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그때 무슨 일 있었나
  • 박성준 기자 (snypesisapress.com.kr)
  • 승인 2005.01.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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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은 한국 현대사 질곡의 출발점이 되는 을사보호조약 체결 100주년이 되는 해다. 그때와 지금은 무엇이 다르고 같은가. 역사는 과연 진보하는지, 반복되는지, 한 세기 전의 한반도 상황을 되돌아본다.
지나간 일을 살피면 다가올 일을 안다는 것은 공자가 한 말이다. 과거를 ‘오래된 미래’라고 부르는 이도 있다. 이 명제가 옳다면 한 가지 가정이 설득력을 얻는다. 더 오랜 과거를 뒤돌아볼수록 더 먼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 한 세대 뒤의 일을 내다보려면 10년 전 과거를 돌아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2005년은 여러 가지 역사적 기념일이 중첩되는 해이다. 가까이는 한·일 국교가 정상화한 지 40주년이 된다. 또 완전한 주권 국가를 건설하지 못한 채 광복을 맞은 지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올해는 또 대한제국과 일본 사이에 을사보호조약이 강제 체결되어 대한제국이 외교적 자주권을 잃어버리고 식민화의 길로 들어선 지 꼭 100년째 되는 해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난날 특정 시기의 역사적 사태가 각각 독립성을 지니는 개별적인 사태가 아니라 인과 관계의 누적이라는 데 있다. 만약 식민화의 길을 걷지 않았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 과정의 산물인 분단도 없었을 것이며, 분단을 고착화한 한국전쟁도 그 규모나 내용 면에서 양상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현대사 질곡의 출발은 1905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시사저널>이 새해를 여는 첫 마당에 100년 전인 1905년을 주목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시사저널>이 한 세기 전으로 거슬러올라가는 이유는 또 있다. 100년 전 세계 체제가 전개된 과정이 오늘날과 놀랍게도 유사하기 때문이다. 100년 전 세계 체제는 몇몇 신흥 강국이 등장해 기존 질서를 위협하며 곳곳에서 충돌하고 있었다. 100년이 흐른 지금 세계 체제는 또다시 근본적인 이행기로 접어들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1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이같은 이행기의 압력이 지정학적으로 몹시 중요한 한반도에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다(64~67·70쪽 사진 독립기념관 제공).
최익현의 상소문으로 열린 100년 전 을사년

1905년 을사년의 아침은 최익현의 연이은 상소문으로 열렸다. 당시 최익현의 나이는 73세. 개인으로 보자면 인생의 황혼기에 도달해 있었으며, 공인으로서는 산전수전 다 겪은 국가 원로 중의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1905년을 그의 생애 어느 때보다 바쁘고 고달프게 살았다.

그가 1905년에 들어서기 무섭게 고종에게 제출한 상소는 정무 5조와 관련된 건의서였다. 그가 특히 문제 삼은 것은 대외 정책이었다. 최익현은 ‘조정이 섣불리 자주 외교와 교린 외교를 펼치는 바람에 온 나라의 재원을 ‘저들’(일본)에 탈취당하게 되었다’며, 이를 원상으로 되돌리고, 국가 전례를 1894년 갑오개혁 이전 상태로 되돌리라고 요구했다.

최익현의 상소는 그 후로도 세 번 더 이어져 급기야 ‘친일파를 찢어죽일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는 영향력이 큰 최익현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그를 감금하거나 경기도 포천·충청도 정산 등으로 압송했다.

최익현이 격한 어조로 친일파를 성토하는 상소를 올린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을사보호조약은 1905년 11월에 가서야 강제로 체결되었지만, 친일파를 조종해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일본의 법적 조처는 1904년 이미 상당한 정도로 진척되어 있었던 것이다.

