중 회장이 누리는 영향력의 진정한 원천은 5년 남짓 추진되어 온 세계 경영의 성과에 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할 것 같다.

대우그룹은 5년 전만 하더라도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이류, 삼류에 머물러 있었다. 더욱이 주력 계열사인 대우자동차는 수천억원대 손실을 기록하고 있었으며, 미래도 밝지 않았다. 지난해부터 미국 하버드 대학 경영대학원에서 사례 연구 교재로 쓰이고 있는 <대우의 국제화: 우즈베키스탄 자동차 프로젝트>는 한 분석가의 말을 인용해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대우자동차의 위치는 점차 흔들리고 있었고, 사기와 품질도 점차 엉망이 되어 가고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매출액 기준으로 한 재계 순위(4위)는 당시와 변함이 없다. 그러나 자동차·가전제품 같은 주력 상품은 현재 업계 1위를 노리고 있고, 당시와 같이 대규모 적자를 내는 계열사도 없어졌다. 골칫거리였던 대우자동차도 지난해 약 2천억원 흑자를 낸 것으로 추정된다(오른쪽 표 참조).

더욱 중요한 자산은 신흥 시장을 중심으로 방대한 세계 경영 거점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97년 말 현재 대우그룹의 해외 사업 거점은 5백90개에 종업원 수가 18만명에 이른다. 여기에 선진국의 거점들이 추가되면, 2000년에는 25만 종업원을 거느린 천 개의 거점이 생긴다. 김회장 자신이 스스로 ‘생애의 마지막 승부처’라고 일컫는 자동차산업 분야에서는 해외 생산 2백만대 능력(국내까지 포함하면 3백만대)을 갖춘 세계 10대 자동차 제조업체로 도약한다는 계획이다. 아직 세계 경영 전략의 성패를 논하기는 어렵지만, 예전의 위기가 기회로 바뀐 것만큼은 확실하다.
특유의 집중력으로 두 번의 위기를 기회로

물론 김회장이 새로운 위기를 맞을 가능성도 꽤 있다.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유럽·중남미·아시아 신흥 시장에 무모하리만큼 집중 투자한 데다, 이들 지역으로 아시아 통화 위기가 번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투자 재원을 현지에서 조달해 쓰고 있다. 한국과 국내 기업들의 대외 신인도가 하락해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면, 세계 경영 구상은 뿌리째 흔들릴 수도 있다.

대우그룹과 10년 넘게 거래해 온 외국 은행 국내 지점의 한 관계자는 “대우그룹은 외부 자본에 의존해 사업을 확장하고 있기 때문에 한 부분이 잘못되면 연쇄 반응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일부 지역에서는 투자 계획이 지연되고 있어, 이런 관측을 뒷받침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우그룹은 현재의 외환 위기 상황을 ‘금리 부담이 다소 늘어나는 정도의 문제’라고 보고 있다.

1년의 4분의 3을 해외에서 보내는 김우중 회장은 일 중독자(workholic)로 유명하다. 그를 수행해 출장을 갔던 전직 대우 간부의 얘기를 들어 보자. “한번은 출장길에 비행기를 갈아 타려고 홍콩에 잠깐 기착한 적이 있었다. 그는 4시간 정도 되는 짬을 이용해 회의를 세 번이나 열었다. 마침 일요일이어서 식당들이 문을 닫아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로 때우면서 회의했다.”

김회장을 아는 사람들이 정작 감동하는 것은 그의 그런 열성이라기보다는 집중력이다. 풀어야 할 문제가 생기면, 당분간 거기에만 몰두해 해결하고야 마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다. 그는 그런 집중력으로 대우그룹에 찾아든 두 번의 위기, 즉 80년대 후반 대우조선의 대규모 노동 쟁의와 그로 인한 부실 경영을 해결했고, 90년대 초반 대우자동차의 대규모 적자 문제를 풀었다. 두 경우 모두 해당 회사에 상주하면서 근로자들과 정부를 설득했다.
대우그룹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대우그룹이 김회장 1인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최대 약점으로 꼽기도 한다. 대우 출신인 외국 금융기관 국내 지사의 관계자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회장 자신은 부하들에게 재량권을 주려 하지만, 임원들은 회장의 의중을 파악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하나에서 열까지 보고만 하고 책임은 지지 않으려고 한다.” 이 점은 앞으로 부자 세습을 피하고 전문 경영인 체제로 대우그룹을 이끌겠다는 김회장의 구상에도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크다(김회장의 아들은 현재 대우자동차 임원인데, 공부를 하러 다시 미국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그룹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노련한 승부사답게 그는 이미 눈앞에 드러나 있는 세 번째 위기에 맞설 준비를 진작부터 해왔다. 그가 생각하는 해법은 단순하다. ‘돈이 궁하면 더 많은 돈을 끌어들여라’. 지난 3월16일 그의 구상 가운데 일부가 실현되었다. 이 날 김회장과도 친한 알 왈리드 사우디 왕자는 대우에 1억달러를 추가 투자하겠다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외환 위기 이후 김회장은 이미 5천만달러(약 8백억원)를 대우에 투자한 바 있는 이 소문 난 국제 투자가의 자본을 유치하려고 애써 왔다.

김회장이 자신의 구상에 끌어들이려고 하는 또 다른 대상은 세계 최대의 자동차 제조업체인 미국 제너럴모터스(GM)다. 대우는 지난해 5월께부터 이 회사의 자본을 유치하고 공동 생산·판매하는 방안을 비롯한 다각적인 전략적 제휴 방안을 모색해 왔다.

“GM과 제휴 성사되면 재계 1위 도약 가능”

흥미로운 것은 제너럴모터스가 80년대 말 경영 관리상의 견해차 때문에 결별하기까지 대우의 합작 파트너였다는 점이다. 95년 말에는 폴란드 자동차 제조업체인 FSO 인수를 둘러싸고 대우와 경쟁하기도 했다. 제너럴모터스 경영진은 당시 입찰에서 대우에게 패하고 나서 ‘대우만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공언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신흥 시장에 기반을 확보하지 못한 이 회사에게 지금은 대우의 거미줄 같은 해외 거점이 절실히 필요한 형편이다.

대우와 제너럴모터스의 전략적 제휴가 성사되면, 사업 세계에 영원한 적은 없다는 김회장의 지론이 현실화하는 셈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만일 6월 말까지 제휴가 성사된다면, 대우가 재계 1위로 올라서는 것도 시간 문제다.” 대우그룹 한 임원의 자신에 찬 말이다. 그러나 그의 말이 들어맞으려면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두 번에 걸쳐 큰 위기를 기회로 바꾼 김우중 회장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문제를 푼다는 전제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