조선을 일본의 속국으로 만드는 결정적 계기는 러일전쟁이었다. 1904년 2월8일 기습 공격을 감행한(정식 선전 포고일은 2월10일) 일본은 같은 날 이미 제12사단 선발 부대를 인천항(당시 제물포)에 상륙시켰고, 같은 달 23일에는 군사 전략상 필요한 한반도 내의 모든 지역을 자유롭게 이용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는 ‘한·일 의정서’에 도장을 찍게 했다.
그 해 3월 일본은 조선에 조선 주차군을 설치했으며, 대동강 얼음이 풀리자마자 평양의 관문인 진남포에 대규모 병력을 상륙시켰다. 한반도에서 러시아군을 몰아낸 뒤 일본은 조선 내 주요 전신 시설과 철도 노선을 장악했다. 같은 해 8월 일본은 재정 운용과 외교 문제를 일본이 추천한 ‘고문’에게 맡기는 제1차 한·일협정을 조인케 했다.

최익현이 1905년 새해가 열리자마자 친일파 처단을 외치며 마지막 피를 토하고 있었지만, 대세는 이미 바깥에서 결정 나고 있었다. 만주에서는 일본의 승세가 굳어지고 있었고, 미국에서는 팽창주의자이자 친일파인 시어도 루스벨트가 미국 내의 비판 여론에도 불구하고 재선에 성공했다. 1905년 3월 일본 정부는 펑텐 전투가 승리로 끝나자마자 러시아와 강화를 서둘렀고, 1905년 5월 동해 해전에서 러시아 발틱 함대를 격파하자마자 미국에 정식으로 강화 중재를 요청했다.

1905년 여름을 지나며 일본은 사실상 대한제국을 거머쥐었다. 7월29일 미국의 전쟁장관(현재의 국무장관에 해당) 윌리엄 태프트와 일본의 가쓰라 다로(桂太郞) 총리가 도쿄에서 만나 밀약을 체결했다. 일본이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대신, 미국은 일본의 한반도 종주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이다. 이 협약은 1924년에야 공개되었다.

일본은 이와 함께 당시 세계의 패권국 영국과도 긴밀한 협조 체제를 구축했다. 1902년 체결된 영·일 동맹을 개정해, 동맹 관계를 ‘공수 동맹’ 체제로 격상한 것이다. 최초 영·일 동맹의 핵심은 ‘중립’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2차 영·일 동맹이 성립된 시기이다. 개정된 영·일 동맹은 1905년 8월12일 영국 런던에서 서명되었다.

포츠머스 강화 조약 조문 가운데 한반도의 운명과 직결되는 것은 제2조였다. 즉 ‘러시아 제국 정부는 일본이 조선에 지배적인 정치·군사·경제적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일본 제국 정부가 조선에 채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형태의 지도·보호·감독 조치에 대해서도 이를 간섭하거나 방해하지 않기로 합의한다’. 여기서 ‘적절한 지도·보호·감독 조치’의 핵심이 바로 대한제국을 일본의 보호 아래 두고, 그 보호 사무를 위해 통감부를 설치하는 것이며, 바로 이를 규정한 것이 1905년 11월17일 덕수궁 부속 건물인 중명전(68쪽 상자 기사 참조)에서 한밤에 강제로 조인된 을사보호조약이다.
을사보호조약이 늑결(勒結)된 소식이 알려지면서, 1904년 상황과 비교해 차라리 평온했던 한반도는 다시 들끓었다. 나중에 상해임시정부를 이끌게 되는 백범 김 구는 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급히 서울로 올라와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작성해 조정에 올리는 한편, 11월30일 동지들과 함께 종로에서 조약 체결의 부당성을 알리는 항의 시위를 벌였다. 백범은 당시 30세 청년으로서 평안도 진남포에서 에버트청년회 총무로 일하고 있었다.

백범은 자신의 회고록 <백범일지>에 이 날의 상황을 기록했다. ‘왜놈들이 총을 쏘며 군중을 해산시키려 하자, 불탄 집에 나뒹굴던 기와 조각을 집어던지며 성난 군중이 항거했다.’ 육군부장 민영환이 유서 5통을 남기고 자결한 것도 바로 이 날이었다. 백범은 이 날 참찬 이상설이 자결하려다 미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려가는 장면도 목격했다. ‘어떤 한 사람이, 흰 명주저고리에 갓 망건도 없이 맨상투 바람으로 의복에 핏자국이 얼룩덜룩한 채 여러 사람의 호위를 받으며 인력거에 실려가면서 크게 울부짓는 모습’을 보았는데, 누군가에 물으니 이상설이더라는 것이었다.
이같은 일이 있기 며칠 전 위암 장지연은 자신이 운영하던 <황성신문>에 ‘오늘을 목놓아 통곡한다(是日也方聲大哭)’는 제목의 논설을 발표했다. 그는 이 논설에서, 동양 삼국의 안녕을 내세워 을사조약 5개 항을 합리화한 이토 히로부미를 고발하는 한편 ‘2천만 생령(국민)’의 이름으로 을사늑약에 도장을 찍은 을사 5적을 ‘매국의 도둑’이라고 규탄했다. 장지연은 이 논설로 일본 관헌에게 체포되어 이듬해 2월까지 옥살이를 했다.

‘의분만으로 일어났던’ 의병운동도 실패

연초부터 일본 관헌으로부터 탄압을 받던 최익현도 다시 일어나, 을사 5적을 처벌할 것을 주청하는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를 올리고, 의병 궐기를 위한 준비에 본격 착수했다. 그 뿐 아니라, 허 위 이강년 신돌석 연기우 홍범도 강기동 민긍호 유인석 우동선 등 우국 지사가 모두 의병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1894년 갑오년 이후 제2차 의병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훗날 이토 히로부미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저격한 안중근 의사는 이 때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위한 방도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다가 1905년 12월 진남포를 통해 잠시 귀국했다. 안의사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 남긴 자전 <안응칠 역사>(‘응칠’은 안중근 의사의 어릴 적 이름)에 따르면, 그의 귀국은 중국 상하이에서 만난 프랑스 신부의 ‘귀국해서 교육 사업을 도모하라’는 충고에 따른 것이었다. 이 때 안의사의 나이 27세. 그는 이듬해 봄까지 가산을 정리해 진남포에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세워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할 때까지 인재 양성에 나섰다.

이처럼 울분과 분노의 함성이 삼천리 강토에 메아리치면서 1905년이 저물었지만, 기울어가는 대세를 돌이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 나라의 존엄과 주권이 비분 강개나 단기필마 식의 저항 운동, 명분을 내세우는 호소만으로 지켜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강만길 상지대 총장 등 역사학자 대부분은 이 때의 실패를 정부의 무지·부패와 능력 부재에서 찾는다. 조선 식민화의 1차 충격이 있었던 1895년(청일전쟁)과 1905년 사이, 조선의 조정은 친로파·친일파·친미파 등으로 갈려 서로 권력 다툼을 벌이며 시간을 허비하기 바빴다. 이 과정에서 이완용·윤치호 등 눈치 빠른 정치인들은 친미파에서 친일파로 전향했다.

이와 달리 조정은 바깥 세계의 흐름에 둔감했다. 1905년 9월 대한제국 정부는 미국 시어도 루스벨트의 딸 엘리스 일행이 동아시아를 순방하던 차에 조선에 들렀을 때 ‘국빈’처럼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일본을 견제해줄 유일한 세력으로 미국을 상정하고, 엘리스의 환심을 사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조선에 유리하게 돌려놓으려 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미국 정부는 조선의 일본 속국화를 기정 사실화하고 ‘한반도 불개입 정책’에서 ‘조선 포기 정책’으로 한반도 정책을 전환한 뒤였다.

그나마 일부 지각 있는 인사들이 결단을 내렸다. 백범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상소 운동을 벌이다가 이내 귀향을 결정했다. ‘7년 묵은 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하는 식’의 처방으로는 독립이 무망함을 깨닫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발길을 돌린 것이다. 그는 <백범일지>에 당시의 의병운동에 대해서도 ‘충천하는 의분심만 가지고 일어났으니 여러 곳에서 실패했다’고 적었다.
일본 ‘군국주의 깃발’ 언제 내릴까

100년 전의 역사는 단순히 안타까운 옛이야기로 끝을 맺지 않는다. 2005년의 한반도 주변 정세는 다시 강대국에 의해 주도되는 체제 개편의 격랑에 빨려들고 있다.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은 일찌감치 냉전 체제와 결별을 선언하고, 새 판 짜기에 나섰다.

‘군국주의’라는 깃발을 날리며 미국과 한판 피비린내 나는 결투를 벌였던 일본은 최근 다시 미국과 공동 이해를 확인하며 ‘동맹 강화’ 작업을 벌이고 있다. 100년 전 미국과 일본의 공동 봉쇄 대상이었던 러시아의 자리는 오늘날 중국이 대신하고 있다. 일본은 ‘방위대강’을 고쳐 중국과 북한을 ‘위협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

안보 문제를 둘러싸고 우왕좌왕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보수·기득권층은 거의 무조건적으로 ‘한·미 동맹 강화’만을 외치고, 이에 반발하는 쪽은 또한 너무 쉽게 ‘친중’을 말한다. 너와 나가 따로 없어야 할 안보 문제에 ‘기득권’과 ‘아집’이 얽혀 좀처럼 의견 통일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문가 켄트 칼더는 최근 동아시아 정세를 논한 글에서 ‘1950년대 성립한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흔들리고 있으며, 새로운 지정학이 특히 한반도의 소용돌이를 중심으로 유동화되고 있다’고 지적했지만, 그의 논평은 적어도 한 가지 점에서 새로울 것이 없다. 변화는 늘 강대국이 주도하며, 여기에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하면 한반도의 운명을 자기들끼리 농단하는 ‘제2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성립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1904~1905년 연표

1904년
2월8일 일본 제12사단 선발 부대 인천항(당시 제물포) 상륙
2월9일 일본의 러시아군 기습 공격으로 러일 전쟁 발발
2월10일 일본, 러시아에 선전 포고
2월23일 한·일 의정서(외무대신 임시 서리 이지용) 발효
3월7일 일본, 한국주차군 설치 결정
3월21일 일본군 제1군 주력, 진남포 상륙(4월 중순 러시아와 접전 끝에 평양 점령)
4월26일 일본군, 압록강 도하 작전 개시
7월2일 일본 한국점령군, 한국 내 주요 전신·철도 노선 장악
8월22일 제1차 한·일 협정 조인(외무대신 서리 윤치호)

1905년
1월1일 러시아군, 일본군에 항복
2월22일 일본군, 만주 펑텐 공략 개시
3월4일 미국 시어도 루스벨트 대통령 재선 성공
3월말 이토 히로부미 조선 방문
4월21일 일본 정부, 러·일 강화조약 조건 결정
5월27일 동해 해전(5월28일 일본군 승리로 결정남)
6월1일 일본 정부, 미국 대통령에게 러·일 강화 중재 공식 요청
7월29일 가쓰라·태프트 밀약
8월10일 러·일 강화회의 개시
8월12일 제2차 영·일 동맹 조약(핵심은 공수 동맹)
8월23일 러일, 포츠머스 강화 조약
11월9일 이토 히로부미 조선 방문.(이후 10일·15일 두 번에 걸쳐 고종 알현)
11월17일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 또는 제2차 한·일 협약) 강제 조인(외무대신 박제순)
11월20일 황성신문에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논설 발표
11월30일 민영환 육군부장, 우국 유서 5통 남기고 자결. 백범 김구, 종로에서 을사늑약 반대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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